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시작
내가 태어난 곳은 4천 년 역사상 가장 복잡 다난한 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었던 조선 땅이었다. 불행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외세가 한반도를 지배하려는 사건으로 점철된 역사다. 조선 사람들이 외국의 지배와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한 정치적인 결과는 드디어 조선을 폐쇄된 ‘은둔 왕국’으로 알려지게 만들었다.
내가 서울에서 태어난 때는 1893년 11월 10일, 마침 조선이 고립 정책에서 벗어나 국제 대열에 들어서려던 시기였다. 나는 그 당시까지 외국인에게는 한 번도 허가된 일이 없었던 이북 지방에서 살게 되었다. 백인 어린아이로는 내가 처음이었다. 약 1백 년 동안 금지되어온 기독교 선교가 나의 부모에 의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이 사실은 종교적으로 억압에서 자유라는 전환점을 맞는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나의 부모인 닥터 윌리엄 제임즈 홀과 닥터 로제타 셔우드 홀은 미국 감리교 해외선교회 소속인 의료 선교단의 일원으로 조선에서 봉사하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 윌리엄 제임즈 홀은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한 통나무집에서 다섯 형제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특출나게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신중하고 사려 깊은 소년이었다. 열일곱 살 때 목수 견습공으로 취직을 했으나 2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건강이 나빠져 집으로 돌아와 죽을 때를 기다렸다. 기독교 신자였던 아버지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덧없이 죽게 된 점을 가장 괴로워했는데 뜻밖에도 건강이 회복되었다. 다시 살아난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해야 가장 뜻있게 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아버지는 1883년, 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2년간 교사로 일했다. 그는 학교에서 받은 봉급과 틈틈이 생명보험사의 세일즈맨으로 일해서 번 돈을 모아 1885년에는 온타리오 주 킹스턴에 있는 퀸즈 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의과대학에 YMCA 지부를 성공적으로 조직함으로써 그의 봉사 의욕과 조직력을 입증했다. 그리고 1887년, 그에게 인생의 한 전기가 찾아왔다. ‘해외 선교 학생 자원 운동’의 인도 지역 책임자인 존 포먼 목사가 퀸즈 대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이 때 22명의 학생들이 해외 선교에 참가하겠다는 서명을 했고, 그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졸업하자마자 바로 감리교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메디슨 가 의료 선교지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의료 선교회 간부였던 닥터 스톤의 저택에 기거하면서 날마다 뉴욕의 빈민가로 출근했다. 닥터 스톤 내외는 닥터 홀을 매우 사랑하여 마치 아들처럼 대했다. 그는 닥터 홀의 활동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닥터 홀은 자애로운 의사로서, 불쌍한 사람들의 형제로서, 병들어 죽어가는 뉴욕 거리의 사람들을 아무 대가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돌보았다. 상대가 살인자건, 도둑이건, 어떠한 범죄자건 가리지 않고 선교의 사명을 다했다. 닥터 홀은 자기의 주인, 예수가 행한 것처럼 날마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밝고 더 나은 생활로 인도하는 데 몰두했다. 그는 철학적, 신학적인 이론을 캐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상냥함과 사랑을 나눠주는 행동의 사람이었다.
어느 날, 닥터 홀은 조수로 온 로제타 셔우드를 보는 순간 첫눈에 사랑을 느꼈다. 두 사람은 헌신적으로 합심하여 험한 그 지역의 시료원 일을 잘 해냈다. 이듬해 부활절, 닥터 홀은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 이때 그녀는 이미 조선에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뒤였으므로 취임 후 5년 동안은 결혼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사양했다. 그러나 닥터 홀은 약혼기간이 아무리 길어져도 기다리겠다고 하여 두 사람은 약혼을 했고, 1890년, 닥터 셔우드는 조선으로 가기 위해 그곳을 떠났다. 닥터 홀은 이별이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그녀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에 더욱 감탄했다. 이로 인해 또 다른 차원의 깊은 사랑이 솟아났다.
닥터 홀도 해외 선교사로 나갈 길을 모색하며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 당시 닥터 셔우드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적혀 있다. “로제타, 난 방금 그토록 바라던 조선으로 임명을 받았소. 하나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지금보다 더 깊게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지금 조선에 있다가 안식년 휴가로 이곳에 돌아온 닥터 스크랜턴과 함께 방을 얻어 기거하고 있습니다. 스크랜턴 모자는 당신을 높이 칭찬하더군요.”
닥터 홀을 떠나 보내는 환송은 인정이 넘치는 따뜻한 풍경이었다. 가장 가슴을 울린 송별사는 닥터 홀에게 치료를 받았던 가난하고 병들었던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한 유태인 환자는 벅찬 감정에 말을 더듬었다. “닥터 홀은 오랫동안 우리를 계속 찾아주었습니다. 그는 훌륭한 분입니다. 돈을 받지 않고 우리를 치료해주었으며 먹을 것을 가져와서는 무릎을 꿇고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해주곤 했습니다.” 한 의과대학 학생은 “닥터 홀은 관대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고, 상대방의 장점을 계속 강조하여 실제보다 더 크게 인정해주고 고무해주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그 사람이 인정받은 그대로 되었다”면서 진심으로 그를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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