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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Joyfule 2018. 5. 7. 01:14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개척을 향한 모험

여자를 치료하거나 기독교를 전하려면 여의사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닥터 스크랜턴은 여성해외선교회에다 여자와 어린아이들만을 따로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어달라고 청원했고, 이 요청이 수락되어 1887년 닥터 메타 하워드를 조선에 파견했다. 이 병원은 스크랜턴 여사가 세운, 조선에서는 첫 번째 여학교인 ‘이화학당’과 한 장소에 있었다. 닥터 하워드는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치료했고, 그 결과 건강이 악화되어 1889년에는 미국으로 귀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닥터 셔우드는 바로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조선에 왔던 것이다.


닥터 홀이 도착하기 몇 주 전은 닥터 셔우드에게는 매우 바쁜 나날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열정을 가지고 일에 몰두했다. 이 무렵 치료된 환자 수는 1년 전에 비해 3배나 더 많았다. 한편 학교에서는 계속 심리학과 약물학을 가르쳤다. 닥터 셔우드는 어린 조수들에게 인체학을 가르치기 위해 사람의 골격을 교습 자료로 쓸 구상을 했다. 무심결에 동료 선교사에게 지난 봄에 남산의 성 밖에서 주운 사람의 해골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겠다고 했는데, 이 말을 들은 선교사들은 놀라서 주의를 주었다. 왜냐하면 전에 “외국인들이 조선 아이들을 잡아먹고 약으로 쓴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던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선교사들은 이 해괴한 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긴박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조선에 온 선교사들이 부딪힌 가장 미묘하고 심각한 문제는 전통적인 조상 숭배의 관습이었다. 초기 카톨릭 교도들이 처형을 당한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이었다. 조상 숭배의 관습을 포기해야 하는 점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 힘든 투쟁이었다. 닥터 셔우드는 양반집에 왕진갈 때면 안마당에 세워진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보곤 했다.


1891년 12월 15일, 닥터 홀이 탄 배가 부산에 도착했다. 닥터 셔우드는 약혼자에게 병원을 보여주었다. 그녀의 표정에 닥터 홀과 함께 있는 즐거움이 너무나 또렷이 비쳤다. 닥터 홀은 결혼 날짜를 정하기를 원했다. 그는 아펜젤러 부부가 여름에 안식년 휴가를 얻어 미국에 가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그 집이 빌 것이다. 그는 셔우드에게 이 기회를 이용해 결혼하자는 뜻을 비쳤다.


한편 닥터 홀의 선교회에서는 새로운 선교 기지를 찾기 위해서 닥터 홀과 존즈 선교사를 이북에 전진기지를 탐사하도록 보내기로 결정했다. 조선 정부에서 허가만 한다면 선교 기지를 세울 예정이었다. 그들은 서울에서 북쪽으로 600킬로미터 떨어진, 만주와 접경지인 의주까지는 함께 여행하고 거기에서 서로 갈라져, 닥터 홀은 평양을 거쳐 서울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홀은 매우 힘들긴 했으나 조선 사람들로부터 매우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그는 평양이 조선 내륙의 선교기지로서는 최적지라고 보았으며,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점은 후에 증명되었다. 그는 평양이 왜 최적지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지적했다. “첫째, 이 도시는 조선에서 가장 문란하고 더러운 도시라는 평을 받고 있으므로 선교의 도전 대상지가 된다. 또한 자기들의 기분에 맞지 않으면 일반인이건 관원들이건 막론하고 돌로 때리는 폭력배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거기에다 인구가 10만이 넘으며, 주민들은 적극적이라 번성할 여지가 있는 도시다. 이외에도 이곳은 서울과 북경 간을 연결하는 도로선상에 위치하므로 육로 사정도 괜찮고 해상 교통도 용이하다. 그리고 평양은 찬란한 역사의 도시다.”


결혼식은 6월에 거행되었다.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홀 내외는 아펜젤러 씨의 빈집에다 신혼 살림을 꾸몄다. 그런데 얼마 후 셔우드 홀은 계속 서울여성병원에서 근무하도록, 닥터 홀은 평양 선교 기지 개척 담당자로 임명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아직도 내지에서 외국인이 거주할 수 없다는 금령이 발효 중이었고 기독교 포교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이 존재하고 있을 때였으므로 이 일을 수행하는 데는 의사가 가장 적격자였다. 홀 내외는 이 임무가 지금은 힘들어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앞에서 인도하실 것이기에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893년, 잠시 서울에 들렀던 그는 평양에 가옥을 구입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노블 목사와 동행했다. 닥터 홀이 임명받은 구역은 서울에서 평양까지의 300킬로미터에 걸친 지역이었다. 이때의 경험을 노블 목사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에서의 여행은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선교사의 진정한 모습을 시험하는 이상한 고통과 시련이 많다. 이런 시련을 대하는 닥터 홀의 모습은 감명 깊었다. 그는 마치 편한 기차 여행이라도 하는 것같이 어려움을 즐겁게 대처해 나갔다. 특히 평양 시료소에서 닥터 홀의 생활은 그 자체가 설교였다. 그의 곁에 있으면 구세주를 더 잘 알게 된다. 그는 조선인처럼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그를 보러온 사람들을 만났다. 어떤 사람들은 호기심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치료를 받으러왔다. 그러나 어떤 목적으로 왔건 떠날 때는 참으로 훌륭하고 선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간직하고 갔다. 한번은 평양에서 외국인에게 증오심을 가진 어느 관리의 영향으로 군중들이 들고일어난 적이 있었다. 조선인들의 적개심이 어떻게 터져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 직면했을 때, 나는 닥터 홀에게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았다. 그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희생시켜 이 도시의 문을 여실 생각이라면 나는 그 희생자가 되는 것을 피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미세스 홀도 남편이 없는 서울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녀는 한때 이화여대 부속병원의 전신인 릴리언 해리스 기념 병원의 원장을 지냈으며 몇 개의 병원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학교에서도 강의를 계속했다. 김점동은 특별히 뽑힌 학생으로 시료소에서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하고 있다가 홀 부인의 언청이 수술을 본 다음부터 반드시 의사가 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김점동의 세례명은 에스더였다. 후에 내지로 들어가 닥터 홀과 합류하여 일하게 될 경우 그녀는 에스더를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연례 회의에서 닥터 홀과 그의 아내 셔우드 홀에게 평양 개척의 임무가 떨어졌다. 홀 내외는 감사해 했다. 선교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닥터 홀이 서울로 와서 모금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이고 용기를 준 사람들은 선교사의 자녀들이었다. 닥터 홀은 그때 일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나는 이 어린이들의 기도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직접 청원을 드렸고 곧 응답이 왔다. 기도회가 끝나자 버티가 반짝이는 은화 1달러를 가지고 내 방에 왔다. 그 다음에는 그의 누이동생인 윌라가 10센트를, 뒤이어 오거스터 스크랜턴이 50센트를 가지고 왔다. 이때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 꼬마들이 가져온 돈은 총액이 불과 1달러 60센트에 지나지 않았지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하나님은 이 아이들의 선물을 늘려 8개월 후에는 1,479달러 99센트가 모금되게 해주셨다. 오늘날 우리가 평양의 좋은 장소에 병원과 시료소를 갖게 된 것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그해 가을, 닥터 홀은 또 하나의 기쁨을 갖게 되었다. 항상 어린이들을 사랑했던 그는, 이제 자신이 아버지가 되려던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