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선교사 이야기 - 닥터 홀의 조선회상
셔우드 홀 지음
시베리아-유럽 횡단 여행
어머니는 1910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열린 전 세계 선교사 회의에 조선 지역의 공식 대표로 임명되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여행은 교육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내 나이 열여섯, 새로운 세계로 모험을 떠날 준비를 갖춘 때였다. 우리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경유하는 육로 여행을 계획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참으로 과감한 행로였다. 우리가 탄 만주 철도는 노일 전쟁 직전에 러시아가 완공한 것으로, 기차가 산맥을 통과할 때의 흥분과 스릴은 대단했다.
우리는 날짜에 맞춰 에딘버러에 도착했다. 큰 회의장은 세계 각국에서 온 대표들로 꽉 찼다. 회의는 선교 활동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존 모트 박사가 주재했다. 그는 1897년 어머니에게 나와 동생을 데리고 조선으로 돌아가 일하라고 조언해주었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이 개인적인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것은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기쁨이었다. 그는 일부러 우리가 머물고 있는 숙소를 찾아와주었다. 선교 회의는 정말로 감명 깊었고 고무적이었다. 회의가 끝나자 우리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을 거쳐 미국으로 갔다.
여행의 종착지는 매사추세츠주의 마운트 허몬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생전에 원했던 대로 이곳의 마운트 허몬 학교에서 고등학교 교육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드와이트 무디가 창립한 이 학교는 ‘학생 자원 운동’을 탄생시킨 곳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마운트 허몬의 가르침에 감명을 받아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었다. 아버지는 자주 어머니에게 “아들을 낳으면 이 학교에 보내고 싶다”라고 말했었다고 한다.
내 앞에는 학업, 그리고 적응이라는 두 과제가 놓여 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났고 성장기를 보낸 조선과 미국 생활과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다. 어머니가 안식년 휴가를 끝내고 조선으로 귀임한 1911년, 나는 마운트 허몬에 홀로 남았다. 아마도 나는 다른 선교사의 자녀들보다 더 철저히 조선식으로 자란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온종일 병원에서 일했으므로 형제도 없는 나의 놀이 상대는 거의 조선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서 조선 놀이를 배웠고 거의 그들처럼 행동했다. 사고 방식도 조선 사람과 다름없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곳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다. 간섭이 별로 없는 조선의 생활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조선 사람들은 대부분 시계 없이 살고 있다. 조선에서는 서양 사람들의 긴박감과 시간 개념을 배울 수 없었다. 조선인들의 생활 철학은 서두르지 않는 태평함에 있다. 이상하게도 그것이 내 성격에도 맞는 것 같았다. 조선 사람들은 “또 내일이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마치 ‘내일은 오지 않는 것’같이 일한다. 항상 눈을 시계에서 떼지 않아야 하는 이런 생활 방식은 내게 여간 큰 어려움이 아니었다.
이 학교에는 ‘노동 시간’이라 부르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하루 2시간씩 일하고 번 돈을 수업료에 보태게 했다. 그들은 학교 농장에서 내게 여러 일을 시켰다. 또한 학구적인 면에서 이 학교는 내게 매우 고무적이었다. 나는 필수 과목의 하나로 해리슨 박사의 성경반을 수강했다. 강의는 ‘학생 자원 운동’이 탄생되었던 바로 그 교실에서 있었다. 인도에 선교사로 가 있는 존 포먼 목사의 아들도 한 반이었다. 1887년 아버지를 이 운동에 참가하게 한 사람이 바로 포먼 목사였다. 나도 아버지를 조선으로 가게 했던 ‘학생 자원 운동’에 참여했다.
마운트 허몬에서의 견습은 졸업과 함께 끝났고, 이제 나는 대학에 갈 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나는 다른 도시의 종합대학에 갈 계획이었는데 윌슨 목사님의 의견을 따라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 가게 되었다. 이 대학을 선택한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었던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 메리안을 여기서 만났던 것이다. 한 방을 쓰게 된 프레드 브래턴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또한 행운이었다. 문장력이 뛰어난 그는 훗날 『특출한 친구들』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썼는데 그 책에 나도 친구로 등장하고 있다.
