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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34.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5. 01:28
 
 
꼬마 철학자34. - 알퐁스 도데  
 
   눈덮힌 궁륭 속의 환멸 3.

   형한테 보내는 편지를 끝낸 나는 또 한 통의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신부님, 제발 이 편지를 제 형 자끄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제 머리칼을 잘라서 저희 어머니에게 소포로 부쳐 주십시요. 
부탁드립니다.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제 신세가 너무 불쌍하고 산다는 것에 환멸을 느껴서 전 죽을 수밖에 없읍니다. 
용서하세요. 신부님, 유일하게도 신부님만이 제게 잘 대해 주셨읍니다. 
가슴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니엘 에세뜨 드림.
펜을 놓고 나는 자끄 형에게 보내는 편지와 신부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커다란 봉투 속에 함께 집어넣고 겉봉투에다 
'내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하시는 분은 
이 편지를 제르만느 신부님에게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라고 썼다. 
그러고 나서 조용히 자습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자습시간이 끝나고 밤참을 먹고 난 아이들이 저녁기도를 마치고 기숙사로 올라갔다.
아이들이 잠들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하나씩 하나씩 내 생애를 정리하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곧 비오 씨가 순찰을 돌 시간이었다. 
그의 열쇠가 쨍그렁거리는 소리, 마루바닥 밟는 요란한 발자국소리가 들려 왔다.
  "안녕히 주무세요, 비오 씨!"
  "안녕히 주무시오, 선생!"
 그가 복도에 발자국소리를 남기며 멀어져 갔다.
이제 모두 잠들고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살그머니 문을 연 나는 층계참에 서서 
혹시 아이들이 깨지나 않을까 잠시 두리번거렸다. 
기숙사는 찬물을 끼얹은 듯 숨소리조차 들려 오지 않았다.
발자국소리를 죽이며 계단을 내려간 나는 종종걸음을 치며 
미끄러지듯 복도의 어둠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나는 복도의 어둠 속에 완전히 묻혀 버렸다. 
창문 밖으로 황량한 북풍이 불어 대고 있었다. 
계단 밑쪽의 회랑을 지나가다가 나는 어둠에 잠긴 
네 채의 건물 사이로 빛을 발하는 눈 덮인 운동장을 얼핏 보았다.
운동장 저편의 찌그러진 건물에서 불빛 하나가 어슴푸레 새어나오고 있었다.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이었다. 
신부님은 일생일대의 역작을 저술하느라 모두가 잠든 이 밤을 홀로 밝히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친절한 신부님에게 마지막 인사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뜨거운 인사를 보냈다. 
그러고는 강당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강당 안에서 음침하고 차가운 냉기가 확 밀려 왔다. 
창문의 창살을 통해서 한 줄기의 달빛이 흘러들어와서는 
굵은 쇠고리를 비춰 주고 있었다. 
마치 나를 위한 것처럼... 
나는 몇 시간 전부터 줄곧 오직 그 쇠고리만을 생각했다. 
굵은 쇠고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한 은빛을 발하고 있었다. 
강당 한 모퉁이에 의자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들고 쇠고리 밑으로 가져 와서는 조용히 내려놓은 후 그 위에 올라섰다. 
짐작대로 딱 알맞은 높이였다. 나는 늘 리본 모양을 만들어 
목에다 매고 다니던 구겨진 긴 자주색 비단 넥타이를 천천히 풀어 
넥타이를 쇠고리에 잡아매고서 올가미를 만들었다... 
1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땡... 
'자! 지금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올가미를 느슨하게 풀었다. 
흥분 같은 전율이 전신을 감쌌다.
 '안녕, 자끄 형! 안녕, 엄마!'
그때였다. 갑자기 억센 손 하나가 달려들어 내 몸둥아리를 꼭 붙잡았다. 
다음 순간 나는 걸상에서 끌어 내려졌고 내 발은 강당 바닥에 닿았다. 
동시에 누군가가 무뚝뚝하고 거친 목소리로 한껏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이 시간에 그네를 타다니 무슨 당치 않은 경운가?"
  제르만느 신부님이었다.
나는 그만 아연실색해져서 몸을 돌렸다. 
그는 신부복을 입지 않고 짧은 바지 차림이었는데, 
조끼 위로 가슴장식이 나부끼고 있었다. 
달빛에 반쯤 드러난 칼자국이 더욱 선명해 보이는 
험상궂은 얼굴이 서글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방금 운동장의 급수장에서 물을 떠왔는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물병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한 손만으로 자살일보 직전의 나를 의자 위에서 끌어내린 것이었다. 
물병을 내려놓고 말고 할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나의 놀란 얼굴과 눈물이 그득 고인 두 눈을 본 제르만느 신부님은 
미소를 거두고는 정답고 애정어린 목소리로 다시 한번 말했다.
 "이 시간에 그네를 타다니 무슨 당치 않은 경운가?"
  나는 어리벙벙해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네를 타는 게 아닙니다, 신부님. 전 죽고 싶어요."
  "뭐라구?... 죽는다구?... 죽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슬픈 일이라도 있나?"
  "저...."
  나는 복받쳐오르는 서러움을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흐렸다.
  "다니엘, 함께 가세.
  나는 싫다는 손짓을 하고서 넥타이를 매어 놓은 쇠고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제르만느 신부님이 낚아채듯, 내 손을 붙잡았다.
  "자! 내 방으로 올라가세나. 자살하고 싶다면 거기서도 충분히 할 수 있지. 
오히려 방안은 따뜻하니까  자살하기엔 더욱 쾌적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절 죽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신부님. 제가 죽는 걸 방해할 권리가 신부님에게는 없읍니다."
  "아! 그래?"
 이렇게 말하고 난 그는 느닷없이 내 혁대를 움켜쥐더니 
몸부림을 치며 애원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바싹 들어 
마치 짐꾸러미처럼 팔 밑에 끼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은 벽난로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벽난로 가까이에 책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램프가 훤히 켜져 있었는데 그 
불빛 아래로 파이프 몇 개와 파리똥이 묻은 낡은 종이 뭉치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