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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운동을 전개하자.

Joyfule 2020. 6. 22. 00:18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운동을 전개하자.  

                              광복 60주년과 건국대통령
                              崔  震 (호남대교수/前駐中 公使)

2005년은 1945년 해방된 때로부터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해방은 오늘의 대한민국의 건국을 가능케 한 전환점이었고, 이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비롯해서 많은 독립운동 단체와 인사들이 자기 전 인생을 희생하는 독립투쟁을 해왔다.
그래서 대한민국 헌법은 그 전문(前文)속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실제에 있어서도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이 국내외에 있었지만 27년간이라는 가장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한 조직은 대한민국임시정부밖에 없다. 또한 그 정통성에 있어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당시 2천만 우리 민족중 거의 모든 성인인구라 할 202만명이 참가한 3.1독립운동이후 온 민족 구성원의 독립의지를 실현시키기 위해 국내 한성과 러시아령, 중국, 미국에 있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함께 모여서 조직한 우리 민족 유일의 통일정부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평가와 관련하여 북한의 역사서들과 국내 좌익역사학자들은 임시정부를 매도, 비방, 성토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중공군 주보중(周保中)부대장산하에서 활동한 김일성의 빨치산활동만이 우리 민족을 일제에서 해방시킨 유일한 항일운동인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러한 잘못된 역사교육을 2세들에게 교육하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인하는 것은 1920년대나 30년대, 그리고 해방직후 45년 이후에도 있던 일이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헌법구조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고, 그 기본정신은 대한민국헌법에 그대로 승계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그 항일투쟁 기간중에도 여러번의 어려움에 직면했다. 초창기에는 이동휘등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공산정부’로 바꿔치기 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했으며, 20년대 중반에는 아예 임시정부의 해체를 시도하다가 실패했으며, 30년대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정당들의 ‘한국(韓國)광복운동단체 연합회’에 맞서, 임시정부를 부인하는 ‘조선(朝鮮)민족전선 연맹’이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미국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을 방해하기 까지 했다. 韓國과 朝鮮은 그때 이미 분단되었다.

이러한 여러 번의 위기에서 27년간 한 결 같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지탱한 사람은 이승만, 안창호, 이동녕, 김구 이 네 사람이다. 그리고 이 네 분중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정신을 유지한 사람은 이승만박사 한 분뿐이다. 안창호와 이동녕 두 분은 아깝게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운명했으며, 김구주석은 공산주의자들이 1920년대이래 줄기차게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대한민국의 건국’을 방해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의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이라는 이상(理想)을 추구하느라고 1948년의 대한민국의 건국에는 참여하지 않게 된다.

그러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대통령이고,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인 이승만박사에 관해 우리들은 학교에서 정당하게 가르치고 있는가? 그의 공(功)은 잊은채 그의 과오(過誤)만을 과장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승만은 청년시절 배재학당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서재필이 세운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기울어져 가는 대한제국을 바로 세우려고 잘못된 정부정책을 공격하다보니, 정부의 미움을 사서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투옥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독립정신’이라는 유명한 책을 저술하게 된다.  그후 민영환의 주선으로 7년만에 석방되어 미국에 건너갔다.

미국에서 고학으로 조지 워싱턴대학, 하버드대학교 등에서 공부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도 이런 미국의 일류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것은 미국인들에게도 어려운 일이거늘 하물며 95년전에 이름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온 청년이 미국의 일류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독립협회시절의 투쟁경력과 미국에서의 독립운동경력, 그리고 국제수준의 지적능력이 어울어져서 3.1운동이후 논의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립에서 서울, 상해, 블라디보스톡에서 모두 공통으로 이승만박사를 임시정부의 최고지도자로 선정하게 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박사는 한국을 독립시키기 위해서는 일본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는 방법밖에 없는데, 당시의 한국인들의 상태는 강력한 일본군대와 싸워 이기는 것이 어려운 일이므로, 당시 세계 최대 강대국인 미국을 움직여 일본과 싸우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1919년 9월 미국 워싱톤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를 조직하고, 미국의 국회의원들과 신문사, 미국 국무부를 상대로 일본의 야만적 통치를 폭로하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결국 그의 예견대로 일본은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고서야 항복하고 말았다. 이승만대통령의 이러한 독립방책은 냉철한 현실인식에 바탕한 것이지만, 그러나 1920년대의 열정적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너무 소극적방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당장의 독립전쟁을 주장하는 사람들로부터 불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25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내어놓고도, 미국정부로 하여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시키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놀라운 국제정치적 통찰력으로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내다 본 이승만박사는 중경에 있던 임시정부와 긴밀히 연락하면서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과 일본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박사의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는 미국 국무성과 교섭하여, 미국내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일본국민이 아니다’는 유권해석을 받아 내어 미국내 일본인들이 집단수용소에 수용될 때, 이에서 제외되고, 우방 국민으로 대우받도록 하였다. 또 나아가서 이승만박사는 미국의 정보기관을 설득하여 미국내 한국인들이 주축이 된 한반도침투 게릴라부대를 창설케 했다. 이 작전은 ‘납코작전’이라고 명명되었는데, 낙하산을 타고 한반도에 침투시켜 첩보수집, 무선망설치, 파괴공작을 벌리고, 미국군대의 상륙에 대비한 거점을 확보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목포와 황해도 구월산을 침투대상으로 하여 4개월간 유격훈련, 폭파훈련등을 받았다.

이승만박사는 특히 1945년 2월과 7월 미국의 트루만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빨리 미국이 승인해야만, 해방후에 한국내에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간의 민족 내전을 예방할 수있다고 강조하였다. 이 사실은 그의 놀라운 역사 통찰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앞날을 내다보지 못한 미국정부의 실책으로 이 제안은 무시당했고, 결국 광복을 맞이 한 후 그의 예언대로 대구폭동, 제주 4.3폭동, 여수순천 軍반란사건등 좌익의 대한민국 건국방해 내란행위를 거친후, 6.25남침이라는 2차대전이후 최대의 전쟁을 겪게 된다.

1946년 2월 북한 노동당이 무상 토지몰수라는 공산화의 길을 걷자, 분단은 고정화되고, 북한지역에 공산정권을 세우겠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자유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그 첫 번째 대통령으로 독립운동의 영수인 이승만박사가 선출되고, 임시정부헌법의 골격이 그대로 대한민국헌법에 계승된다.

제2차대전이후 독립한 많은 나라들이 1940년대의 유행이었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택해서 그후 독재와 빈곤속에서 40여년간 시달렸는데 대한민국은 이승만박사등 건국세력의 탁월한 식견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택해서 오늘의 번영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세계 모든 나라들은 건국 대통령을 기념관, 화폐, 기념동상등으로 기념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많은 유산을 남겨준 건국 대통령을 아무런 방법으로도 기념하고 있지 않다. 이제 광복 60주년이 되었으니 이런 잘못에서 벗어 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