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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회의(교리 논쟁)

Joyfule 2019. 6. 12. 12:36

 

     교회회의(교리 논쟁)

 

 

(2) 콘스탄티노플회의(AD381, Constantinople)


1) 회의가 소집된 원인
역사의 흐름은 항상 양 극단에서 오가게 된다. 앞서 니케아회의에서 아다나시우스의 주장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동질이라는 것을 확정하였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진실한 인간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별 언급을 못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까 그리스도의 인성을 약화시키거나 또는 무시하는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여기에 대표자는 라오디게아(Laodicea) 감독인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였다. 나폴리나리우스는 그 부친이 정통 신학자로 아다나시우스가 감독으로 있던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장로였다.
아폴리나리우스도 아다나시우스 못지않는 유명한 신학자요 신앙인이었다. 그는 예수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면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 아래 인간이면서 범죄할 수 없는 인간 예수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래서 아폴리나리우스는 살전5:23을 인용하여 인간의 구성은 영과 혼과 몸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 속에 죄가 들어가 있는 죄인이라고 하였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구성이 로고스와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 대해 카파도키아(Cappadocians) 교부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즉, 사람의 영을 갖지 못한 그리스도가 어떻게 죄가 담겨 있는 영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겠느냐? 또,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해 오심으로 그는 인간적 행위와 감정의 인격체를 이루셨는데 그가 우리와 다른 인간이라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게 할 수 있느냐고 반론하였다.
이와 같은 양대 진영의 엇갈린 주장이 오가는 것을 본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황제는 동서 로마제국의 통일과 국론통일과 선친이 건설한 콘스탄티노플을 과시하려고 회의를 소집한다. 실로 모든 회의는 황제들의 정치놀음에 교회아 놀아나는 정치판이 되고 만다.


2) 회의 결과
이 제2차 세계 기독교대회에서는 전에 있었던 니케아신조에 대한 재 확인과 함께 아폴리나리우스 주장은 인성을 부인한 것으로 정죄받는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석의 양성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이 결론은 다음에 두 격(신격, 인격)이 어떻게 조화되느냐 하는 문제로 또다시 논쟁이 생기게 된다.


(3) 에베소회의(AD431, Ephesus)


1) 회의가 소집된 원인
문제의 시발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에게서 시작이 된다. 그는 수리아의 게르마니에서 출생한 후 안디옥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생활과 열심있는 신앙으로 제2의 크리소스톰이라는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그가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되어 신인양성의 관계를 기계적으로 이해하고 양성의 교통을 부인하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마리아는 신인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고 신을 운반하는 것(Theo-phorus)인 로고스를 낳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수난당한 것은 인성뿐이고 신성은 고난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했다. 예수가 수난당한 것이 단지 인성뿐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수도사들과 함께 알렉산드리아 감독 '시릴'(AD376-444, Cyril)이 극렬히 반대하였다. 시릴의 주장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인 양성이 연합되었으며, 로고스가 육신이 된 것은 마리아가 사람이신 신을 낳은 것이라고 하였다.
시릴은 네스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이 된 것을 질투하는 감정과 함께 사적 감정이 얽혀 상호 저주하는 악폐로까지 치달려 갔다. 이에 데오도시우스 2세가 431년에 에베소에서 3차 세계대회를 소집하게 된다.


2) 회의 결과
시릴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네스토리우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회의를 개최하고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여 출교 결정을 내린다. 뒤늦게 도착한 네스토리우스는 그들 대로 대회를 따로 소집하고 시릴을 이단으로 결정한다.
양쪽이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리고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자 황제는 시릴의 결정을 인준한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는 수도원으로 은퇴하고 그를 따르는 네스토리안들은 황제의 핍박을 받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쪽으로 옮겨갔다.
이들 네스토리안들은 계속 동양 중국까지 옮겨와서 7세기 경에는 중국에서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크게 활약한다. 이 경교 교인이 나당연합군으로 신라에 와서 활약했던 흔적이 최근 경주 고분에서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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