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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39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11. 21:49
 
 
꼬마 철학자39 - 알퐁스 도데  
 
   꿈의 도시 파리로
   바티스트 삼촌은 너무 연세가 많아 지금쯤 중앙 아프리카에 있는 
   5천 년 된 바오밥나무만큼이나 늙었을 것이다. 
   설사 내가 삼촌만큼 오래 산다 해도 3등 열차에 몸을 싣고 난생 처음 
  파리까지 여행을 하던 그 이틀 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2월 하순이었다. 아직도 날씨는 꽤 추웠다. 
차창 밖으로는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과 바람, 싸락눈, 헐벗은 언덕, 
물에 잠긴 들판, 길게 늘어선 마른 포도나무가 휙휙 스쳐 지나갔다. 
기차 안에는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술 취한 선원들, 
죽은 생선처럼 입을 쩍 벌리고 자는 뚱뚱한 농부들, 
장바구니를 무릎에 올려놓은 노파들, 아이들, 계집애들, 
젖먹이는 여자들 그리고 파이프 담배와 브랜디, 마늘을 넣은 소시지가 든 상자, 
썩은 지푸라기 냄새를 풍기는 짐짝이 한데 엉켜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객차 안의 너저분하고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기차가 출발할 당시 나는 하늘을 보려고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한 8킬로쯤 갔을까, 
한 간호병이 자기 아내와 마주 앉아야겠다고 우기면서 내 자리를 빼앗아 버렸다. 
나는 수줍어서 불평 한마디도 못한 채 자리를 내주고는 
좌석의 가운데 쪽으로 밀려와 린네르 씨앗 냄새를 풍기는 
뚱뚱하고 못생긴 간호병과 그의 어깨에 기대어 계속 코를 골아 대는 
상파뉴 출신의 키다리 북치기의 틈 밑에 끼어 앉아서 8천 킬로를 가야만 했다.
나는 머리를 등받이에 딱 고정시키고 입을 꾹 다문 채 
원수 같은 두 인간 사이에 끼어 꼼짝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이틀을 보냈다.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 이틀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물론 내 수중엔 40쑤우짜리 동전이 하나 남아 있긴 했었다. 
하지만 나는 파리의 기차 역에서 자끄 형을 못 만날 경우를 대비해서 
그 동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배가 고프고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 
그 동전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데 내 주위에 앉은 사람들은 내게 먹어 보란 한마디 권유도 없이 쉬지 않고 먹어 댔다. 
내 무릎 밑에는 무지하게 크고 무거워 보이는 둔탁한 바구니가 놓여 있어 무척 불편했는데, 
내 옆에 앉은 그 간호병은 거기에서 맛나게 조리된 돼지고기를 쉴새없이 꺼내서는 
자기 아내와 나눠 먹는 것이었다. 
그 바구니에선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와 시장기를 부추겼고 
내게 남은 마지막 동전을 써 버릴까 하는 고민을 하게 했다. 
특히 둘째 날에는 더 심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여행을 하면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배고픔이 아니었다. 
싸르랑드를 떠날 때 나는 구두를 신지 않은 채 아주 얇고 목이 짧은 고무장화만 신고 있었다. 
그 고무장화는 내가 기숙사를 순찰할 때 신던 것이었다. 
그 고무장화는 아주 멋지게 생겼지만 겨울에, 
그것도 3등 열차칸에서 그걸 신고 있자니 발이 시려 눈물이 찔끔찔끔 날 정도였다. 
밤이 되어 승객들이 모두 잠들고 나면 나는 발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려고 
밤새도록 두 손으로 발을 주무르곤 했다. 
어머니가 내 그런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그러나 나는 배가 등가죽에 붙어 버릴 정도의 허기와 
끔찍한 추위에도 불구하고 마냥 행복했다. 
상파뉴 북치기와 간호병 사이의 내 자리가 숨이 막힐 정도로 비좁고 불편했지만 
나는 고통을 모두 감수할 수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면 그 모든 고통은 끝날 것이고 자끄 형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 날 밤이 지나고 새벽 3시 무렵, 나는 선잠을 자다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드디어 기차가 멈추고 기차 안은 술렁거렸다.
간호병이 자기 아내에게 "다 왔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눈을 부비며 물었다.
  "여기가 어딥니까?"
  "파리요!"
나는 황급히 승강구로 달려갔다. 집 한 채 보이지 않았다. 
헐벗은 들판과 몇 개의 가스등과 석탄더미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 멀리에서 붉은 불빛 하나가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파도소리같이 우르렁거리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 왔다. 
조그만 램프를 든 남자가 큰소리로 외치며 승강구마다 돌아다녔다.
  "자, 파리에 다 왔읍니다. 승차권을 미리 준비하세요!"
