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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32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2. 13:25
 
 
꼬마 철학자32  - 알퐁스 도데  
 
   눈덮힌 궁륭 속의 환멸

   싸르랑드 성문에서 풀밭까지는 족히 2킬로는 되었다. 
   하지만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1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그 거리를 주파했다. 
   나는 무엇보다 로제가 걱정되었다. 
   그 불쌍한 친구가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교장선생님에게 깡그리 털어놓지는 않았을까 두려웠다. 
내 머리속에는 그가 가지고 있던 피스톨의 손잡이가 아직도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런 불길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나는 발이 닳도록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런데 풀밭에 점점 가까와지자 나는 눈 위에 
여러 사람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나 있는 걸 발견했고, 
펜싱 교사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늦추면서 
파리와 자끄 형, 그리고 기차 여행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다시 불안감으로 가슴이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아니야. 로제는 틀림없이 자살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이 황량한 곳까지 찾아올 리가 없지 않은가? 
바르베뜨 까페에 들러서 친구들을 데리고 간 건 그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이별의 술잔을 최후로 나누고 싶어서였을 거야. 아! 로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난 다시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헐레벌떡 달려와 삽시간에 나는 풀밭에 다다랐고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커다란 나무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쌍한 친구! 내가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진 발자국을 따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나는 
드디어 에스뻬롱 별장에 도착했다.
그 별장은 평판이 별로 좋지 못했다. 
싸르랑드의 난봉꾼들이 거기서 파티를 벌이며 
벼라별 해괴한 짓거리를 다한다는 곳이었다. 
나도 몇 번 거기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날처럼 그렇게 음침해 보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순백색으로 덮여 있는 벌판 한가운데 페인트는 누렇게 탈색되고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추잡스러운 모습으로 서 있는 그 별장은 
키작은 느릅나무에 가려 있었다. 
문은 낮았고, 벽토가 군데군데 벗겨져 볼상 사나운 모습이었으며 
창유리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앉아 있었다. 
그 자그마한 집은 아마 자기가 그 불유쾌한 일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부끄럽기도 하고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 별장의 추잡한 겉모습은 마치 그러한 심경을 항변하는 듯이 보였다.
별장으로 점점 다가가니 술잔 부딪치는 소리와 
웃음소리,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순간 몸이 떨려오며 불길한 생각이 전신을 휩싸는 것을 느꼈다.
  '아! 어쩜 좋아! 이별주를 마시고 있는 거야.'
나는 어떡해야 할지 몰라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침착해지려고 애를 썼다.
그때 나는 별장 뒤편에 서 있었다. 
심호흡을 몇 번 한 후 나는 살문을 살짝 밀고 정원으로 들어갔다. 
정원의 말은 꼴은 말이 아니었다. 
커다란 산울타리는 나뭇잎을 다 떨구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초라해 보였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던 라일락은 말라 비틀어졌고, 
정원 한구석엔 지저분하고 악취를 풍기는 한 무더기의 온갖 쓰레기들이 
소복이 쌓여 마치 쓰레기무덤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치형의 정자인 순백색의 궁륭도 마치 에스키모인들의 집처럼 황량하게 보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정도로 서글픈 광경이었다.
손뼉소리가 일층 거실에서 들려 왔다. 
먹고 마시느라 한참 열이 올랐는지 창문 두 개가 활짝 열려 있었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층계에 막 발을 올려놓았을 때였다. 
나는 집안에서 들려 오는 말소리를 듣고는 기분이 섬뜩해져서 발을 멈추고 말았다. 
내 이름이 거론되자 모두들 폭소를 터뜨리며 죽어라 웃어 대고 있었다. 
로제가 내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다니엘 에세뜨란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포복절도를 했다. 
무언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섬뜩한 호기심에 자극되어 나는 뒤로 물러섰다. 
뭔가 특별한 사실을 알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양탄자처럼 발자국소리를 없애 주는 눈 덕분에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조심스레 궁륭 안으로 슬그머니 스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고는 창문 바로 옆에 몸을 바싹 붙이고 숨소리를 죽이며 섰다.
나는 평생 그 궁륭 밑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궁륭을 뒤덮고 있던 누렇게 메말라 버린 나뭇잎, 
진흙투성이가 된 더러운 바닥, 녹색이 군데군데 벗겨진 
자그마한 탁자, 들이닥친 눈이 반쯤 녹아 물이 흥건히 배어 있는 나무 벤치... 
그 황량함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궁륭 안에는 밤새도록 들이닥친 눈이 잔뜩 쌓여 있었고 햇빛은 거의 비쳐들지 않았다. 
눈이 서서히 녹아내리면서 머리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인간이 얼마나 비열하고 야비할 수 있는가를 배우게 된 것은 바로 그곳, 
햇빛조차 비치지 않아 무덤 속처럼 어둡고 차가운 궁륭 안에서였다. 
내가 인간을 의심하고, 멸시하고, 증오하는 방법을 확연히 배운 곳이 바로 그곳이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그런 곳으로 가지 않도록 
인도해 주고 보호해 주기를 절실히 바란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수치로 귀까지 빨개진 나는 숨을 죽이면서 
에스뻬롱 별장 안에서 새어나오는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 좋은 친구인 펜싱 교사는 계속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는 쎄실리아 사건과 연애 편지, 군수가 학교를 방문한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손뼉을 치고 폭소를 터뜨리며 열광하는 걸로 봐서 
우스꽝스런 몸짓을 섞어가며 떠들어 대는 모양이었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말이야. 
왜 그 알제리에 있는 보병들을 위한 극장에서 3년 동안 코메디를 공연했었잖아. 
그러나 그건 결코 무료공연이 아니었다네. 
그러나 내 얘기는 공짜로 코미디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을 거네. 
으하하하... 나는 잠시 패자가 돼 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었지. 
이젠 더이상 자네들과 함께 에스뻬롱 영감의 맛좋은 포도주를 
마셔 보지 못할 거라는 절망감에 빠졌어. 
그런데 말이야, 그 꼬마 에세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 
지금쯤 일러바쳤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걸. 
그 꼬마는 내가 명예스롭게 스스로 자수를 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설사 그 꼬마가 이실직고를 했더라도 누가 믿어 주겠어? 
또 나는 절대로 자수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선수를 쳐서 미리 연극을 벌이는 게 수라고 생각하게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