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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여성과 교육 - 3. 개신교와 여성교육 5.

Joyfule 2007. 2. 18. 00:54

 

이 동맹휴학이 있던 때의 교장은 선우리(Miss V.L. Snook)양이었는데 이렇게 기숙사 규칙을 완고하게 한 이유를 "그리스도의 정신을 체득시키는 동시에...한국인의 고유한 미풍가옥을 살려서 한국의 윤리를 깨뜨리지 않게 하려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던 데"51) 있었다고 들고 있다.

 

이를테면 숭의학교에 새로이 입학한 학생들은 원칙적으로 기숙사에 입사토록 하여 사감의 지도에 의한 엄격한 사칙에 복종하다록 했고 또 일단 입사한 학생은 전혀 자유행동이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숭의여학교는 제2의 감옥이다"라는 별칭이 유포되기까지 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서신왕복에 있어서도 기숙사에 입사한 학생이 부모님께 발신할 때와 부모님으로부터의 내신,학비금의 송신,또는 소포물이 있을 때에라도 그 어떤 경우이건 분간없이 일일이 검열을 거친 후에야 본인에게 전달되었다. 항상 학생 개인의 행동을 금하고 교회의 출석까지도 행렬을 지어 집단으로 하도록 했으며 실로 물샐틈 없이 생활에 간섭하였다.52)

 

물론 집 안에 갇혀 있던 여성들을 바깥 사회로 이끌어 내서어 주체적이고,독립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다. 그러나 서구문명을 바탕으로 하고, 그 문명에 담겨온 기독교를 전하려고 했을 때, 선교사들은 이미 전통적인 한국적 생활양식을 고수하겠다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션계통의 학교에서 특히 엄격했던 기숙사의 규칙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염려했던 것은 어떤 사태였을까? "외출이 엄금되어 있어, 같은 믿는 학교에서 크리스마스축하가 있는데 축하려도 못가게"하고 "1990년 겨울 크리스마스 축하 때에 교장 허락없이 근처에 자리잡고 있던 경신학교 크리스마스 경축에 보러 왔던 여학생들 60여명이 보모가 통솔해서 갔지만 3일간의 정학처분을 받았던..."53) 정도로 엄하게 한 것은 아마도 한국인의 풍습을 존중해서가 아니가 여선교사들이 금욕적이며,보수적이고 계율적으로 기독교를 이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면 배화여학교의 창설자인 캠벨 여사는 "한국인 이상으로 한국의 내외법을 엄수했다"는 것이다. "학당의 대문간채에 거처하던 남자 학생을 한때는 학당의 올안에 깊숙이 있는 초가로 옮겨 둔 적이 있었다. 그 앞에는 우물이 있었다. 하루는 노라라는 여학생(지금도 생존,74세,이름은 황자동)이 빨래를 하러 그 우물에 들어 갔다 왔는데 캠벨 당장이 부른다고 해서 갔더니 노라는 매를 맞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내 허락도 없이 왜 남자학생이 있는 곳에 갔었느냐?하여 두 손바닥을 내어 놓으라 하고 막대기로 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고 회고한다.54)

 

그러나 선교사들은 한국의 내외법이 한국여성의 지위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요인이며 그것을 타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앞에서 살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의 풍습을 처음부터 완전히 거절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초창기에 예배당에서 휘장을 치고 예배를 드리고, 학교에서 남선생보다는 여선생을 채용하고, 병원에서도 여의사와 여간호원을 키워야 하는 등의 노력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그 방법 자체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이제 점차 사회가 개화되어 기독교 여성들뿐 아니라 일반 여서들도 장옷을 벗어 던지고 남성들과 함께 일해야겠다는 각성이 늘어나고 있을 때에,완고하게 남녀간의 내외를 고수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다. 그렇다면 내외법의 엄수는 한국인의 풍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션계 학교 당국자들 자신들의 생각에 입각해서였을 것이고 이것은 성관계를 죄악시하는 기독교적 금욕주의의 관념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55)

 

남.녀가 조혼에 의해서가 아닌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결합을 의해서는 남.녀간의 만남을 자연스럽게 유도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때의 미션계 여학교의 분위기는 그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학교 당국자들의 의도가 어떠하든 신식교육을 받은 여학생들은 이전의 어머니 세대들처럼 살 수는 없었다. 그녀들은 이 사회에서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어서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공식적인 사회 참여는 교사를 하지 않으면 더 높은 학교에 유학을 가는 것이었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가정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일부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자유연애를 통한 보다 풍요로운 서구식 삶을 영위해 나가려고 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족제도와의 마찰이 일기도 했다.

[기독신보]1924년 7월 23일자에는 이러한 여성들에 대한 경고로서 "新여자의 사대주의"라는 기사가 실려 있다.