나도 모르게 갑자기 이 거대한 도시 파리에 도착했다는 것에 
야릇한 흥분과 두려움을 느꼈다.
거대하고 잔인한 도시에 첫발을 닫은 내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5분 뒤 나는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자끄 형은 거기서 한 시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깨를 약간 꾸부정하게 구부린 형이 전신주 같은 
기다란 팔을 높이 쳐들고 철책 뒤에서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단숨에 형을 향해 달려갔다.
  "자끄 형! 형!"
  "야! 다니엘!"
 개찰구를 막 통과한 나는 힘껏 자끄 형을 껴안았다. 
그러나 역은 수많은 여행객과 화물로 들끓어 몹시 혼잡했기 때문에 
우리들이 서로를 껴안고 오랜만의 해후를 즐기며 
진심을 토로하고 영혼의 대화를 나눌 그러한 곳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떠밀며 발을 밟고 지나갔다.
  "거기 서 있지 말고 빨리 나가요!"
  개찰구 직원이 우리에게 고함을 쳤다.
  "자, 어서 가자. 네 트렁크는 내일 찾도록 하고."
자끄 형이 내게 말하며 팔짱을 꼈다. 
형과 나는 우리의 호주머니만큼이나 가벼운 걸음으로 라땡 구역을 향해 걸었다.
나는 그 이후에도 그날 밤에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의 감상과 
역에서 받은 인상을 기억해 내려고 무던히 애쓰곤 했다. 
사람들은 흔히 낯선 풍경에 접하면 특별한 인상을 받게 마련이지만
점차로 익숙해지면 차차 그때의 감상을 잊어버리게 되는 모양이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받은 강렬한 인상은 점차로 희미해져 갔고 
지금은 그러한 강렬함을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되었다. 
수년 전 어린애에 불과했던 내가 파리의 거리를 걸었을 때 파리는 
온갖 흥미거리와 설레임과 아울러 잔인함과 폭력의 이중성을 가진 
거대한 야수처럼 안개에 뒤덮여 나를 흥분과 두려움으로 몰아넣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시커먼 강을 가로지른 나무다리, 인적이 끊긴 강둑, 
그 강둑을 따라 펼쳐진 널따란 공원이 기억난다. 
우리는 그 공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철책 너머로는 짚으로 엮은 오두막집들, 잔디밭, 
군데군데 패여 있는 물웅덩이, 서리가 내려앉아 반짝이는 나무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동물원이야. 흰곰도 있고, 원숭이, 보아뱀, 하마 그 외에도 얼마나 많다구."
  형이 다정하게 말했다.
실제로 동물들의 냄새가 풍겨 왔고, 이따금씩 어둠 속으로 
동물들의 날카로운 외침소리가 목쉰 듯한 울부짖음이 울려퍼졌다.
나는 형 옆에 바싹 붙어 철책 너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파리의 밤, 두려움과 흥분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그 신비스런 공원을 보자 
내가 마치 시커멓고 커다란 동굴 속에 혼자 내버려 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내게 느닷없이 덤벼들지도 모를 야수들이 득실거리는 
거대한 동굴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자끄 형이 나를 보호해 줄 것이다. 
아! 자끄 형! 왜 그동안 우리는 함께 지낼 수 없었을까?
우리는 끝없이 이어지는 어두컴컴한 길을 따라 오랫동안 걸었다. 
그러다가 형은 성당 하나가 우뚝 서 있는 자그마한 광장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여기가 쌩 제르멩 데 프레 광장이야. 우리 방은 저 위에 있어."
  "아니 자끄 형! 그럼... 종탑 속에 방이 있단 말이야?"
  "그래, 맞아... 시계를 보기엔 아주 안성맞춤이지."
자끄 형은 과장을 섞어 말했다. 
사실 자끄 형은 성당 옆에 육칠 층쯤 되는 집의 고미다락방에서 살고 있었다. 
그 방의 창문은 쌩 제르멩 종탑의 시계판과 거의 평행을 이루고 있었다.
 방에 들어선 나는 기쁨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야 따뜻한 불이다! 정말 행복해!"
나는 벽난로 쪽으로 달려가 고무장화가 녹아 버릴 정도로 가깝게 불길에 발을 쪼였다. 
그때서야 내 신발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자끄 형이 폭소를 터뜨렸다.
 "다니엘, 파리에는 나막신을 신고와서도 뽐내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단다. 
그런데 너는 고무장화를 신고 왔으니 정말 참신하구나. 
자, 내 슬리퍼를 신거라. 그리고 배고플 텐데 우리 파이를 먹도록 하자."
자끄 형은 방 한쪽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식탁을 벽난로 앞으로 끌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