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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20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5. 19. 11:13
 
 
꼬마 철학자20 - 알퐁스 도데  
 
   사랑하는 사람들 3
   그날 이후로 나는 마음만 먹으면 세상의 모든 철학자들을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을 마치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으며 
   숱한 철학자들이 잠들어 있는 그 세번째 책장 앞에 서서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었다. 
   내가 그 방에 갈 때는 대부분 신부님이 
수업을 하실 시간이었기 때문에 방은 비어 있는 적이 많았다. 
그 자그마한 파이프는 책상 위에 잔뜩 널려 잇는 책과 서류 사이에 놓여 있었다. 
읽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작은 글씨가 빽빽히 적힌 수많은 서류들과 
옆이 붉은색으로 칠해진 이절판 크기의 많은 책들 사이에서 그 파이프는 
신부님의 손에서 오랜만에 벗어나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듯했다. 
이따금씩 제르만느 신부님과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는 성큼성큼 걸어다니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신부님과 마주치면 나는 수줍은 목소리로 나직하게 인사를 하곤 했다.
  "안녕하셨어요, 신부님!"
그는 거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왼쪽 세번째 책장에서 철학책을 집어들고는 살그머니 발자국소리를 죽이며 방을 나왔다. 
한 해가 다 지나가도록 우리는 스무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러나 내 가슴 속 깊숙이에는 우리가 이미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는 기쁨과 믿음이 
굳게 자리잡고 있었으며 대화를 나누건 안 나누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음악반 학생들이 데생실에서 방학식 때 부를 
폴카곡과 행진곡을 연습하는 소리가 하루도 빠짐없이 들려 왔다. 
아이들은 그 폴카곡을 들으며 즐거운 방학이 빨리 오기를 고대하면서 재잘거렸고 
자습시간이 되면 책상에서 미니 달력을 꺼내서 하루하루 날짜를 지워가며 손을 꼽아 보기도 했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다!"
학교 운동장에는 연단을 만들 판자들이 널려 있었고, 아이들은 대청소를 하느라 
의자를 들어 내고 양탄자를 터는 등 온 학교가 들썩거리며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들떠서 공부도 집어치우고 자습감독 교사를 놀려 대는 장난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드디어 방학날이 되었다. 
방학이 조금이라도 더 늦게 시작되었더라면 나는 아마 더이상은 견뎌 내지 못했을 것이다.
방학식은 중급반 학생들이 사용하는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해를 가리기 위해 쳐놓은 알록달록한 천막, 벽에 둘러 쳐진 눈이 부시도록 하얀 휘장, 
녹음으로 짙푸른 거목들에 꽂힌 갖가지 깃발들, 그리고 기수모, 경관모, 보병용 군모, 투구, 
꽃으로 장식된 헝겊 모자, 예쁘게 수놓아진 오페라 모자, 옷이나 모자에 장식되어 
있는 깃털, 리본, 술장식 등 그것들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학교의 지체 높은 양반들은 운동장 정면에 설치된 
연단 위에 있는 다홍색 소파에 위엄을 갖추고 앉아 있었다.
아! 그 연단 앞에 서 있던 나 자신이 얼마나 왜소하게 느껴지던지! 얼른 그 자리를 떠나고 싶었다. 
연단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우쭐해져서 
연단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눈초리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양반들은 평상시와는 다른 아주 점잖은 모습을 하고 근엄하게 보이려고 무척 애쓰는 것 같았다.
제르만느 신부님도 연단 위에 앉아 있었으나 그들과는 달랐다. 
그는 안락의자에 눕듯이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고는 
옆사람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도 짙푸른 나뭇잎 사이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뻐끔뻐끔 번져 가는 파이프 담배 연기를 상상하고 있으리라.
연단의 하단에는 트롬본과 오피클레이드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세 반 학생들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교사들은 줄 끝에 서 있었다. 
학생과 교사 뒤편으로 학부형들이 붐볐는데, 
중급반 교사 한 명이 부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며 소리치고 있었다.
  "잠깐 실례합니다. 지나가도 될까요? 잠깐 지나가겠읍니다!"
