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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38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9. 00:10
 
 
꼬마 철학자38 - 알퐁스 도데  
 
   운명의 첫걸음
   어머니의 오빠인 바티스트 삼촌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둥글둥글한 성격의 소유자로 
   오래 전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일찌감치 결혼했는데 
   숙모를 몹시 두려워하는 공처가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사실 숙모는 비쩍 마르고 지나치게 인식해서 사람들이 밉쌀스럽게 생각하는 여장부였다. 
삼촌은 그림 그리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4년 전쯤부터 그분은 물과 접시, 붓 등 그림 그리는 데 사용되는 
온갖 잡동사니들 속에 파묻혀 신문의 삽화에다가 색을 칠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삼촌 집에는 낡은 '일뤼스 뜨라씨용' 신문과 '샤리바리' 신문, 
'마가쟁 삐또레스끄' 잡지 그리고 온갖 지도들이 많이 있었다. 
그는 일단 눈에 띄기만 하면 닥치는 대로 뭐든지 색칠부터 하려고 붓을 들고 달려들었다. 
지독하게도 궁핍했던 시절엔 삽화가 있는 신문을 사려고 숙모에게 손을 내밀다가 
심한 잔소리만 잔뜩 들었고 그럴 때마다  삼촌은 아무 책에나 색칠을 했다. 
한번은 내 스페인어 문법책에다 삼촌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장도 빠짐없이 색칠 해 놓은 적도 있었다. 
형용사는 푸른색으로, 명사는 분홍색으로, 
그야 말로 알록달록한 현란한 포장지처럼 책 한 권을 온통 색칠해 놓았던 것이다.
여섯 달 전부터 어머니는 그 늙은 기인 삼촌과 
앙칼지고 사나운 숙모 사이에 끼어 살아야 했다. 
주눅이 들어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어머니는 하루종일 삼촌 옆에 앉아 
뭔가 할 만한 일거리가 없을까 궁리하면서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곤 했다. 
이따금 어머니는 삼촌이 색칠하다 내팽개친 붓을 빨거나 
그림물감 접시에 물을 담아 두는 등 잔일을 해 주곤 했다. 
우리 집안이 망한 뒤로 바티스트 삼촌은 툭하면,
 "에세뜨는 더 이상 쓸모없는 인간이야! 무능한 밥벌레라구!"
하는 말을 입에 올리며 아버지를 무척 증오했다. 
그래서 불쌍한 어머니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삼촌이 떠벌리는 
아버지에 대한 욕지거리를 들어야 했는데 어머니에겐 그것이 가장 서글픈 일이었다. 
그 늙어 빠진 바보 같은 삼촌이 자기는 스페인어 문법책에다 색칠 따위나 하고 있으면서 
의기양양하게 점잔을 빼며 그 말을 내뱉는 꼴이란 정말 가관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별볼일 없다고 무시하면서 
스페인어 문법책에다 색칠하는 따위는 일에만 심혈을 기울이는 
소위 점잖은 인간들을 많이 보아 왔다.
바티스트 삼촌 집에서 어머니가 이런저런 일들로 
고달프고 서글프게 지냈다는 사실을 나는 훨씬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삼촌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가 
마음 편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긴 했다. 
내가 불편하신게 없느냐고 물어 보았을 때 
어머니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며 아무런 기색도 하지 않았다. 
내가 그 집에 들어 섰을 때는 마침 저녁식사를 하려는 참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보를 보자 기뻐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힘껏 껴안았다. 
하지만 우리 불쌍한 어머니는 곧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더니 거의 말이 없었다. 
접시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묵묵히 앉아 있던 어머니는 
마지못해 한 두마디 내뱉았는데 낮게 가라앉은 어머니의 목소리는 온화했고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땟국물이 배이고 몸에 꽉 끼는 어머니의 옷은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남루하여 나는 고개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삼촌과 숙모는 몹시 못마땅한 듯 나를 냉랭하게 맞아들였다. 
숙모는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작스럽게 왔느냐며 저녁은 먹었는지 건성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이미 먹었다고 대답하자 숙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숙모는 내가 저녁을 안먹었으면 어떡하나 하고 잠시 전전긍긍했던 것이다. 
대충 차려진 저녁 상에는 완두콩 한 접시와 대구 요리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바티스트 삼촌은 내가 휴가를 얻어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나는, 자끄 형이 파리에다 나를 위해 좋은 일자리를 마련해 놨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형을 만나러 가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내 장래를 걱정하신 어머니를 안심키고 또한 
나를 삼촌이 나를 깔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었다.
내가 좋은 일자리를 갖게 된다는 걸 안 숙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다니엘, 네 엄마를 파리로 모셔가야 한다... 
네 불쌍한 엄마는 너희들이랑 떨어져 있으니까 갑갑한 모양이야.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네 엄마는 우리한텐 부담스럽구나! 
네 삼촌이 언제까지나 네 가족들을 먹여살릴 수는 없잖니?"
바티스트 삼촌이 입 속에 음식물을 잔뜩 집어넣은 채 볼멘소리로 말했다.
  "사실 난 온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지...."
  '온 가족을 먹여살린다'는 그 말이 무척 맘에 드는지 
삼촌은 점잖은 표정으로 여러 번이나 되풀이했다.
늙은이들끼리 먹는 식사가 으례 그렇듯 그날의 저녁식사는 꽤나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어머니는 음식에는 거의 손도 대지 않았고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면서 겨우 몇 마디 궁금한 말들을 물었다. 
숙모는 그러는 어머니를 감시하듯 살피고 있었다.
들으라는 듯이 숙모가 삼촌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 여동생은 아들을 만나니까 입맛이 없나 봐요! 
어제는 빵을 두 덩어리나 먹었는데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는군요."
그날 밤 나는 정말 당장이라도 사랑하는 불쌍한 어머니와 함께 떠나고 싶었다. 
인정머리 없고 삼촌과 숙모로부터 
어머니를 당장 모시고 자끄 형이 있는 파리로 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 자신도 운을 하늘에 맡기고 무작정 형을 찾아가는 마당에 
어머니를 모시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수중에 있는 얼마 되지 않은 돈으로는  내 여비도 빠듯했고, 
세 사람이 함께 살기엔 자끄 형의 침대가 너무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단 일분이라도 좋으니 어머니를 껴안고 
속시원히 모든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틈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삼촌과 숙모는 어머니와 단둘이서만 있도록 놔두질  않는 것이었다. 
저녁식사를 끝내자마자 삼촌은 스페인어 문법책에 색칠하는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고, 
숙모는 은그릇을 덜그럭거리며 설겆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계속 곁눈질하며 어머니와 나를 감시했다. 
어머니와 나는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물끄러미 쳐다보다 시간을 다 보내고 말았다.
드디어 떠날 시간이 되어 나는 바티스트 삼촌 집을 나섰다. 
내 마음은 너무도 서글프고 쓰라렸다. 
역으로 이어진 가수로 길에 내린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면서 
나는 앞으로는 남자답게 행동하며 
어서 빨리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