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33 - 알퐁스 도데
눈덮힌 궁륭 속의 환멸 2.
그렇게 말하고 난 펜싱 교사는 스스로 연극이라 칭한
그 모든 것을 공연하기 시작했다.
아침에 내 방에서 그와 나 사이에 일어났던 일이었다.
그 야비한 녀석은 단어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금세 애절함과 비통함에 젖어 있는
비극 배우가 되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우리 어머니! 우리 불쌍하신 어머니!"
그러더니 곧 그는 내 목소리를 흉내내서 외쳤다.
"안 돼요, 로제! 안 돼요! 당신은 쫓겨나면 안 됩니다!"
그 연극은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정말 재미있는 코메디였다.
관객들은 바닥을 두드리고 손뼉을 쳐대면서 모두들 떼굴떼굴 굴렀다.
내 뺨 위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이빨이 딱딱 맞부딪치며 떨렸다.
그제서야 나는 아침에 내 방에서 로제가 절규에 가까운 울음을 토해 내던 것이
사실은 가증스런 코메디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고 계산한 그는 사전에 세심하게 계획을 짜서
일부러 내가 쓴 편지를 옮겨 쓰지 않고 그대로 부쳤으며,
그의 불쌍한 어머니는 이미 20년 전에 죽었고,
권 총 손잡이라는 것도 사실은
파이프 케이스였다는 사실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쎄실리아는 어떻게 됐나?"
"그 여잔 아무 말도 안했어. 벌써 떠나 버렸지. 꽤 괜찮은 애였는데."
"그럼 다니엘은 이제 어떻게 되지?"
"쳇, 될 대로 되겠지 뭐!"
그가 술에 취한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뱉아 내는 말을 듣고서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나자 나는 당장 궁륭에서 뛰쳐나가
마치 유령처럼 느닷없이 그들 앞에 나타나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자제력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이미 충분히 조롱거리가 되었으니까.
고기가 다 구어진 모양이었다.
모두들 술잔을 부딪치는지 쨍그랑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로제를 위하여! 로제를 위하여!"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괴로왔다.
나는 정원을 가로질러 뛰쳐나왔다.
단숨에 살문을 지나친 나는 미친 놈처럼 내닫기 시작했다.
소리없이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눈 덮인 거대한 벌판은 황혼녘의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까닭모를 깊은 우수에 잠겨 있었다.
나는 마치 상처입은 미친 개처럼 얼마 동안을 그렇게 정신없이 달렸다.
산산조각난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나의 심경은
시인의 몇 마디 상투어로는 절대로 표현될 수 없는 절박한 것이었다.
그날 누군가는 분명히 그 은백색 벌판에 길게 이어져 있는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디서 돈을 구한단 말인가? 어떻게 갈 것인가?
자끄 형은 어떻게 해야 만날 수 있을까?
로제의 일을 폭로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고
이미 쎄실리아도 떠나 버린 이후니 그는 오리발을 내밀 것임에 틀림없고....'
난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피로와 고통에 짓눌리고 이 세상의 모든 것에 환멸을 느낀 나는
밤나무 밑의 눈밭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완연한 어둠 속에서 밑도끝도없는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아마 나는 생각할 기력조차 잃은 채
그렇게 쓰러져 언제까지라도 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저 멀리 싸르랑드 쪽에서 종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학교에서 울리는 종소리였다.
그 종소리를 듣고는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제는 돌아가서 강당에 모여 있는 아이들을 감독해야 한다.
바로 그때 강당을 생각하는 순간 내 머리속으로
번개같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울음을 즉시 멈추고, 자세를 가다듬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서두르지 않고 침착하게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자신감을 가지고 힘찬 발걸음으로
그 은백색의 드넓은 벌판을 가로질러 싸르랑드로 접어들었다.
나는 마을의 어둡고 꽁꽁 언 큰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서 학교정문에 다다랐다.
그리곤 아이들이 휴식시간을 즐기고 있는 강당으로 한걸음에 뛰어갔다.
강당에 들어선 나는 천장 한가운데 매달려 흔들리고 있는
커다란 쇠고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휴식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고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습실로 가서 조용히 자습을 하라고 이른 다음
교단 위의 책상에 앉아 자끄 형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떼거리로 모여 앉아 왁자지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통한 심경으로 차근차근 편지를 써나갔다.
자끄 에세뜨
라땡 구역, 보나파르뜨 가, 파리
사랑하는 자끄 형! 형을 괴롭게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날 용서해 줘.
이젠 울지 않는 형을 내가 다시 한 번 더 울릴 것 같아.
이 편지가 아마 마지막이 될 거야...
형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이면 난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여기까지 썼을 때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나는 펜을 멈추고는 이리저리 다니면서 몇몇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타일렀다.
나는 아이들에게 벌을 주지도 않았고 화도 내지 않았다.
알겠어? 자끄 형, 난 너무 불행해. 자살하는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어.
내 미래는 온통 잿빛이고 전혀 가망이 없는 것 같아.
난 학교에서 쫓겨났어, 형! 여자문제 때문인데 얘기를 하자면 너무 길어.
그러나 밝혀 두건대 그건 전혀 내 잘못이 아니야. 그 야비한...
아냐. 아냐. 그만두겠어... 게다가 빚진 돈도 많아.
공부도 할 수가 없어. 부끄러워.
내 자신이 혐오스럽고 인간들에게 대한 경멸감...
아 정말 견딜 수가 없어. 산다는 것이 두려워...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게 낫겠어....
나는 또다시 펜을 멈춰야 했다.
"수베롤! 이 시를 5백 번 베껴 써서 나에게 검사를 맡도록 해라.
그리고 거기 푸끄와 루피는 이번 일요일은 외출 금지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고 난 나는 편지를 마무리지었다.
안녕, 자끄 형!
할 얘기는 많지만 울어 버릴 것만 같아 도저히 쓸 수가 없어.
학생들도 날 보고 있고,
엄마한테는 내가 산보를 하다가 잘못하여
바위에서 미끄러졌다거나 아니면 멱을 감다가 익사했다고 말씀드려 줘.
아니면 형 맘대로 꾸며 대든지.
여하튼 불쌍하신 엄마가 진짜 이유는 모르시도록 해야 돼!
부탁이야... 그리고 내 대신 사랑하는 어머니를 껴안아드려 줘.
아버지도... 그리고 두 분한테 아주 멋진 새집을 지어 드리도록 해....
안녕! 난 형을 사랑해. 다니엘을 기억해 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