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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44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18. 07:57
 
 
꼬마 철학자44  - 알퐁스 도데  
 
   그립고 먼 추억의 겨울밤
   그날 밤 파리 시민들 중에는 저녁식탁에 둘러 앉아 
   "오늘 낮에 별 이상한 꼬마 녀석을 다 봤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을 것이다.
   긴 머리칼에 껑충하게 올라간 짧은 바지, 
해괴하게 생긴 고무장화, 푸른색 양말, 촌스런 깃털 장식, 
어린애에게는 도저히 보기 힘든 팔자걸음걸이 등의 그 볼상 사나운 내 모습은 
파리 사람들의 주목을 끌 정도로 괴상망칙했다.
마침 겨울이 끝나갈 무렵이어서 그날은 마치 봄날씨처럼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아주 포근했다. 
거리에는 완연한 봄기운이 돌고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밖으로 몰려 나와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쉴새없이 떠들면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때문에 
약간 얼이 빠진 나는 담장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어쩌다가 누구랑 부딪치기라도 하면 금세 얼굴이 빨개져서 
"죄송합니다!"라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래서 되도록 사람이 많은 가게 앞에선 걸음을 멈추지 않으려고 주의했고, 길을 묻지도 않았다. 
비록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기는 했지만 어쨌든 쉬지 않고 걸었다. 
사람들이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난 몹시 거북했다. 
어떤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다시 되돌아와서는 
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며 신기하다는 듯 웃기도 했다. 
한번은 어떤 부인네가 나를 가리키며 옆의 부인에게
 "저 사람 좀 봐"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나는 그만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더욱 나를 당황하게 했던 것은 경찰의 의심스러워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뿐만 아니라 거리 구석구석에서 그 빌어먹을 시선들이 소리없이 나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총알처럼 날아오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나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을 걷다 보니 가느다란 가로수들이 줄지어 서 있는 큰길에 다다르게 되었다. 
그곳에는 사람도 차도 무척 많았고 게다가 너무 시끄러워서 
나는 완전히 겁에 질린 채 우뚝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간담? 
집으로 어떻게 돌아간다지? 
내가 쌩 제르멩 종탑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면 사람들은 날 무시하겠지. 
부활절날 로마에서 왔다가 길을 잃어버린 거지처럼 보일지도 몰라.'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좀더 생각해 보려고 극장 포스터가 붙어 있는 안내판 앞에서 
마치 저녁에 어떤 연극을 볼까 망설이며 포스터를 보고 있는 사람 같은 자세로 잠시 서성거렸다. 
그 극장 포스터들은 아주 흥미진진해 보였지만 
쌩 제르멩 종탑으로 가는 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여차하면 통금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질 때까지 거기 그렇게 서 있어야 할 판이었다. 
그때 갑자기 내 옆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나만큼이나 놀란 표정으로 잽싸게 다가왔다.
 "이런! 세상에... 다니엘 너 지금 여기서  뭘 하는 거니?"
나는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 대답했다.
"보면 몰라? 산보하고 있잖아!"
자끄 형은 감탄하는 듯한 눈초리로 날 바라보았다.
"너 벌써 파리 사람이 다 됐구나?"
내심 나는 형을 만난 것이 너무너무 기뻐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옛날에 우리가 리용에 도착했을 때 우리를 마중 나오셨던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형의 팔에 매달리며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참 기쁘구나! 
후작님은 목이 잠겨 버리고 말았어. 몸짓을 보고 받아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니? 
그래서 난 내일까지 휴가를 얻게 된 거야. 그러니 우리 맘놓고 산보를 해보자꾸나...." 
자끄 형이 내 손을 잡아끌면서 말했다. 
우리는 팔짱을 꼭 끼고 파리 시내를 걷기 시작했다. 
우리가 그렇게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되었다.
형이 곁에 있어서 그런지 거리를 나다니는 게 두렵지 않았다. 
만약에 날 보고 비웃거나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만 안 두겠다고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나는 식민지 알제리에 주둔한 프랑스 보병처럼 잔뜩 위엄을 부려 근엄한 표정으로 으시대며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끄 형은 나를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드디어 형이 입을 열었다.
 "고무장화가 편하니?"
 "그럼!"
 "그래! 그렇겠지... 그렇지만 내가 부자가 되면 네가 밖에 신고 나다닐 만한 멋진 구두를 사줄께."
비록 자끄 형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악의가 있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말을 듣자 마자 나는 몹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밝은 햇살이 쨍쨍 내려쬐는 그 큰길에서 고무장화를 신은 내 자신이 
너무나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며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형이 멋진 구두를 사 준다면서 다정한 말로 위로했지만 난 당장 돌아가 버리고 싶었다.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벽난로 가에 앉아 우리는 처마 밑의 두 마리 참새모양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저녁 무렵에 누군가 문을 두드려 나가 보니 후작네 하인이 내 트렁크를 들고 서 있었다.
자끄 형이 트렁크를 받아들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말했다.
  "잘 됐다! 네 트렁크를 한번 열어 보기로 할까?"
자끄 형이 내 변변찮은 트렁크에서 이것저것 여러가지 잡동사니를 꺼내면서 
하나씩 하나씩 큰소리로 열거할 때는 
민망스러워 얼굴이 확 달아올랐지만 한편으론 재미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