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관 자료 ━━/초돌사에서

겨자씨만한 믿음의 파워풀한 능력

Joyfule 2018. 9. 30. 21:57


 겨자씨만한 믿음의 파워풀한 능력


성경을 읽다 보면 주님께서는 늘 우리에게 강조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양보다 질을 강조하십니다. 반대로 사람은 늘 질보다 양을 요구하고 자신도 양을 최우선의 가치로 판단하려 노력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많은 헌금을 내는 사람보다 두 렙돈(지금 가치로 이천원정도) 드린 과부의 헌금이 더 귀하고 크다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과부는 가난한 중에 최고의 정성을 다하여 주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아니 두 렙돈은 사람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돈이지만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 적은 돈은 화폐의 가치로 본 게 아니라 가난한 과부의 마음을 담아 최고의 정성으로 드렸던 걸 본 것입니다. 타락한 교회에서는 봉사든 헌금이든 질보다 양을 우선시하고, 또 양을 우선시하도록 교인들에게 이것을 믿음의 최고가치로 유도합니다. 주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는 생각입니다. 주님은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바라보시며 전혀 쓸모 없다고 저주를 내리셨습니다. 요즘교회는 열매는 관심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더 선호하고 목회 성공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잎이 부실한 나무라도 먹을만한 단 한 개의 열매라도 열리는 무화과나무를 더 축복하고 사랑하십니다.

 

그럼 믿음의 최우선 가치는 무엇일까요? 믿음 역시 이와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믿음도 분량이 중요한 게 아니고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 질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거대한 바위라도 생명력이 있는 씨앗이 바위틈에 떨어지면 주님께서 공급하신 흙먼지와 수분을 양분 삼아서  씨앗은 싹이 움터 뿌리를 내리며 거대하고 단단한 바위를 뚫고 서서히 쪼개 들어갑니다. 그러나 죽은 씨앗은 아무리 많아도, 주님께서 양질의 풍성한 흙먼지와 수분을 공급해 주셔도 씨앗은 바위를 쪼갤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양만 많았지 죽은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다를 게 없습니다. 생명력이 있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면 능히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의 분량이 아니고 겨자씨만한 아주 작은 믿음이라도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저는 죽은 씨앗을 많이 소유하고 있으면서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만 그런 자부심을 주는 자기만족에 취하도록 하여 정신승리를 하게 할지는 몰라도, 주님을 취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엄청난 생명력이 있다면 바위틈에 떨어진 씨앗이 거대한 나무로 성장해가듯, 우리의 믿음도 능력 있는 거대한 모습으로 변모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은 기뻐하고 인정합니다.

 

그럼 살아있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위에서 언급한 가난한 과부의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마음 밭입니다. 두 렙돈이 그의 전 생활비였다면, 그는 삶이 팍팍해서 늘 마음과 육이 지쳤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 처럼 특별하게 눈에 보일 정도로 하나님 섬기는 일에 매진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의 두 렙돈이 누구의 것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겉으로 보이는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으시고,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거룩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를 참으로 귀히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 기도하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시고 또 한마디 하십니다. 겉으로 보기에 흠도 없고 주님 섬기기에 열심을 다하여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서 그런지 자기 흠모의 나르시즘에 빠져, 나는 열심히 주님을 섬긴다고 주님 앞에서 자기 자랑만 합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세리는 가슴을 치며 감히 앞에 나서지도 못하고, 저 뒤 구석에 쭈구리고 엎드려 무슨 죽을죄를 그렇게 지었는지 가슴을 치며 심히 애통한 모습으로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가는 냉혹하십니다. 자기 잘난 맛에 자기 열심으로 기도하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냉정하게 버리시고, 애통하며 회개하는 세리의 기도를 따뜻하게 인정하셨습니다.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리새인은 눈에 띄는 자기 열심으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의 모습이었지만, 세리는 죄가 많기에 양심 속에 지켜보시는 하나님께 늘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정도로 괴로워했지만, 주님 보시기에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작은 겨자씨가 숨어 있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리의 겨자씨만한 믿음을 칭찬할 정도면 죄 많은 세리가 향후 바위를 쪼개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으로 성장했을 거란 것은 짐작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게 있습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세리의 믿음을 칭찬하고 바리새인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설교하면서 교인들에게 은근히 바리새인 같은 겉으로 보기에 열심을 다하여 충성 봉사하고 목사님의 말에 순종하는 잎만 무성한 믿음을 요구합니다. 두 렙돈을 낸 과부을 칭찬하면서, 헌금 적게 하는 것보다 많이 해야 30, 60, 100배로 물질 복 받는다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그분은 그렇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주님을 이런 보이는 행위로 속이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물론 아주 작은 믿음이든 큰 믿음이든 그 믿음이 진실로 주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이라면 당연히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자신을 늘 숨기려 하고, 나서지 않으려 하고, 늘 겸손하고,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평상시의 삶에서도 알게 모르게 예수님의 진한 향기를 늘 품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십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점검 해 본 적 있습니까? 살아있는 겨자씨 한 알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아무 쓸모도 없이 창고만 가득 채운 죽은 씨앗입니까?

 

나는 구원받을 거라 확신하며 자기 연민에 도취되어 자기 의로 열심만 다하면서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믿는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가슴을 치며 구원 못 받고 버림을 당할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세리의 작은 겨자씨입니까... 기억하십시오. 보이는 사람의 평가는 아무 의미도 없는 휴짓조각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 의로 열심을 다하여 주님을 섬겼어도 주님 앞에 섰을 때 내가 너를 모른다 하면 이미 끝난 영혼입니다. 그러나 늘 애통해 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자신을 감추고 주님을 드러내는 아주 작은 겨자씨 하나라도 생명이 있는 씨앗이라면 큰 믿음으로 성장하여 바위도 쪼개고, 산도 옮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애썼다! 너의 믿음이 참으로 귀하다 하시며 사랑이 넘치는 주님의 가슴으로 안아주실 날이 반드시 올 우리의 미래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눅17: 5-6)

 

주님의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었던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들은 죽은 믿음만 가득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은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생명력이 있는 살아 숨 쉬는 믿음을 소유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나의 믿음이 살아있는 겨자씨인지,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인지, 혹은 마음의 창고에 가득 채운 죽은 씨앗인지를 ....

 

랑별파파(초대교회로 돌아가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