목적이 같을 때 낯선 사람들도 쉽게 친구가 된다. 우리는 마치 상대방의 성격을 탐색하려는 듯 차분히 서로를 관찰했고, 나는 곧 그가 이상적인 동료이며 내가 만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흥미 있는 사람 중의 하나임을 알았다. 함께 지낸 숱한 날 밤마다 홀은 침대에 걸터앉아 놀랍고도 신기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나는 열심히 경청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모른다. 홀의 뛰어남은 학교 생활 중에 곧 드러났다. 그는 교회, 선교 단체 등 여러 모임에 나가서 조선에 대한 역사, 부모의 사업, 조선과 다른 곳에서 얻은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의 강연은 인기가 있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호랑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 전해온 민담이다. 그는 ‘학생 자원대’의 회장이기도 했다. 양심적이고 신중한 학생이었으며, 비교적 말이 적었으나 그의 의견은 언제나 존중되었다. 셔우드 홀과 한 방을 쓸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한다.
내일을 찾아서
나는 루츠타운 교회에서 강연을 하는 중에 아버지가 아덴에 있는 작은 교회의 신도였으며 조선으로 파송된 선교사였다는 말을 했다. 집회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면서 인사를 했다. 그날 첫 만남의 자리에서 메리안 버텀리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덴의 감리교회 주일학교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이 당신 아버님이신가요?” 나는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미국 시골의 작은 교회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캐나다 시골 교회에 걸려 있는 아버지의 사진에 대해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녀와 몇 차례 만나면서 이미 내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캐나다에서 온 아름다운 목소리와 매력적인 성격의 메리안! 나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 후 메리안은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우리는 곧 약혼을 했고, 마치 구름 위에 둥실둥실 떠 있는 듯 행복했다. 그러나 우리는 곧 행복의 구름 위에서 지상으로 내려와야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우리 눈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나는 미군 의료 보충대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모든 적령기의 남자들은 징집 대상이었다.
훈련, 훈련, 또 훈련….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 때는 너무나 지쳐 옷을 벗을 기력조차 없었다. 1918년이 되자 ‘스페인 인플루엔자’라는 유행성 독감이 발생해 아침마다 한두 사람씩 들것에 실려 나갔다. 나도 병에 걸려 메리안에게 편지로 이 사실을 알렸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공동 생활을 하는 훈련소에서는 이 병을 치료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직접 내 상관을 만나 나를 즉시 일반 주택으로 옮겨 적절한 간호를 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는데도 그녀는 성공했다. 메리안의 용기 있는 조처 덕분에 나는 쉽게 회복되었다. 그리고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라는 낭보가 날아왔으며 동시에 병영 밖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메리안은 마운트 유니언 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고 필라델피아 여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나는 제대와 동시에 토론토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당뇨병 치료제인 인슐린을 연구하던 실험실에서 헌신적이고 열성적인 그들의 연구 광경을 본 것은 숨막힐 정도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메리안과 나는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조선 의료 선교에 대한 마음도 확인했다. 우리는 7년으로 정한 약혼 기간을 내던져버리고 1922년 6월 21일 결혼식을 했다. 나는 캐나다와 미국의 의사 면허를 취득했고 메리안은 미국의 의사 면허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드디어 의료 선교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것이다.
선교회에 자금이 없어서 우리를 조선에 보내지 못하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곧 부유한 친구들에게 우리를 조선에 보낼 수 있는 길을 찾아봐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 부인들은 어머니의 의료 사업에 상당히 많은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조선 해주의 노튼 기념 병원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얼마나 놀랍고 기쁜 소식이었는지 몰랐다. 근래에 와서 좌절감에 빠져 있었던 우리들은 이 사건의 전환이 마치 기적처럼 여겨졌다. 사람들은 우리가 조선으로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들은 믿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젊었다. 그 젊음의 열기와 정열로 해외에서 있을 선교 생활의 새로운 경험과 모험을 상상하며 가슴이 설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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