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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42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15. 11:51
 
 
꼬마 철학자42  - 알퐁스 도데  
 
   슬픈 당나귀 자끄 3
   파리에 도착한 지 열흘쯤 지난 저녁이었어. 
   그날도 창피한 기분으로 쌩 귀욤므 가에서 돌아왔지. 
   그때만 해도 나는 쫓겨날 때까지 그곳을 찾아가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었거든. 
   그런데 그날 수위실에 짤막한 편지가 와 있는 거야. 
누구한테서 왔을 것 같니? 글쎄, 릴르 가의 그 무뚝뚝한 백작한테서 온 거였어. 
당장 자기 친구인 다끄빌 후작에게 찾아가 보라는 거야. 
후작이 비서를 한 명 구한다면서 말이야. 생각해 봐라. 내가 얼마나 기뻐했겠니! 
또한 내가 얼마나 많은 교훈을 얻었겠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그 차갑고 인정머리 없는 백작은 나한테 신경을 써줬는데 
반면에 그렇게 친절하던 공작은 아예 자기집 층계에서 나를 따돌리다니. 
미꾸 신부님의 대리인인 내가 푸른 옷을 걸친 무례한 하인들의 조롱거리가 된 거라구...
다니엘, 그게 바로 인생이야. 파리 같은 삭막한 도시일수록 인생에 대해선 빨리 터득하게 되지.
그 즉시 나는 다끄빌 후작 댁으로 달려갔지... 
그렇게 해서 나는 비쩍 마른 키 작은 후작을 만나게 되었단다. 
노인네답지 않게 그분은 벌처럼 민첩하고 쾌활한 성격이시더구나. 
참 희안한 양반이었지. 
갸름하고 창백한 귀족적인 얼굴에 머리칼은 칠흑처럼 검었는데 눈은 하나뿐이었어.
한쪽 눈은 아주 오래 전에 칼에 찔려 실명하고 말았다는 거야. 
하지만 하나 남은 눈이 너무나 강렬해서 아무도 후작을 애꾸눈이라고 무시할 수가 없었어. 
두 눈을 가진 사람보다 더 완벽하게 꿰뚫어볼 수 있기 때문이야.
그 자그마한 괴짜 노인 앞에 선 나는 이런저런 시시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어. 
그러자 그분은 내 말을 도중에 자르면서 이렇게 말하더구나.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두게. 난 그런 건 좋아하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구. 난 내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네. 
불행히도 일을 늦게 시작했고 난 이제 늙었기 때문에 더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어.
3년 동안 쉴새없이 일을 해야 겨우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올해 내 나이 일흔이야. 더군다나 다리도 편치 못해. 
하지만 정신은 말짱하니깐 앞으로 3년은 더 살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회고록도 끝낼 수 있을 거야. 내겐 허비할 시간이 단 일 분도 없다네. 
그런데도 전에 데리고 있던 내 비서 녀석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지. 
내가 매료될 정도로 무척 영리했던 녀석이야. 
그 녀석이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려고 했어.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아. 
한데 갑자기 오늘 아침 내게 찾아와서 
결혼식을 올려야 되니 이틀 동안 휴가를 달라고 그러질 않겠나 
글쎄. 나는 이틀 동안의 휴가는커녕 단 일 분도 줄 수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지. 
그랬더니 그 녀석은 '하지만 후작님...' 
어쩌고 하면서 한사코 내게 휴가를 달라고 매달리더군. 
나는 내 사전에는 '하지만 후작님...' 따위의 말은 없다고 대꾸해 주었지. 
그러면서 홧김에 이틀 동안 휴가를 가려거든 아예 영원히 휴가를 가라고 말했어. 
그랬더니 그 녀석은 '정 그러시다면 당장 그만두겠읍니다, 후작님'하고 나가 버리더군. 
그 녀석 뒤통수에 대고 잘 가라고 말해주었지. 
그렇게 해서 그 녀석이 그만두게 된 거야... 
자, 이제 그 녀석 대신 믿을 사람은 자네뿐이네. 
