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누구나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조선으로 돌아왔던 그 해의 겨울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만 네 살이 되었고 에디스는 세 살이 되려는 참이었다. 어머니에게 있어서 에디스는 아름답고 소중한 보물이었다. 어느 정도로 어머니의 위안이었던가는 어머니의 일기가 증명한다.
에디스는 병자들, 특히 병난 아이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는지 모른다. 낮잠을 잔 뒤에 에디스는 시료소를 자주 찾아왔다. 밤에는 “하나님, 모든 조선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세요. 머리에 뭐가 났고, 눈이 아픈, 병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축복을 주세요”라고 간구했다. 이빨을 뽑는다든지 종기가 나서 절개를 해야 할 경우에도 셔우드는 잽싸게 도망가 버리지만, 에디스는 다 끝날 때까지 가만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다. 어느 날 오후 에디스가 병원에 찾아왔다. 그때 나는 한창 수술 중이어서 아이가 왔는지도 몰랐다. 수술 도중에 피가 튀어서 내 얼굴에 묻었다. 그러자 에디스는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엄마의 얼굴을 닦아주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 아이가 자라서 후에 의사가 될 것으로 믿는다.
다행히도 어머니는 오랫동안 갈망해온 평양으로 임명되었다. 1898년 5월 1일, 우리는 평양에 도착했다. 이 날은 전에 갓난아이였던 내가 평양에 도착했던 그날로부터 꼭 4년이 되는 날이었다. 우리는 집이 준비될 때까지 노블 씨 가족과 함께 기거하기로 되어 있었다. 에디스는 마당에서 흰 민들레꽃을 한 줌 따들고 집안을 뛰어다녔다. 우리들은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들의 행복은 잠깐이었다. 세 사람이 모두 이질에 걸린 것이다. 에디스가 가장 심했다. 병이 난 3주일 동안 에디스는 구토와 통증이 너무나 심해 아편까지 썼지만 고통은 가라앉지 않았다. 에디스가 우리를 떠난 후 쓴 어머니의 일기는 지금도 나를 울린다.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이 얼굴…. 나는 흰 민들레꽃을 에디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에디스는 좋아서 오랫동안 쥐고 있었다. 나는 에디스를 팔에 앉고 천천히 흔들어 주었다. 아이는 훨씬 조용히 숨을 쉰다. 아이의 얼굴은 평화스러워졌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잠시 후 크게 뜬 눈으로 엄마를 보면서 이 작은 영혼은 이렇게 떠나갔다. 에디스는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또 하나의 엄청난 슬픔이 우리에게 닥쳤다. 우리의 첫 슬픔, 닥터 홀이 우리 곁을 떠날 때 하나님이 주신 보석같이 귀하고 우리의 위안이었던 에디스가 다시 우리 품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디스를 데려갔다고 말하자 셔우드는 첫 마디에 “아빠가 에디스를 너무 원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데려가셨을 거예요”라고 했다. 에디스에게 마지막 단장으로 고운 흰 옷을 입힌 뒤 나는 셔우드를 데리고 갔다. 셔우드는 이미 영혼이 떠난 육신뿐이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셔우드는 클로버 꽃을 꺾어 에디스의 손에 놓아주고는 수줍어하면서 에디스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셔우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후에 어떤 차가운 것을 대하면 “오, 이건 꼭 에디스의 이마같이 차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랑하는 딸이 아빠의 산소에 묻히기를 원했다. 성실한 김창식은 함께 살아서 보지 못했던 딸을 아빠 옆에 묻기 위해 관을 서울로 운반해갔다. 에디스가 가는 여로는 아빠가 생전에 자주 왕래하던 길이다.
서울의 아펜젤러 목사가 에디스의 장례식을 치른 뒤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사랑하는 딸 에디스가 지금 자기 아빠의 품에 안겨 잠들고 있습니다. 당신 가족의 절반은 이미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수습하고
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어머니는 병원 일로 바쁘게 지내느라 슬픔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우리 가
족을 위해 단장된 평양의 집은 여성치료소와 한 지붕 밑에 있었다. 여성치료소는 1898년 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전에 어머니는 평양 감사로부터 자기 아내가 병이 났으니 왕진을 와달라는 청을 받았다. 몇 번의 치료로 고통에서 벗어나자 조 감사는 기뻐하면서 어머니에게 달걀 100개와 닭 3마리를 보내왔다. 얼마 후 치료소를 열게 된 어머니는 감사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광혜여원이라 지어주면서 자기 아내가 이 치료소의 착한 사람들에 의해 병이 나은 것처럼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에서 이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다.
평양에서 어머니는 일상의 의료 사업 외에도 마음에 깊이 품고 있었던 여러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어머니는 에디스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어린이 병동을 세우고 ‘에디스 마거리트 어린이 병동’이라 이름지었다. 에디스 마거리트 기념 병동에 등장한 또 하나의 명물은 시멘트로 만든 커다란 물탱크 저수장이었다. 이것은 평양에서 처음 보는 깨끗한 물의 공급원이었다. 오염된 물은 이질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질은 에디스의 목숨을 앗아갔다. 어머니는 특히 식수에 신경을 썼다. 적극적으로 대동강 외의 좋은 수원지를 개발하려 했다.
그 당시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그간 묻어두었던 내면의 깊은 슬픔과 싸우셨다. 여러 해가 지나서야 나는 어머니가 그 때 에디스와 이야기를 주고받듯 써온 일기를 볼 수 있었다.
우리의 사랑하는 에디스가 떠난 지 2년이란 시간이 흘렀구나. 에디스를 잃은 슬픔이 날이 갈수록 견디기 힘들어진단다. … 엄마가 이렇게 감상적인 것은 아마도 마음이 약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더 훌륭한 영적인 체험을 갈망하고 있다. 나의 이삭을 제단에 바치면서 하나님께 최대의 봉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나를 맡겼었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빼앗아 가신 것 같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이 시련의 뜻을 알고자 노력했다. 한 번도 이에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처음에는 식별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교훈이 점점 희미해져 지금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요즘은 때때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나기도 하고 전보다 더 내 인생의 아픔이 깊게 느껴진다. 가장 두려운 시련이다. 엄마는 지금껏 상처를 치유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야 하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못된 엄마의 마음을 치유시켜주신다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어머니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서 더 많은 일에 열중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성취한 여러 일들로 보아 하나님께서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이끌어주셨던 것이 확실하다. 어머니는 휴가를 보내고 돌아오자 곧 맹인들을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오씨의 딸 봉래를 데리고 점자를 이용해 교육을 시작했는데 후에 봉래는 특수 교사가 되어 시각장애자들을 가르쳤다. 이 학교는 계속 커져서 청각장애자까지도 수용하게 되었다.
여섯 살이 된 나에 대한 교육 문제가 숙제로 제기되자 어머니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여러 선교사들이 합세해 미국에서 교사를 구했고 이렇게 해서 ‘평양외국인학교’가 설립되었다. 1900년 6월에 문을 연 이 학교의 첫 입학생은 4명이었다. 그 해에는 에스더 박이 미국에서 의학석사를 받아 귀국한 해이기도 했다. 조선에 돌아온 그녀는 어머니의 의료 사업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조선에서 서양 의학을 공부한 첫 번째 여성이었다. 나는 에스더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감미롭고도 선율있는 목소리로 내게 소설이나 시를 낭송해주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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