 

"一.남존심방은 본리 불미한 일이 아니다.. 녀자는 남자교제에 특별주의함이 데일 필요하다.
二.혼인에 빈궁한 쟈를 자구할 것이 아닌 것은 물론이다.
三.부모가 심히 악하야 자부를 자주 학디하면 그 ㅅ부모의 분노를 니러키지 안키 위하야

   그 소원에 의하야 각거하는 것이 무방하나...
四.빈궁한 살림은 누구나 됴화할 것이 아니다."56)

 

라고 하면서 "어느 나라를 물론하고 녀자기방을 처음으로 할때에는 다그러하더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욕 충고하며 뎌들의 아름다운 사업을 찬셩합세다"57)고 말하고 있다. 물론 교육받은 신여성들이 모두 다 기독교여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당시 바깥 사회를 출입할 수 있었던 전도부인, 여전도사들,여학교 졸업생들이 신여성의 대부분을 이루었을 것이다. 초창기 신여성들의 이러한 움직임은 1920,30년대에는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에게로 시집가는,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인습이 동등한 남녀간의 결혼관계가 요구되어질 때 도전을 받게 되며 남성들의 비위를 사하게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예는 김동인의 [김연실전]에서 잘 묘사되어 있다. 즉 동인은 김연실을 여성계의 선구자요, 선각자인 여류문학자라고 하면서, 김연실이란 신여성이 서구적 자유주의 사상을 아무 비판없이 잘못 받아들이고 한국적 여성의 미덕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다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희생자상을 묘사함으로 그 당시의 선구자사장을 부각시키고 있다.58)

 

그러나 이 소설에서도 드러나듯 남성들의 거짓된 행동은 규탄되지 않고 일방적으로 여성들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자각가가 남성중심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지적해 준다.59) 말하자면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그 교육의 구체적인 현실화가 터를 잡기 어려웠을 때 그녀들 나름대로 새로운 삶을 수립하려는 움직임들이,그것이 물론 잘못 방향지워졌다 하더라도,그렇게 일방적으로 매도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제까지 공적 사회에서 제외되었던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열려지고 그 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공직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교육은 그것을 전제로하는 것이다. 즉 교육은 현신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것을 훈련시키는 것이고 훈련받은 후에 그 일을 한다는 것을 과제로 해야 한다. 그러나 여학생들에게는 아직은 교육에의 기회만이 약간 제공되어 있는 실정이고 공식사회에의 참여는 요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전통적인 생활을 할 수는 없었다.

 

"시집만 가라는 부모.이화.S.W.H... 우리 학교안에는 훌륭한 대학과 까지 잇기는 잇스나 다른 사람의 경우와는 갖지 아니하니 그것도 나에게는 소용업고 시골교회 유치원의 선생으로 나갈가 그것도 내성질에는 당치못한 일입니다. 졸업은 하고 교문밧그로 나가야 하게는 되엿스나 갈곳이 업시된 것이 데일 큰걱정이여서 공연히 머리만 앞흐고 생각할스록 답답하기만 하여서.. 그런데 우리는 그 부모와 더브러 의론할 수가 없는 곤경에 빠져 잇습니다. 왜 집안부모와 의론 못할 것이 무엇이냐 하실 어른도 곤경에 빠져 잇습니다. 왜 집안부모와 의론 못할 것이 무엇이냐 하실 어른도 계실터이지만 의론은 사려 '이년아 너희가 스물이되엿스니 ㅅ집을 가야지 부모욕먹이고 집안 욕을 먹이려고 그러느냐'고 ㅅ골집으로 나려오기만 잔뜩 기다리고 계시니... 그럿케 부모가 가라는대로 ㅅ집을 가는 것이 과연행복이 된다던지 졍말 진졍한 의미로 우리의 생활을 의의잇게 하는 것이라면 또 모르지만 어대 그럿슴닛가 덥혀놋코 나희가 과연하엿스닛가 하로 밧비ㅅ집을 가버리라는 리유도되지 안는 리유로 그리하심이닛가요.참말이지 이것이 우리집뿐 아니고 집집마다 그런 모양이니 큰문데입니다."60)

 

이러한 신여성들의 상황에 대해서 그 당시 동아일보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그럼으로 남녀불평등이란 구제도하(舊制度下)에 오래동안 구속을 밧다가 신풍조(新風潮)가 파급(波及)하는 일조에 해족(解族)을 득하야 자유천지에 임의활동케된 우리 여학생계에는 다시 중대한 문제가 유하니 세상이 고지하는 바 배우자선택 즉 결혼문제이니 실로 여학생 그녀의 단0문제가 아니오 사회적 대문제가 되였다...당초 여학생 그네들은 여하하면 00한 배우자를 득하야 신가정에서 신성한 연애로 행복의 생활을 현모양처가 되여서 여자로 하여금 이 위선상정한 바라... 우리 사회가 이념 경향각지를 물론하고 남학생계에는 미혼남자는 극히 소수이다. 그런데 소수인 중에서도 다수는 재래의 전제혼인하에서 약혼 혹은 득혼한 자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학생 그네들은 요망하고 예정하던 바가 모다 공상과 잡념이 되야 상천을 사회를 원망하면서 방황하는 사이에 춘법추래하야 ....몰상식한 자들은 공연히 시대여학생의 풍기문란이라 도덕무시라하야 하기를 주서업시함은 억하심정인가!"61) [동아일보]1920.6.8일자.

 

즉 신여성들에 첩이 되는 일은 여성 자신의 잘못이라기보다 조혼 등의 사회적 제도에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미션계 학교의 교육에서는 그러한 문제는 고려되지 않았다. 그당시 신여성지에 실린 기사에는 미션계 학교가 융통성없이 여성문제를 처리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당신의 학교졸업생으로 당당한 그 동창회의 회원으로 남의 첩이 되여가면 그 리유가 어대 잇슴을 뭇지아니하고 당장에 제명처분을 행한다.."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