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
“과거가 미래를 지배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학대적인 상황에서 벗어났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과거에 했던 일들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저는 알면서도 그 단체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속임수가 있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그 곳에 어떤 숨겨진 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교제권을 떠나면, ‘구원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정해져 있는 네 운명을 영원히 잃게 될 것’ 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건 영적 위협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집단을 나온 이후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30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감옥에서 나온 사람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매일 한걸음씩 내딛으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저는 이제까지 제가 속했던 교파의 제자였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와 그 목사의 제자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 조직에서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왜곡해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곳에서의 삶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다. 내가 하고 있는 바를 잘 보고 따르라.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말씀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제 삶은 그 교회 중심적인 생활로 변해 갔고, 저와 예수님의 관계는 그다지 중요하지 못한 자리로 밀려나 버렸습니다.
저는 어느 날 아침, 집에 있는 가운데 주님의 임재를 강렬히 느꼈습니다. ‘제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게 하소서’ 라는 말씀이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구원의 기쁨을 누리도록 해주셨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나온 그 교회에서는 자신들 이외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종교적인 악마’ 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교회 밖에도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회복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은 용서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구원’ 이란 단어는 온전한 모습으로 빚어져 간다는 걸 의미하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재 대신 화관을 주신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저희를 아름답게 하실 것이며, 그 모든 것은 용서로부터 시작됩니다.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께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하십시오. 아마도 여러분은 하나님을 용서하길 원하고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분노한 적이 있고, 심지어는 격렬한 증오심까지 품었던 적도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께서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나도록 그냥 두셨단 말입니까?’
그때 성경에 나오는 요셉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요셉의 인생 가운데 계획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어떻게 이루어 가셨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그들이 비록 자신을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요셉이 걸어갔던 길은 감옥에 갇히는 것과 중상 모략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려 함이니’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해 가지신 궁극적인 목적, 즉 우리를 예수님의 형상대로 빚고자 하시는 목적을 이루시고자 어려운 시간을 허락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신뢰하는 법을 다시 배우다
대부분의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마음 가운데 파고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주려 하기보다 받으려는 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으로 함께 나누고 도움을 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해 사랑으로 역사하시도록 하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개종자를 얻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며 복음을 전하러 나갑니다.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서 하는 일은 일하고 복음 전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한 집단에서 가르치는 것은 ‘밖으로 나가서 저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라’ 는 겁니다. 사실 그 말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밖으로 나가서 십일조 바치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라’ 는 것입니다.
그 집단을 떠났을 때, 제 아내와 저는 극도의 두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곳에 다닐 때, 친구들뿐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까지도 끊었었기 때문에 우리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저는 신경 쇠약에 걸길 지경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을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밤낮을 시달렸습니다. 어떤 조직은 조직을 떠난 사람들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휘두른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있던 조직은 그러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너무나 외로웠기 때문에 두렵기까지 했던 겁니다. 그 집단에 있었을 때 우리가 무례히 대했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회개하고 겸손한 태도로 그들을 찾아가 ‘미안합니다’ 라는 사과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지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사람들은 제게 변했다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의 널 보면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예전에는 멍한 눈으로 성경 구절을 외치며 돌아 다니는 좀비 같았거든.’
그 집단을 떠난 이후, 하나님께서는 제 삶에 선하게 역사하셨습니다.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저와 잘 알고 지내던 자매들이 우리 집에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 함께 기도 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자 그 동안 제 마음속에 억눌려 있던 좌절감과 마음의 상처가 일순간 모두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제게 저를 학대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경험으로 여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지 않고 가슴속에 복수심을 품고 있는 것이 처음에는 더 좋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모든 것을 공의롭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복수심을 마음에 품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지는 못할 겁니다. 저희는 주님의 도우심으로 권위적인 교회를 나온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분노와 배반의 경험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러한 사역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현재 소위 ‘문제아’ 라는 십대들을 도울 수 있는 건, 저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상처로 얼룩진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웃는 법을 배웠습니다”
“학대적인 교회에 다니다가 그 곳을 떠난 후, 자신의 삶이 무너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예수님을 찾으라고 격려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불뱀에게 물려 괴로워하고 있을 때 믿음으로 놋뱀을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매달리십시오. 여러분의 머리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그 모든 적들을 이기도록 도울 수 있는 분은 예수님 한 분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시작하게 하시고 완성시키시는 분은 그 교회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자아의 가치를 과거의 교회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찾으십시오. 권위적인 교회를 떠나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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