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43 - 알퐁스 도데
쌩 제르멩의 종소리
자끄 형의 얘기가 다 끝나고 이제 내가 얘기할 차례가 되었다.
사그라드는 벽난로 불이 마치 '이제 그만 자야지'하고 손짓하는 듯이 보였고,
촛불은 '이제 제발 좀 자라! 이러다간 촛대 받침대까지 타고 말겠어'
라고 고함을 지르는 듯이 보였으나 우린 개의치 않았다.
우리들의 이야기는 밤을 꼬박 새워도 모자랄 정도로 넘쳐 흘렀다.
싸르랑드 중학교에선 보낸 암울하고 서글픈 생활에 대한 내 얘기는
자끄 형을 솔깃하게 만들었다.
자끄 형은 팔꿈치를 식탁 위에 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선
내 얘기가 끝날 때까지 한번도 끼어들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사납고 비열한 망나니들과 박해와 증오, 멸시와 모욕,
늘 화난 사람처럼 열쇠를 흔들어 대던 비오 씨,
소름이 끼칠 정도로 끔찍한 쨍그렁! 쨍그렁! 쨍그렁!,
숨이 막힐 정도로 비좁은 지붕 밑 고미다락방, 눈물로 지새웠던 밤들...
바르베뜨 까페에서 하사관들과 마셔 댄 압셍뜨 술, 폭주와 빚으로 나날이 타락해 가던 생활,
그 끔찍한 생활속에서도 한 줄기 빛이 되어 준 제르만느 신부님,
"자넨 평생 어린애로 남아 있을 걸세"라던 신부님의 충고...
난 그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자끄 형에게 들려 주었다.
성품이 착한 자끄 형은 중간중간 몸을 부르르 떨면서 안타까와했다.
"불쌍한 것, 불쌍한 것."
그러고는 내 얘기가 다 끝나자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르만느 신부님 말이 맞아. 다니엘, 넌 아직 어린애야.
혼자 힘으로 내 인생을 개척하기엔 넌 너무 어려.
내 보호를 받으며 이곳에서 생활하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야.
오늘부터 난 네 형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도 해야 되고
어머니의 역할도 대신해야겠구나. 어때 괜찮겠지? 말해 봐, 다니엘!
내가 엄마 역할을 한다고 해도 널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귀찮게 하진 않을 거야.
다만 나는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네 인생 행로를 따라 걸으면서
네 손을 잡고 이끌어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그렇게 해야만 너도 다른 애들처럼 안심하고
건전한 사고방식을 가진 어른으로서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래야만 인생에서 패배하지 않고 승자가 될 수 있지. 그렇지 않을까?"
나는 형의 목에 매달리며 울먹였다.
"아, 자끄 형. 형은 정말 내게 엄마와 같은 존재야!"
나는 옛날 리용 시절의 자끄 형처럼 뜨거운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제 자끄 형은 더이상 울지 않았다.
형 말대로 형의 눈물샘은 다 말라 바닥이 난 모양이었다.
이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형은 절대 울지 않을 것이다.
그때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 왔다. 동창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왔다.
희미한 햇살이 수줍은 듯 흔들리며 방안으로 스며 들어왔다.
"날이 밝았구나. 이제 좀 자거라... 빨리 자리에 누우렴... 넌 잠을 자야 해."
"그럼 형은?"
"아, 난 너처럼 이틀 동안이나 기차 안에서 시달리지 않았잖니?
게다가 후작님 댁에 가기 전에 도서실에 들려 책도 몇 권 반납해야 되거든.
늑장부릴 시간이 없어. 다끄빌 후작님은 농담을 하지 않으셔.. 이따가 저녁 8시에 돌아올께..
푹 쉬고 밖에 거리구경하러 나가도 좋아. 너한테 충고할 게 있는데...."
자끄 형은 마치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나 같은 시골뜨기에겐 대단히 중요한
여러가지 충고들을 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침대에 누워 아직 잠들진 않았지만
벌써 정신이 가물가물 흐려지며 비몽사몽 헤매기 시작했다.
피로와 눈물, 허겁지겁 허기를 채운 파이...
이젠 완전히 긴장이 풀리고 점점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근처의 레스토랑과 내 조끼 호주머니 속에 돈을 넣어 두었다는 것과
거기선 그 다리를 건너야 하고, 그 길을 쭉 따라 올라가고,
혹시 잘 모르면 순경들에게 물어 보고,
돌아올 땐 꼭 쌩 제르멩 종탑을 찾아야 한다는 것 등등 형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반쯤은 잠든 상태에서도 특히 내게 와 박히는 말 한마디는 쌩 제르멩 종탑에 대한 것이었다.
마치 도로 푯말과 같이 일렬로 늘어선
두개, 다섯 개, 열 개의 쌩 제르멩 종탑이 내 침대 주위에 우뚝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형이 그 종탑들 사이로 왔다갔다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형은 불을 들쑤셔 일으키고, 십자형 무늬의 커튼을 쳐서 아침햇살을 가려 주었다.
그러고는 내게 다가와서 발에다가 외투를 덮어 주고,
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문을 닫고는 조용히 나갔다.
얼마를 잤는지 언뜻 잠에서 깨어났다가 자끄 형이 돌아올 때까진
계속 잠을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울리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그만 잠이 싹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싸르랑드 중학교의 종소리, 시도때도 없이 울려 대던 그 끔찍한 쇠 종소리였다.
"땡! 땡! 빨리 일어나! 땡! 땡! 빨리 옷을 입어!"
후다닥 뛰쳐 일어난 나는 방 한가운데 우뚝 서서
기숙사에서처럼 입을 벌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 어서 서둘러라!"
잠시 후 정신이 든 나는 자끄 형의 방이라는 걸 깨닫고 기쁨에 겨워
껄껄 웃음을 터뜨리고 미친 듯이 이리저리 깡총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싸르랑드의 종소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그곳의 종만큼이나 무자비하고 메마른 소리를 내는 근처 공장의 종소리였다.
하지만 싸르랑드 중학교의 종소리는 더 심술궂고 혹독했었다.
다행히도 그 종은 8천 킬로나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 종이 아무리 크게 울려 댄다 해도 그 소린 이제 더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앙상한 가지를 드리운 나무들이 우울하게 서 있는
상급반 운동장과 벽에 바싹 붙어 걸어가는 비오 씨를 보게 되리라는 상상을 하며
창문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창문을 열었다.
바로 그때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 왔다.
거대한 쌩 제르멩 종탑에서는 매일 아침, 낮, 저녁에 한 번씩
예수강림을 기념하기 위해 올리는 삼종기도를 알리기 위해
종소리가 열두 번 연속적으로 울렸다.
그 무겁고 장중한 소리는 열려진 창문을 통해 들어와서는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듯 온 방안에 하나씩 내려앉았다.
쌩 제르멩 종탑의 삼종기도 종소리에 답하듯
파리의 다른 구역의 종들도 장엄하게 울려 댔다.
파리는 아직 제 모습을 속속들이 들어내지 않은 채 마치 포효하는 한 마리의 맹수 같았다.
나는 잠시 창가에 서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둥근 지붕과 종루 그리고 종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도시의 소음이 갑자기 커지면서 내게로 올라왔다.
나는 그 소음 속에, 군중 속에, 삶 속에, 열정 속에 빠져들어 뒹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고는 마치 술에 취한 듯 중얼거렸다.
"자! 파리를 만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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