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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22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5. 22. 10:40
 
 
 꼬마 철학자22 - 알퐁스 도데  
 
    괴롭고 긴 나날 2.

   나는 아버지의 대담한 행동이 고소하면서도 몸서리가 쳐졌다. 
   그러나 잠시 후 그 몸서리나는 비오 씨의 열쇠를 금방 잊어버렸다.
   나는 마치 곁에 있는 어머니를 껴안으려는 듯 팔을 내밀며 물었다.
    "어머니는요?"
"그렇게 이불을 차내고 그러면 아무 말도 안해 줄 테다! 
자, 얌전하게 이불을 잘 덮어야지... 
네 어머닌 잘 계셔. 지금도 바티스트 삼촌댁에 있어."
  "자끄 형은요?"
  "자끄? 자끄는 당나귀같이 멍청한 놈이야! 아니,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자끄를 당나귀라고 불러 대는 건 순전히 내 습관일 뿐이다... 
자끄는 아주 착한 아이지... 그렇게 이불을 끌어 내지 말라니까, 고얀 녀석 같으니라구... 
하지만 자끄의 그 버릇은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어. 어딜 가나 질질 짜는 그 빌어먹을 버릇 말이야. 
그러면서도 그앤 늘 자기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 
그저 불러 주는 대로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거야... 썩 괜찮은 일자리야."
 "그 불쌍한 자끄 형은 평생 동안 불러 주는 걸 받아쓰기만 해야 하는 무거운 벌을 받았군요!"
그렇게 말하고서 나는 거리낌없이 웃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나를 따라서 껄껄 웃었다. 
내게 제발 이불을 차내고 흐트리지 말라고 계속 투덜대면서 껄껄 웃었다.
아픈 것이 어쩌면 축복인지도 모른다. 
그 지긋지긋한 찜통 같은 방을 벗어나 의무실에서 난 정말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한시도 떠나지 않고 내 곁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보살펴 주었고 이것저것 여러가지 얘기를 해주면서 
꼬박 내 머리맡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가 영원히 가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나는 속으로 자꾸만 되뇌였다. 
그러나 그러한 열망이 짙고 강할수록 더욱더 슬퍼졌다. 
아버지는 여기에 회사일로 출장을 오신 것이며 
그래서 세벤느 지방을 순회해야만 했고 내 곁을 떠나야만 했다.
아버지가 떠나고 나자 나는 적막한 의무실에 홀로 남게 되었다. 
나는 의무실 창가에 있는 커다란 둥근 소파에 몸을 파묻고 하루종일 책을 읽었다. 
아침과 저녁에는 노란 빛이 감도는 얼굴의 까싸뉴 부인이 직접 식사를 날라다 주었다. 
나는 오목한 접시에 든 스프를 마신 다음 닭 날개 뼈에서 고기를 발라먹고는 
"고맙습니다, 부인!"이라고 간단히 뚝 잘라 말했다. 그뿐이었다. 
노란빛이 감도는 얼굴로 보아 그 부인은 황달을 앓고 있다고 생각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 부인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 부인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나는 그 부인이 맘에 걸렸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이었다.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는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평소처럼 아주 냉랭한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부인!"이라고 막 말하고 난 나는 
"오늘은 좀 어떠세요. 다니엘 씨?"라고 묻는 다정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머리를 들었다.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였다.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는 까싸뉴 부인이 아프기 때문에 자기가 부인의 일을 대신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내가 건강을 회복하고 
또 직접 마주 대할 수 있게 돼서 무척 기쁘다는 말을 덧붙이고는 
저녁때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공손하게 방을 나갔다. 
그날 저녁 그녀는 진짜로 다시 왔으며, 그 다음날 아침도, 
그리고 그 다음 날 저녁에도 식사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나는 내가 마치 이 세상을 모두 차지한 듯이 무척 기뻤다.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을, 까싸뉴 부인이 황달로 무척 아프다는 것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각종 질병을 다 축복하고 싶었다. 
만일 애당초 이 세상에 병이란 게 없었다면 나는 결코 
그녀와 이렇게 단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아! 그 축복받은 의무실 창가의 둥그런 소파에 파묻혀 나는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가! 
아침이 되면 마치 햇살을 받고 반짝이는 금가루처럼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반짝였으며, 
밤이 되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선 어둠을 은은하게 밝혀 주는 
달빛이나 초롱초롱한 별빛이 비춰나왔다. 
나는 밤마다 그녀의 꿈을 꾸느라 잠을 설쳤다. 
동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면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녀에게 털어놓고 싶었던 내 비밀이야기를 머리속으로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호감을 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그녀를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곤 했다. 
하지만 막상 그녀가 의무실에 들어오면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의 그런 침묵을 기이하게 생각하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고 의무실 안을 서성거리면서 
내 곁에 좀더 오래 머무를 수 있는 방법들이 없을까 고민하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어 주기를 무척 바라는 듯했지만 
소심한 나는 감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여전히 입을 곡 다물고 있었다.
이따금씩 나는 잔뜩 용기를 내서는 그녀에게 말을 붙이기도 했다.
  "아가씨!"
금세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반짝거리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와 미소를 보면 불행히도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져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상투적인 인삿말만을 할 수 있었을 뿐
내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그 숱한 얘기들은 도저히 꺼낼 수가 없었다.
"저에게 이렇게 친절히 대해 주셔서 대단히 고마와하고 있어요. 
오늘 아침 스프는 정말 맛있군요."
그러면 그녀는 실망한 듯 그녀의 검은 눈은 빛을 잃고 
자그맣고 예쁘게 변하면서 불만의 빛을 나타냈다.
  '아니, 겨우 그 말뿐이에요?'
그러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