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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철학자52 - 알퐁스 도데

Joyfule 2012. 6. 26. 12:21
 
 
꼬마 철학자52  - 알퐁스 도데  
 
 엄마의 소꼽동무 4.
 다행히도 자끄 형이 삐에로뜨 양에게 
 우릴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한 덕분에 나의 형벌은 끝이 났다. 
 그러자 그 금발 청년이 앞으로 나서며 힘차게 말했다.
  "그래요, 뭘 좀 연주해 보죠."
 놀란 자끄 형이 소리쳤다.
 "아녜요... 아냐... 듀엣은 필요없어요! 플루트는 안 불어도 돼요!"
금발 청년이 마치 카리브인의 화살처럼 독기가 서린 새파란 눈초리로 형을 쏘아봤다. 
하지만 형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계속 소리쳤다.
  "플루트는 연주할 필요 없어요!"
결국 형이 이겼다. 그래서 삐에로뜨 양이 혼자서 아주 유명한
 '로젤린의 꿈'이라는 이태리 풍의 트레몰로 곡을 우리들에게 들려 주었다. 
그녀가 연주를 하는 동안 삐에로뜨 씨는 감동에 겨워 울고 있었고, 
자끄 형은 황홀경에 헤매고 있었다. 
그 금발 청년은 플루트를 입에 물고 있을 뿐 소리를 내지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속으로 플루트를 부는 듯했다.
'로젤린의 꿈'을 끝낸 삐에로뜨 양이 내게로 몸을 돌리고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다니엘 씨, 시 하나 읊어 주시지 않겠어요? 당신은 시인이시라고 하던데...."
 "훌륭한 시인이죠."
자끄 형이 그만 경솔하게 이렇게 말해 버렸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시를 읊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거기 있었다면 혹시 사정이 달랐을지 모르지만 
검은 눈동자는 이미 한 시간 전에 사라져 버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꺼리낌없이 삐에로뜨 양에게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아가씨, 유감스럽게도 오늘 저녁에는 제 칠현금을 가지고 오지 않았군요."
 "다음에는 꼭 칠현금을 가지고 와야 하네."
그 착한 삐에로뜨 씨는 은유적인 표현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렇게 말했다. 
그는 내가 진짜 칠현금을 가지고 있어서 그 금발 청년이 플루트를 연주하듯이 
나도 그 칠현금을 연주하는 걸로 믿고 있었다. 
자끄 형이 여기 오기 전에 이 기괴한 세계에 대해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11시쯤 차가 나왔다. 
삐에로뜨 양이 응접실을 왔다갔다하면서 설탕과 우유를 부어 주었다. 
그녀가 내 앞으로 온 순간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환한 빛을 발하며 그 귀여운 모습을 갑자기 나타냈다가는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자취를 감추고 마는 것이었다.... 
그때서야 나는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삐에로뜨 양에게 아주 뚜렷이 구분되는 이중적인 모습이 내재해 있는 것 같았다. 
머리를 두 갈래로 땋아 내리고 유서깊은 라루트 상회에서 뻐기고 있는 
아담한 몸매의 평범한 처녀의 모습이 그 하나였다. 
또하나는 익살스런 철물장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잠시 빌로드 빛의 두 송이 꽃처럼 되었다가 
금세 사라져 버리는 시적인 커다란 검은 눈동자의 그녀의 모습이었다. 
나는 삐에로뜨 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그 검은 눈동자만은....
밤이 꽤 깊어 가고 있었다. 
라루트 부인이 커다란 격자 무늬 모직 쇼올을 덮어서 마치 
붕대 감은 미이라처럼 보이는 라루트 영감을 부축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일어서서 작별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삐에로뜨 씨가 층계참에 우리를 세워 두고는 
또다시 그 끊임없는 사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 다니엘! 이젠 이 집을 혼자서도 찾아올 수 있겠지? 앞으로 친하게 지냈으면 하네. 
난 상류사회 사람들은 전혀 모르지만 좀 특별난 사람들은 몇 알고 있지...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우선 주인 양반 라루트 부부가 계시고, 
그 다음에는 본받을 점이 많은 트리부 부인... 트리부 부인과 대화가 잘 통할 거야. 
그리고 이따금씩 우리들에게 플루트 연주를 들려 주는 가게 점원과... 
이런 경우에 꼭 들어 맞는 말인데... 자네가 그와 듀엣으로 연주를 한번 해보면 참 멋있을 거네...."
나는 내가 너무 할 일이 많아서 그러고는 싶지만 
그리 자주 올 수는 없을 것 같다고 머뭇거리며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바쁘단 말이지? 다니엘... 
나는 두 사람이 라땡 구역에서 무슨 일을 하느라 바쁜가를 잘 알고 있네...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그곳에서는 젊은 처녀들 몇 명쯤 친하게 사귀는 게 다반사라며...."
역시 웃으며 자끄 형이 대꾸했다.
  "사실 꾸꾸블랑 양은... 매력이 없지도 않거든요."
꾸꾸블랑이라는 말을 듣자 삐에로뜨 씨는 더욱더 요란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자끄? 꾸꾸블랑이라구? 이름이 꾸꾸블랑이란 말인가? 
허허허, 음탕한 사람 같으니라구... 그 나이에...."
그는 자기 딸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걸 알고는 말을 멈췄다. 
하지만 우리가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까지도 그는 
계단 난간이 흔들거릴 정도로 폭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집을 나서자 마자 자끄 형은 내게 물었다.
  "저 사람들 어때?"
  "라루트 씨는 불쾌한 인상이지만 삐에로뜨 양은 매력적이야."
  "정말?"
사랑에 빠진 우리 불쌍한 형이 너무도 쾌활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끄 형! 형은 본심을 드러내고 있군."
그날 밤늦게까지 우리는 강변을 산책했다. 
발 밑으로는 시커먼 강물이 마치 아름다운 은하수처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커다란 배에서 닻줄을 내리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 왔다. 
어둠 속을 여유있게 거닐며 자끄 형의 사랑 얘기를 듣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형은 사랑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상대방은 형을 사랑하지 않았다. 형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형, 그 아가씬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몰라."
  "아니야, 다니엘.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어."
  "오늘 저녁까지만 해도? 형,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제기랄, 사람들은 모두들 다니엘 너를 좋아해... 그녀도 역시 널 좋아하는지 모르고."
불쌍한 자끄 형은 그 말을 하면서 체념한 듯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형을 위로하기 위해서 나는 큰소리로, 점점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러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형도 참!... 내가 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되거나 삐에로뜨 양이 쉽게 달아오를지도 몰라... 
하지만 형, 안심해! 삐에로뜨 양은 지금 이렇게 내가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듯 
내 마음으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어. 그런 걱정은 안해도 돼, 형."
나는 삐에로뜨 양에게 전혀 관심이 없노라고 진지한 태도로 형에게 말해 주었다. 
검은 눈동자의 그녀라면 다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