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제연행 및 정신대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태국에서 살고 있는 노수복 씨의 증언은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노수복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제와서야(1984) 털어놓는 이유는 이제는 늙었기 때문에 털어놔도 괜찮을 것 같았고 죽기 전에 고향의 친척들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노수복씨는 1942년 가을 부산근교 동구 밖 우물가 빨래터로 물항아리와 빨래감을 가지고 나갔다가 일본 순사들에 의해서 강제로 납치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1921년 경북 안동군 풍천명 광덕리 속칭 안심 부락에서 2남 2녀중 장녀로 태어났는데 14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의 명에 따라 출가를 하였다고 한다.
가난한 시댁에 출가를 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첫날밤을 지내고 보니 남편이 문둥병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어머니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켜 밥도 제대로 주지 않아서 매일 허기가 졌다. 그런 데다가 남편은 쳐다보기도 무서워 매일 울며 지내다가 밤도망을 쳐서 나왔다고 한다. 17세때 부산에서 두번째 남편을 만나 살림을 차려 그럭저럭 사는 도중에 여자사냥에 거려든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싱가포르로 운송되었다.
싱가포르의 어느 부대에서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군인의 옷을 세탁하거나 막사청소를 했고 오후에는 탄약통 운반 등 중노동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오후부터 밤까지 또 어떤 날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내 막사에 찾아오는 일본군을 맞아야 했다. 때로는 한꺼번에 10여명이 달려들어 겁탈하기도 했고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장검으로 우리의 살점을 베어내겠다는 시늉을 하며 키득거리기도 했다. 너무 많은 군인들을 치르고 나서 보면 다리 아래에 선혈이 낭자한 날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고된 하루하루를 보냄에도 불구하고 일본인 인솔자는 수시로 잡아서 매를 때렸다. 옷을 모두 벗기고 회초리로 때리기도 했고 때로는 병정들이 있는 연병장으로 끌고나가 반나로 머리에 양동이를 뒤집어 씌운 채 매를 때렸다." 그런데 "정신대원 중에는 하루에 60여명의 병정들에게 시달리는 고통을 겪는 여인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의식도 없이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산송장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정신대는 소속부대의 이동에 따라 옮겨다녔다.
그러다가 1945년 일본군에 전면 퇴각령이 내려지자 일본군과 함께 전범으로 처리되어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해방되자 같이 있던 정신대 출신 2백명 정도는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기뻐했지만 그녀 자신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나는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이런 초라하고 만신창이가 된 몰골로 어떻게 고향에 돌아간단 말인가. 차라리 이 한 목숨을 죽은 셈치고 사라지는 것이 부모님에 동생들을 위해 나은 일이 아닐까? 이런 생각 끝에 나는 포로수용소에서 돌아다니다가 지금의 태국땅에 정착하여 현재의 남편을 만나 살고 있는데 그녀는 정신대 시절의 상처로 인하여 아이를 낳을 수가 없어서 남편엑 소실을 맞게 해주었다고 한다.29) 결국 그녀의 일생은 가난한 조선여성이 걸어야 했던 한많은 삶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여성들의 고난이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도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마지못해서 학도병으로 혹은 정신대로 가라는 연설을 했을 수도 있다.
김활란 씨는 그 심정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고 한다. "그 무렵 이모님은 안질이 대단하셨다.....언니와 나는 신촌 이모님 사택으로 문병을 갔었다. '이모님 많이 아프세요?.... ''그래...내 죄값이야!''....남의 소중한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라고 연설을 하고 다녔는데...'"30)
물론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안일과 영화를 완전히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소위되고 억압받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고난받으시다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삶을 본받으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인간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거기 걸려 넘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잘못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더구나 지도자의 잘못은 수천,수만명에게 그 영향이 미치게 되므로 그 책임이 보통 민중의 실수보다 수천,수만배나 크다.
그런 사실을 감안할 때 인간적인 약점이었다는 구실로 호도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이들이 기독교 여성지도자들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일신의 안전을 위해 수많은 여성들을 이런 구렁텅이에 쳐 넣는 일에 동조한 것은 민족과 하나님을 동시에 배반한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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