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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35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6. 02:23
 
 
꼬마 철학자35  - 알퐁스 도데  
 
   눈덮힌 궁륭 속의 환멸 4.
   신부님은 나를 벽난로 한쪽 모퉁이에 앉혔다. 
   나는 무척 흥분해 있었기 때문에 꽤 많은 말을 주절거렸다. 
   나의 짧은 인생 동안 내게 밀어닥친 불행에 대해서 
   그리고 그 불행을 헤쳐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며 발버둥쳐 보았지만 
이제는 인간에 대해서 환멸을 느끼고 
마침내 내 인생을 끝장내려고 한다는 것을 얘기했다. 
신부님은 시종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들었다. 
울음을 삼키며 떠듬떠듬 쓰리고 답답한 심경을 털어 놓고 나니 마음이 좀 후련해졌다.
선량한 신부님은 내 손을 꼭 잡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네. 살아가다 보면 더 험난한 일도 겪게 되는 법이야. 
그런 대단찮은 일로 죽으려 한다면 자넨 정말 
어리석고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아야만 해. 
자네 얘기는 아주 행운일지도 몰라... 음, 그래 떠나는 게 좋아. 지금 당장 말일세. 
여드레씩 기다릴 필요도 없어! 내가 책임지지... 
자네가 그 망나니 같은 녀석한테 빌리려고 했던 돈은 내가 빌려 주겠어. 
지금은 아무 말도 말게! 난 일해야 하고 자네에겐 휴식이 필요하니까... 
자네가 기숙사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네. 
자넨 거기 가면 춥고 또다시 두려워질 거야. 
내 푹신한 침대에서 깨끗한 이불을 덮고 자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하게! 
난 밤새 글을 써야 하고, 설사 잠이 오더라도 소파에서 자면 되니까... 
그럼 잘 자게! 아무 말 말고."
나는 아무 말 못하고 신부님의 침대에 가 누웠다. 
마치 꿈 속을 오랫동안 헤맨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오늘 하루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가! 
내 목숨은 거의 끊어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지금은 그렇게도 좋아하는 
신부님의 조용하고 푸근한 방에서 안락한 침대에 누워 있다니!... 
아, 항상 지금만 같다면!... 
난 이따금씩 눈을 뜨고 램프에서 흘러나오는 부드러운 빛을 받고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친절한 제르만느 신부님을 바보라곤 했다. 
신부님은 줄담배를 피워대면서 흰 종이를 소리 없이 메꿔 가고 있었다.
신부님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벌써 아침이 밝아 있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신부님은 그러한 내 모습을 보더니 껄껄 웃어 대면서 말했다.
  "자! 종이 울렸으니 서둘도록 하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평상시처럼 학생들을 데리고 나오는 거야. 
그리고 아침 휴식시간에 다시 여기서 만나 얘길하도록 하세."
신부님의 말을 듣자 갑자기 모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나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인자한 신부님은 막무가내로 날 밀어 냈다.
자습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운동장에 채 나가지 나가지 않았는데도 
급히 발걸음을 옮겨 제르만느 신부님의 방으로 갔다. 
문을 똑똑 두드리고 들어가 보니 신부님은 책상서랍을 활짝 열어 놓고 
금화를 세어 정성스레 나누고 있었다.
내가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서 고개를 돌려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그는 아무 말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일을 다 끝낸 신부님은 서랍을 닫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짓했다.
 "이걸 자네에게 전부 주겠네. 내가 계산을 해놓았지. 
이건 여행비이고, 이건 수위한테 갚을 돈, 이건 바르베뜨 까페에 진 빚, 
이건 자네가 학생한테 갚을 돈 10프랑일세...."
내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신부님은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 작별인사를 하세... 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군. 
내가 수업을 마치고 나오기 전까지 자넨 여길 떠나야 하네. 
바스티유 감옥 같은 학교 분위기는 자네에게 좋을 게 하나도 없어... 
빨리 파리로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파이프 담배도 피우면서 남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네. 알겠나? 
남자가 되어야 해. 왜냐하면, 다니엘 군, 자네도 알겠지만 자넨 아직 어린애에 불과해. 
난 자네가 평생 어린애같이 행동할까 봐 무척 걱정된다네."
신부님은 하나님과도 같은 인자한 미소를 얼굴에 함빡 띠우며 내게 팔을 벌렸다. 
하지만 나는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감격으로 
눈물을 쏟으며 그의 발 밑에 무릎을 꿇었다. 
신부님은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크고 부드러운 손으로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런! 이러다 늦겠는 걸."
신부님은 급히 책과 노트를 챙기면서 방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다 생각난 듯 뒤돌아보고 다시 한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도 파리에 형이 한 분 계시지. 선량하고 인자한 신부님이야. 
가서 만나 뵈면 좋을 텐데... 하지만 자넨 지금 정신이 얼얼할 테니 
형님 주소를 가르쳐 준들 곧 잊어먹을 거야...."
그러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오른손에는 검은 신부 모자를, 
왼쪽 겨드랑이에다가는 서류 뭉치와 책을 끼고 걸어갔다. 
신부님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인자하신 제르만느 신부님의 체취와 온정을 오래 간직해 두려고 
떠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의 방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나는 커다란 책장과 자그마한 책상, 반쯤 깨진 벽난로, 
내가 거기 앉아서 눈물을 흘리며 신부님께 내 심경을 털어놓았던 안락 의자, 
편안히 누워 푹 잠을 잔 침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는 이미 신부님에게 용기와 선의와 헌신과 인종이 내재해 있고 
다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내게 베푼 신부님의 따뜻한 배려와 자비로움을 대하고 나서는 
더욱더 신부님이 신비롭게만 느껴졌다. 
나는 그러한 신부님 앞에서 더욱더 비겁하고 왜소해 보이는 
나 자신을 깨닫고는 수치스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죽을 때까지 제르만느 신부님을 잊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나는 신부님의 방에서 보냈다. 
이제 트렁크도 꾸리고, 빚도 갚고, 합승마차 좌석도 예약해야 했다.
방을 나서려는 순간, 벽난로 한 모퉁이 위에 놓인 
새까맣게 된 낡은 파이프 몇 개가 언뜻 눈에 띄었다. 
나는 가장 낡고, 가장 새까맣고, 가장 짧은 파이프를 집어들고는 
마치 성인의 유골이나 되는 것처럼 소중하게 주머니에 집어넣은 다음 계단을 내려왔다.
강당 문은 여전히 살짝 열려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눈길을 돌린 나는 흠칫 놀라며 온몸을 휩싸는 전율을 느꼈다.
어둡고 냉기 도는 강당 안에선 그 쇠고리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둥그렇게 매어진 내 자주색 넥타이는 쓰러진 의자 위에서 흔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