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홀 부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닥터 홀이 병든 몸으로 도착한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11월 19일 월요일 아침, 왕진을 가려고 약을 챙기고 있는데 그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급히 아들을 안고 뛰어나갔다. 그는 병이 너무나 중해 혼자 서지를 못했다. 그는 겨우 입을 열고 말했다. “건강할 때 돌아와 아내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병이 났을 때 집에 돌아와 눕는다는 게 얼마나 편한가를 알게 되었소.” 그 다음날 밤 그는 갓난아기처럼 용변을 가리지도 못할 정도였다. 수요일 아침에는 연필과 종이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노블 씨에게 이번 평양 일로 쓴 비용을 항목별로 알려주었다. 그 외의 다른 회계 기록은 그의 기록책에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지경에서도 공무에는 철저했다. 공무가 끝나자 그는 “이제 죽든 살든 내가 할 일은 다 끝냈다. 하나님의 뜻이 날 원한다면 더 오래 일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온몸이 마비되어가면서 목의 근육까지도 기능을 잃어갔다. 다섯 명의 의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썼으나 그는 우리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려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그의 곁으로 가까이 갈 때마다 그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들의 사랑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말하려고 애썼다.
그는 내 뱃속의 또 하나의 생명에 대해서도 물었다. 내가 ‘아주 튼튼한 것 같아요. 셔우드 때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움직여요’라고 대답하면 미소를 짓곤 했다. 목요일 아침, 그는 무엇을 쓰려고 연필과 종이를 달라고 했으나 너무나 힘이 없어 글을 쓰기가 불가능했다. 그에게 있어 가장 큰 좌절감은 그의 가슴에 벅차도록 담겨 있는 말을 하지 못하는 점인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슬픈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을-사-랑-하-오’라고 겨우 띄엄띄엄 말하는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그는 꼬마 셔우드를 데려와 달라고 했다. 그는 사랑하는 눈으로 셔우드를 바라보았다. 미국에서나 조선에서나 ‘아이들의 친구’라고 불려졌던 그였는데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과는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영원한 작별을 고하려 하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하고자 애썼던 것은 “내가 평양에 갔었던 것을 원망하지는 마시오. 나는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소”라는 내용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닥터 홀, 그의 믿음은 이처럼 어린아이의 믿음 같이 항상 순수했다. 그는 갓난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서 편안히 잠들 듯 죽음 앞에서도 아무 두려움이 없었다. 1894년 11월 24일, 석양이 물들 무렵 그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었다. 영원한 안식일에 다시 깨어날 때까지 편안히 잠자기 위해. 나는 그의 두 눈을 감겼다. 그러나 그의 눈이 다시는 나를 더 이상 바라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의 눈을 다시 뜨게 하고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은 아직도 밝고, 너무나 맑아서 마치 살아서 나를 쳐다보는 듯했다. 나는 내 방에 가서 셔우드를 안고 와서는 하나님께서 그와 나에게 약속해주신 바를 이루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닥터 홀이 이 세상을 떠난 그 다음 날짜로 기록된 노블 씨의 회고록 끝 부분을 보자.
일요일. 우리는 사랑하는 형제를 커다란 조선식 관에 넣고는 아름다운 한강의 둑으로 가서 매장했다. 그곳은 잠들기에 평화로운 장소다. 그가 생명을 바쳐 일한 조선 땅, 먼저 간 사람들 사이에 묻힌 것이다.
에디스 마거리트
1894년 11월 27일, 서울의 배재학당 강당에서 닥터 홀의 추도식이 있었다. 이 행사를 지낸 뒤 홀 부인은 한 살 된 아들을 데리고 뉴욕 주 리버티의 친정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때 홀 부인은 임신 7개월째였다. 에스더 박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간청하자 홀 부인은 의학 공부를 미국에서 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라 생각해 그 청을 응낙했다.
1895년 1월 18일, 셔우드의 누이동생 에디스 마거리트가 태어났다. 아기의 이름은 닥터 홀이 생존해 있었을 때 이미 정해두었던 것이다. 홀 부인은 계속 일기를 썼다.
꼬마 에디스는 내가 태어났던 이 집에서 파란 눈을 떴다. 아빠가 가장 좋아했던 이사야서 43장을 보면 “두려워 말라 나는 너와 함께 있느니라 나는 동쪽에서 너에게 씨를 갖다줄 것이며 서쪽에서 이를 거두어줄 것이니라”고 적혀 있다. 셔우드가 저 멀리 극동에서 태어난 지 단 15개월도 못 되어 누이동생은 16,000킬로미터나 떨어진 서쪽, 뉴욕의 리버티에서 태어난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로 느껴진다.
홀 부인은 고향의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게 되었고, 에스더는 볼티모 여자의과대학(현재의 존스 홉킨즈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녀는 서양 의학을 공부한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다. 홀 부인은 ‘평양 기금’의 나머지 돈은 닥터 홀을 기념하는 병원을 세우는 데 쓰여지기를 원했으며, 1897년 2월, 홀 기념 병원은 평양의 모든 사람들을 위해 개원되었다. 홀 부인은 이 병원을 세우는 데 보탤 모금을 하면서 『윌리엄 제인즈 홀, M. D.의 생애』를 출간했다. 홀 부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또 하나의 숙제는 조선의 맹인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다짐했던 일이었으므로 뉴욕 맹인 교육학원의 원장인 윌리엄 웨이트가 개발한 ‘뉴욕 포인트’의 점자 구조를 배웠다.
홀 부인은 조선의 부름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어 조선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남편이 시작한 일을 성사시키기로 결심했다. 1897년 10월, 홀 부인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감리교의 여성해외선교회는 보구여관에서 일하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1890년 홀 부인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착한 날도 대비 조씨의 상중이었는데 이번에는 왕비 민씨의 장례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홀 부인은 이 장례식을 보면서 자신을 다시 조선 땅에 오게 한 남편의 죽음이 더욱 뚜렷이 회상되었다. 그 해 감사절, 그녀는 차분한 심정으로 일기를 썼다. “우리는 오늘 가마를 타고 그이의 산소로 갔다. 11월 24일, 그가 묻힌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다.”
'━━ 영성을 위한 ━━ > 신앙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12 |
---|---|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11 |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09 |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07 |
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0) | 2018.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