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 나타난 영적 지도자 10인의 인격(전)
아브라함, 모 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 윗
1. 아브라함 - 영적 지도자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창세기 12:1-3은 그 유명한 아브라함을 부르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말씀을 좇아갔고, 믿음으로 즉각 순종했습니다. 그가 믿었던 약속의 말씀은 자기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것과 그를 만민 구속 역사의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태가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라를 통해서는 자식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처음에 몇번 불신의 늪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그에게 나타나셨고, 그에게 뭇별의 소망을 보여주시며, 모래알과 같이 수많은 후손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또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며, 반드시 그 약속은 성취되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결국 25년만에 이삭을 잉태하는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25년만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는 지난 25년간의 시간들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생각할 때 바랄 수 없는 중에 소망할 수 있었고, 때론 넘어지면서도 다시 소망을 놓치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사라의 태가 마를 뿐 아니라, 자신의 몸도 죽은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그런 상황속에서도 믿음이 조금도 약하여지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25년만에 하나님의 약속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지도자에게 있어 때로는 낙심의 때, 절망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적으로 너무나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뛰고 날아보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현실앞에서 깊은 낙담의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이런 상황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아니하고, 바랄 수 없는 중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절망의 때를 빨리 벗어나 단순히 약속의 말씀에 자신의 생각을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지도자로서 소유해야 할 인격입니다.
2. 모세 - 영적 지도자는 온유한 성품을 소유해야 합니다. (참조. 딤후 2:24,25)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권능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들은 홍해를 가르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인생을 확실히 보장해 줄 것을 믿었습니다. 그후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수르광야로 들어갔습니다. 백성들은 메마른 사막에서 물이 없이 3일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백성들은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다는 이유로 3일만에 마음이 돌아서 모세를 원망하고 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고, 목마른 백성들의 목을 축여 주셨습니다. 백성들이 다시 신광야에 이르자 먹을 양식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다며 이 모든 책임이 모세에게 있는 양 모세를 다시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또 다시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비록 광야길을 행했지만,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여 주셨고, 옷과 신발이 헤어짐이 없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광야를 지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다시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계시는지 아니 계시는지 의심하였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모세는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했지만, 백성들은 도리어 모세를 원망하며 모세를 향하여 돌로 칠 기세였습니다. 무리들은 지금까지 자기를 인도해 준 목자에 대한 감사가 없고, 도리어 자기 인생을 말아 먹는다고 대적하고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들 속에서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함께 혈기로 마주 싸웠습니까? 아닙니다. 모세는 목자로서 권위를 부리지도, 그들을 징계하지도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부족함을 기도로써 채워주었고, 다 받아주고 품어 주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젊은 시절 출애굽역사를 섬겼다면 이런 상황에 은혜도 모르는 양떼들을 생각할 때 화가 치밀어 올라 그 많은 혈기로 많은 백성들을 패 죽였을 것입니다. 그는 과거 자기의 동족이 고통받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해 충동으로 애굽인을 죽였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 완전 혈기로 똘똘 뭉쳐진 때였습니다. 그러나 40년 미디안 광야 훈련을 통해, 40년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통해 온유한 성품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의 특성과 생태를 깊이 파악하였습니다. 그는 연약한 양들에게 요구하지 않고 양들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기쁨으로 섬겨 주었습니다. 백성들은 힘든 출애굽의 여정속에서 목자에게 마음대로 불만과 불평을 터뜨리며 그들의 고난을 위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온유한 내면으로 양들의 모든 불평, 불만을 걸러주고 삭혀 주었습니다. 후에 하나님은 이러한 모세를 가리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고 인정하셨습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200만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쉼과 위로를 줄 수 있을 정도로 넓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는 많은 양떼들을 품을 수 있는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목자가 담을 수 있는 영혼은 목자의 온유함의 넓이에 달려있다고 여겨집니다. 온유함은 어떤 완악한 영혼도 변화시키는 무기입니다.
3. 여호수아 -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도전하는 사람
여호수아는 믿음과 용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로부터 가나안 정탐 명령을 받고,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떠났습니다. 그러나 정탐후 이들의 정탐보고는 각기 달랐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부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은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하며, 영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가 그러한 보고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상황과 형편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했고, 그 가나안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도전정신이 충만하였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축복은 도전하는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이 도전정신은 여리고성을 점령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습니다. 그 성은 버스가 두 대나 지나다닐 수 있는 인간의 힘으로는 무너뜨릴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도전정신으로 충만한 여호수아는 요단강으로 배수의 진을 치고 생명을 걸고 여리고 성을 점령하고자 눈에 불을 켰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3을 보십시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는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난공불락의 성을 믿음으로 밟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데 썼던 방법은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방법이었습니다. 보통 인간의 방법은 무기를 사용할 것이며, 성 밑에 구멍을 파는 공병을 배치시켰을 것이며, 기습으로 습격할 병력을 배치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복자 여호수아가 취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나팔을 불며 매일 성을 돌았습니다. 마지막 제 칠일에는 일곱 번 성을 돌았습니다. 다시 말해 여호수아는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함락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난공불락의 성도 정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힘을 힘입어 무서운 정복자로서의 투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난공불락과 같은 문제를 믿음으로 도전하는 용기있는 지도자, 정복자의 기질을 소유한 지도자, 그가 바로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4. 사무엘 - 영적 지도자는 말씀과 기도생활에 있어서 남달라야 합니다.
사무엘이 죽었을때 모든 백성들은 그를 사랑함으로 슬퍼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사무엘의 죽음은 모든 이들에게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의 선지자로서의 너무나 고결한 삶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삶의 증인들이 바로 하나님과 양떼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의 삶에서 나타나는 인격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말씀과 기도생활일 것입니다. 사무엘상 12:23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그는 백성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쉬는 것을 죄악으로 여겼으며, 항상 백성들에게 의로운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앞에 나아가 줄기차게 중보기도를 감당하였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책망하고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믿음을 심었습니다. 그는 하얀 백발을 날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고별의 메시지가운데서도 백성들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했으며, 정말 참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섬길 것을 호소하는 모습속에서 진정으로 백성들을 사랑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양떼들을 영적으로 사랑하는 이스라엘의 목자였습니다. 이처럼 영적 지도자는 말씀과 기도생활이 남달라야 합니다. 양떼들을 위한 중보기도로 날마다 하나님앞에 나아가는 성실함과 양떼들을 진리의 말씀위에 굳게 세우기 위해 말씀으로 자신을 채워나가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5. 다윗 -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로 말미암아 10년동안 도피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이 오직 사울의 시기심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 그는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사울을 피해 도망을 다니면서 몇편의 시편을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로는 도망자의 삶을 살면서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이를 통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게 됩니다. 그는 사실 두. 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기름부은 받은 사울을 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영접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용서하는데 인색함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몇적으로 사울 때문에 지울을10여년의 시간을 손해보마음고통받아야 했던 순간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한이 맺힙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사울을 죽이기에는 합당한 근거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까지도 품고 용서하는 내면을 통해 통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서의 내면성을 키워가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영적 지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과 아픔이 훈련제목이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인간문제가 자신의 내면을 찢어넓히는 계기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고통속에서 위로하시며, 피난처가 되시며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즐거움으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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