 그때 비오 씨가 운동장 한쪽 끝에서 끝으로 서둘러 달려갔는데, 
인파 속으로 사라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열쇠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왔다.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식이 시작되었다. 날씨가 무더웠고, 천막 밑은 바람 한점 통하지 않아 마치 찜통 같았다. 
천막 밑에 앉아 있는 뚱뚱한 부인들이 얼굴이 새빨개져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대머리 신사들은 진홍색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 내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 양탄자, 깃발, 의자 등 방학식이 거행되는 운동장 안은 온통 붉은색으로 가득 찼다. 
세 사람이 차례로 연설을 했고 운동장을 꽉 메운 사람들은 아주 열심히 박수를 쳐 댔다. 
하지만 나는 연설을 듣지 않았다. 
이층 창문 뒷편에 앉아 언제나처럼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검은 눈동자 아가씨를 바라보며 정신은 온통 그쪽으로만 집중되어 있었다. 
그 기분 나쁜 안경잡이 마귀할멈은 불쌍한 검은 눈동자 아가씨를 
오늘 같은 날도 놔두지 않고 부려먹고 있다니! 분노가 치밀며 가슴이 메어지듯 연민의 정을 느꼈다.
상급반과 중급반이 끝나고 하급반의 차례가 되어 최우수상과 우수상을 받을 
학생의 이름이 호명되고 나자 악대가 개선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모인 사람들은 제각기 일어나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운동장은 금세 난장판이 되었다. 
선생들은 연단에서 내려오고, 학생들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가족들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발견하고는 서로 불러 대며 달려가서 껴안고 기뻐했다.
  "여기다. 여기. 이리로 오렴!"
상을 받은 아이들의 여동생들은 오빠의 월계관을 쓰고서 보란 듯이 뽐내며 걸어다녔다. 
비단옷이 의자를 스치면서 살랑살랑소리를 냈다. 
나는 나무 뒤에 꼼짝 않고 서서 예쁜 부인네들이 지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낡아 빠진 옷들이 그들 앞에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했으며, 
나 자신이 부끄럽고 왜소하다고 생각되어 아무 눈에도 띄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운동장을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하자 교장선생님과 비오 씨는 
교문 앞에 서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쓰다듬거나 머리를 깊이 숙이며 학부형들에게 인사를 했다.
교장선생님은 간사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즐겁고 알찬 방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어머니께서 수고 좀 하셔야겠네요. 잘 부탁합니다."
비오 씨도 열쇠를 흔들어 대며 맞장구를 쳤다.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자, 다음 학기에 보자꾸나. 잘 지내거라!"
아이들은 건성으로 포옹을 하고 단숨에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들은 자기 가문의 문장이 박힌 멎진 자동차에 올라탔고, 
부인네들과 여동생들은 갈아입을 옷이 든 트렁크를 차 안에 챙겨 넣었다.
그들은 이제 제각기 별장으로 갈 것이다. 
드넓은 동산과 잔디밭, 아카시아 나무에 매달아 놓은 그네, 
그리고 예쁜 새들이 지지배배거리며 사이좋게 살고 있는 새장이며, 
백조가 노니는 연못, 저녁때면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더위를 식히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곤하던 테라스를 생각하며 그들은 서둘러 떠나가고 있었다.
아이들과 부인네들의 얼굴에서 즐거운 방학을 보낸다는 설레임들이 가득 풍겨 나왔다.
어떤 아이들은 가족석이 있는 이륜마차로 기어 올라 가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고 있는 흰 모자를 쓴 예쁜 소녀들 옆에 앉았다. 
목에 금목걸이를 두른 중류 가정의 한 여인네가 마차를 몰았다.
"전속력을 내, 마뛰린느! 우린 이제 농장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들은 그곳에서 버터빵을 만들어 먹고, 사향포도주를 마시고 종일 새 사냥을 다니거나, 
구수한 내음의 건초더미 속에서 뒹굴며 휴가를 보낼 것이다.
행복한 아이들! 그들은 가버렸다. 그들은 모두들 떠나갔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방학을 보내기 위해....
아! 나도 떠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