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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로 삼은 변호사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3. 25. 09:34





모델로 삼은 변호사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변호사를 처음 개업했을 때 혼란스러웠다.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가 아니라 돈이 벌리지 않았다. 주위에서 능력 있는 브로커를 쓰라는 권유가 있었다. 교통사고만 끌어오는 브로커를 고용한 변호사는 떼 돈을 벌고 있었다. 로펌의 총무변호사로 있는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로펌소속의 변호사를 보면 겉으로는 장관을 지내고 법원장을 지냈어도 다들 브로커를 써. 그리고 이 지역의 변호사중에서 브로커를 쓰지 않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나도 브로커를 고용했어.”

나에게 애정을 가지는 한 선배도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하는 방법을 따르고 다소의 술책을 섞어야 할 거야. 수단은 필요한 거야. 그건 거짓말이나 사기와는 다르지.”

솔깃하게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왔다. 그때 다른 음성이 또 들려왔다.

‘정말 네가 하고 싶은 게 뭐지? 돈을 벌고 싶은 건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법률사무소를 차린 거 아닌가?’

나는 굶어도 브로커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때 대다수의 흐름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보다 열세살 많은 그 선배 변호사의 삶을 우연히 전해 듣게 됐다.

그 선배 변호사는 동백림사건 때 시인 천상병을 무료변호했다. 동백림사건은 독일유학생들을 간첩으로 만든 모략사건이었다. 천상병은 독일유학생중 한명과 접촉 때문에 걸려든 것이다. 그 선배 변호사는 반대신문에서 이렇게 물었다.

“두 사람은 네 것 내 것이 없이 지내는 사이가 아닙니까?”

막걸리 값을 받은 게 간첩 자금과 무관하다는 걸 말하기 위한 것이다. 그 말에 천상병 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닌데요, 나는 가난해서 항상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지 한번도 줘보지는 못했죠”

죄없는 사람을 구하려는 변호사의 질문과 정직한 시인의 대답이었다. 그 선배 변호사는 대학생 박종철이 밀실에서 고문당하다가 죽은 사실을 세상에 폭로했다. 정권에 치명적인 사건이라 일개 변호사로서는 힘겨웠고 위험했을 게 틀림없었다. 그 선배 변호사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국가의 책임을 끝까지 추궁하려는 뜻이었다. 그는 문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문학과 지성’의 편집인이 되어 얼마간의 기부도 했다. 문인들과 교제를 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문인들을 위해 무료변론을 맡기도 했다.그는 세례요한 같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서 또 감옥에 있는 사람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치료사로 또는 불의에 대항하는 인권변호사로서 다양하게 활동할 수 있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기부와 봉사는 명예욕의 변형도 아니었다.

스물두살에 고시에 합격한 성실하고 재능 있는 수재가 출세와 영달의 길을 거부하고 혼자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늘 아래 새 것은 없다고 했다. 하다 보니까 그 선배 변호사의 모델을 따르게 됐다. 고문으로 죽은 한 재소자의 억울한 죽음을 시사잡지 신동아에 폭로했었다. 그리고 그가 의문사의 1호 피해자로 확정되기도 했다. 방해와 협박이 만만치 않은 걸 실감했다. 법의 보호에서 벗어난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사람들을 변호하기도 했다. 법의 뱃사공이 되어 억울한 사람을 다섯명만 자유의 땅으로 건네주면 그런대로 하나님께 할 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럭저럭 그 이상의 목표를 달성한 것 같다. 삼십년간 거의 매일 글을 써 왔다. 컬럼과 수필을 쓰고 소설을 써 왔다. 대한변협신문의 편집인도 해 봤다. 출세와 영달의 길을 마다하고 평생 야인으로 있으면서 이천 편의 시와 소설을 쓴 김시습같이 되고 싶었다. 수필 이천 편의 목표를 위해 지금도 그 길을 가고 있다. 변호사회에서 백로상이라는 상패를 보내왔다. 특별한 상이 아니라 변호사업을 삼십년 넘게 했다는 일종의 인증이었다. 인생의 종착역을 내다 보면서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고 있다. 그런대로 살아온 인생이 아닐까. 삶에는 먼저 앞서간 수많은 모델들이 있다. 그 중 어떤 것을 따를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