몇 가지 꼭 지켜 주어야 할 조건이 있어. 
우리 집에는 꼭 아침 8시까지는 와야 되네. 점심은 지참하도록 하게. 
정오까지 내가 부르는 걸 받아쓰고 정오가 되면 혼자 식사를 해야 하네. 
난 점심을 안 먹거든. 점심식사를 재빨리 끝내면 다시 일이 시작되네. 
내가 외출을 할 경우엔 자네도 날 수행해야 해. 연필과 종이를 들고 말이야. 
아무 데서나 언제라도 부를 수가 있으니까. 
마차를 타거나, 산보하거나, 공식적인 방문을 하거나 간에 
어디서라도 내 말을 받아써야 한단 말이야. 저녁식사는 나와 함께 드세. 
저녁식사가 끝나면 내가 낮에 불러 줬던 것을 읽어 확인을 해야 하네. 
나는 8시에는 잠자리에 드니까 자넨 다음 날까지는 자유일세. 
봉급은 저녁식사를 제공하고 월 백 프랑이야. 
대단한 액수라고는 할 수 없지만 3년 후에 회고록이 끝나면 그 대가로 아주 큰 선물을 주지.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결혼을 하지 말 것이며, 
부르는 것을 빨리빨리 받아써야 한다는 것일세. 부른대로 받아쓸 수 있나?'
 '그럼요!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해낼 수 있어요, 후작님!'
대답하면서 웃음이 나오려고 해서 혼났단다. 
평생 남이 부르는 것을 받아써야만 하는 내 가혹한 운명이 너무도 우습게 생각되었어.
그러자 후작이 다시 말했어.
 '음, 그렇다면 가기 앉게. 여기 종이와 잉크가 있네. 
지금 당장 일을 시작하도록 하세. 24장을 부르지. 
제목은 '드 비렐르 씨와의 분쟁'일세. 쓰도록 하게.'
그는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지친 매미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읖조리기 시작했단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괴짜 양반 집에 들어가게 되었지. 
알고 보니 그분은 참 좋은 분이더라. 지금까지는 서로 아주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어제 저녁에 네가 도착한다는 것을 안 그분은 네게 주라고 오래된 포도주 한 병을 주시더구나. 
나는 그런 고급 포도주를 매일 저녁식사 때마다 마신단다. 
나는 늘 점심식사를 준비해 가지고 가는데 문장이 새겨진 식탁에 
세련된 무스띠에르 접시를 놓고 그 위에 2쑤우짜리 싸구려 이태리제 치즈를 담아서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넌 웃지 않을 수가 없을 거야. 
후작님이 점심을 싸오라고 하시는 건 그분이 인색해서가 아니라 
늙은 요리사 밸로아 씨가 내 점심을 준비하는 수고를 덜어 주기 위해서야... 
지금 내 생활은 나쁘지는 않아. 난 아주 만족스러워. 
후작님의 회고록은 매우 교훈적이야. 
언젠가는 내게 도움이 될 드 까즈 씨나 드 비렐르 씨에 관한 많은 지식을 배우고 있단다. 
밤 8시가 되면 그때부턴 자유야. 
도서실로 신문을 읽으러 가거나 아니면 친구 삐에로뜨 씨에게 놀러 가기도 해...
너, 삐에로뜨 씨 생각나니? 알겠지? 
어머니의 소꼽동무였던 세벤느 지방의 삐에로뜨가 아니야. 
지금은 점잖게 삐에로뜨 씨라고 불리지. 그는 아주 유명한 도자기 가게를 갖고 있단다. 
그는 우리 엄마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아무때라도 그 집에 드나들 수가 있었단다. 
이렇게 추운 겨울 밤에는 
그가 내 말동무가 돼가지고 외롭고 실의에 찬 나를 많이 위로해 주었어... 
하지만 이제는 네가 왔으니 겨울 밤을 어떻게 보낼까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됐구나... 
너도 그렇지, 안 그러니, 아우야? 
오! 다니엘, 난 정말 기분이 흡족해! 우린 정말 행복하게 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