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을 위한 ━━/세계문학

꼬마 철학자51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25. 10:34
 
 
꼬마 철학자51  - 알퐁스 도데  
 
  엄마의 소꼽동무 3.
  더이상 그의 말을 듣지도 않고 자끄 형은 내 팔을 잡고 
  플루트소리가 들려 오는 안쪽으로 끌고 갔다. 
  삐에로뜨 씨의 가게는 꽤 넓었고 시설도 잘 돼 있었다. 
어둠 속으로 불룩한 물병과 오팔 빛의 구형 유리 덮게, 
보헤미아산 담홍색 술잔, 커다란 크리스탈 술잔, 오목한 스프 그릇, 
양 옆으로 천정에 닿을 정도로 쌓아 놓은 접시들이 반짝거렸다. 
그것은 마치 도자기 요정의 궁전 같아 보였다. 
가게 뒷방의 반쯤 열린 문 틈으로 가스등의 불빛이 끄물끄물 흘러나왔다. 
방안에서 금발의 키큰 청년 하나가 침대 겸용인 긴 소파에 앉아 구슬프게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었다. 
자끄 형이 그 방 앞을 지나치면서 냉랭한 목소리로 "안녕하쇼"라고 인사를 하자 
금발 청년도 아주 냉랭하게 플루트를 두 번 불어서 대답했다. 
마치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계단을 올라가면서 형이 나직이 속삭였다.
"여기서 일하는 점원이야... 그 키큰 금발 녀석은 언제나 플루트를 불어서 우릴 못살게 굴지... 
너는 저 플루트소리가 좋니, 다니엘?"
나는 '이 집 딸도 그 소리를 좋아해?'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형을 괴롭히기는 싫었기 때문에 아주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아냐, 자끄 형, 난 플루트소리를 좋아하지 않아."
삐에로뜨 씨의 아파트는 가게 건물의 오층에 있었다. 
무척 품위가 있고 교양이 넘치는 까미유는 가게에는 내려오지 않고 
항상 아파트에서만 생활하면서 식사때나 아버지를 본다고 했다.
 "야, 좋지? 이건 굉장한 집이야. 그리고 까미유 곁에는 말이야 트리부 부인이 항상 붙어 있지. 
그녀는 과부인데 어디서 왔는지는 잘 몰라도 삐에로뜨 씨가 그 부인을 아주 잘 봤기 때문에 
까미유를 보살펴 달라고 부탁했어... 다니엘, 다 왔어! 벨을 눌러."
나는 벨을 눌렀다. 
커다란 실내모를 쓴 세벤느 지방 여자가 문을 열었다. 
그녀는 오랜 친구라도 되는 듯 형에게 미소를 짓고는 우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삐에로뜨 양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한쪽에선 좀 뚱뚱한 라루트 부인과 트리부 부인이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끄 형이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를 소개하자 모두들 따뜻한 인삿말을 하며 우리를 반겼다. 
자끄 형은 삐에로뜨 양을 그냥 까미유라고 불렀는데 
계속 피아노를 연주할 수 없겠냐며 정중하게 부탁했다. 
트리부 부인과  라루트 부인은 다시 카드놀이를 계속했고 자끄 형과 나는 삐에로뜨 양의 양켠에 섰다. 
그녀는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면서 계속 우리랑 얘기하며 웃어 댔다.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동안 내내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지만 흰살결에 작은 귀, 장미빛 머리는 꽤 아름다왔다. 
그녀의 머리결은 비단처럼 부드럽게 윤기가 흘렀다. 
그러나 뺨이 너무 통통하여 지나치게 건강해 보였다. 
또한 손은 불그스레했고, 방학을 맞은 기숙생처럼 약간 거만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쏘몽 가에 자리잡은 우아한 아파트에서 자라난 한 송이 꽃, 삐에로뜨 양의 모습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의 첫인상은 그저 그랬다. 
그런데 내가 한마디하자 그녀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살며시 치켜뜨며 나를 바라본 순간 
갑자기 마술이라도 걸린 것처럼 속물 같은 모습의 평범한 삐에로뜨 양은 사라지고 
그녀의 두 눈, 그 눈부신 커다란 두 눈밖에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눈을 즉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싸르랑드 중학교의 벽 속에 갇혀 있던 나를 바라보며 반짝이던 검은 눈동자, 
안경잡이 마귀할멈에게 붙잡혀 있던 바로 그 검은 눈동자였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나는 마구 소리치고 싶었다.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 바로 당신인가요? 
다른 얼굴을 한 당신을 내가 만난 것인가요?"
너무도 곡 닮은 눈동자였다. 
착각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똑같았다. 
똑같은 눈썹, 똑같은 눈빛,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똑같은 광채... 
이 세상에 그렇게도 똑같은 눈을 가진 사람이 둘씩이나 있다고는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단지 옛날의 그 검은 눈동자의 겉모습만 닮은 다른 또하나의 눈이 아니라 
바로 그 검은 눈동자였다. 
검은 눈동자 역시 나를 알아 보고는 옛날의 그 무언의 아름다운 대화를 다시 시작하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생쥐가 뭔가를 갉아 먹는 듯 이빨을 가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기이하게 느껴 돌아보니 뜻밖에도 피아노 옆 한켠에 놓인 소파에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창백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머리는 새머리만큼 작았고, 이마는 벗겨지고, 코는 뾰족하며, 
동그랗고 흐리멍텅한 두 눈은 사이가 무척 떨어져 있어 거의 관자놀이에 붙어 있었다. 
각설탕을 이따금씩 갉아 먹고 있었는데 
그러지만 않았더라면 영락없이 잠들어 있는 줄로 착각할 판이었다. 
그 모습에 약간 당황하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늙은 유령에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 노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끄 형이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널 보지 못하셔... 눈이 머셨거든... 라루트 영감이셔...."
 '그야말로 이름대로군.'
그렇게 생각하며 새처럼 작은 머리를 가진 그 끔찍한 노인을 보지 않으려고 
잽싸게 피아노 족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마술은 풀려 버렸고, 
피아노 걸상엔 평범한 아가씨만이 앉아 있을 뿐 검은 눈동자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때 응접실 문이 열리면서 삐에로뜨 씨가 요란스럽게 들어왔다. 
아까 본 금발 청년도 겨드랑이에 플루트를 낀 채 뒤따라 들어섰다. 
그 청년을 본 자끄 형은 마치 불타는 적개심을 품은 듯한 경계의 눈초리를 그에게 던졌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플루트 주자는 태연을 떨며 서 있었다.
삐에로뜨 씨가 자기 딸의 뺨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음, 얘야, 기분은 좀 어떻니? 그렇게도 고대하던 다니엘이 오니 반갑지? 
다니엘은 아주 얌전하지?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에세뜨 부인을 꼭 빼닮았단다."
그러고 나서 나를 억지로 응접실 한가운데로 데려가더니 내 눈과 코와 움푹 패인 턱을 가리키며 
우리 어머니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몹시 거북했다. 
카드놀이를 그만둔 라루트 부인과 트리부 부인은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조목조목 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마치 팔기 위해 시장에 내다 놓은 영계에서 내뱉듯 큰소리로 
내 생긴 모습의 이모저모를 내려깎거나 칭찬하는 것이었다. 
그 트리부 부인은 영계에 대해서는 아주 많이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