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철학자54 - 알퐁스 도데
붉은 장미와 검은 눈동자 2.
가게 안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한구석에는 금발청년이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었다.
옆에는 플루트가 놓여 있었다.
나는 계단을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저 떠돌이 청년과 우리 자끄 형을 놓고 까미유가 저울질을 하다니 그럴 리가 없어...
어쨌든 가 보면 알겠지....'
삐에로뜨 씨는 딸과 트리부 부인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 삐에로뜨 양이 거기에 다소곳이 앉아 있을 뿐 내 검은 눈동자는 없었다.
내가 들어서자 그들은 의외라는 듯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삐에로뜨 씨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드디어 오셨군! 이런 경우에 꼭 들어맞는 말인데... 우리와 함께 커피 한 잔 하지."
트리부 부인은 금색 꽃무늬가 있는 멋진 찻잔을 내게 갖다 주겠다며 잠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삐에로뜨 양 곁에 앉았다.
그날따라 그녀는 꽤 예뻐 보였다.
그녀는 자그마한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꽂고 있었다.
그 장미를 보자 난 또 마술에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속물 같은 그녀는 단지 붉은 장미 때문에 무척이나 아름다와 보이는 것이었다.
삐에로뜨 씨가 예의 그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다니엘, 그동안 한번도 찾아 주질 않다니!"
나는 시를 쓰느라 좀 바빴다고 변명했다.
"암, 알지. 라땡 구역엔...."
다 안다는 듯 잔기침을 해대는 트리부 부인을 바라보며
그는 더욱 요란하게 웃어 대기 시작하더니 탁자 밑으로 내 발을 툭툭 차는 것이었다.
선량한 그 사람들은 '라땡 구역'하면
폭음과 바이올린, 가면, 소란스러움, 깨진 항아리, 광란의 밤만을 연상하는 모양이었다.
만일 내가 쌩 제르멩 종탑 옆 건물의 고미다락방에서
수도사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얘기해 준다면 그들은 펄쩍 뛰며 거짓말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젊은 나이엔 방탕하고 끼 있는 젊은이로 취급받는다 해도 별로 화가 나지 않는 법이다.
삐에로뜨 씨가 지레 짐작으로 엉뚱한 비난을 해도
나는 얌전한 표정을 지으며 지나가는 말투로 한두 마디 했을 뿐이었다.
"아녜요! 아닙니다! 정말이예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아마 자끄 형이 내 그런 모습을 봤더라면 신나게 웃었을 것이다.
차를 마시고 났을 때 아래층에서 플루트소리가 들려 왔다.
삐에로뜨 씨는 가게에 찾는 사람이 있어서 내려갔고,
트리부 부인도 요리사와 카드놀이를 한다고 부엌으로 가버렸다.
그 부인의 유일한 장기는 카드를 아주 능란하게 다룬다는 것이었다.
그 자그마한 붉은 장미를 꽂은 그녀와 단둘이 남게 된 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이때다!'
내 입안에서는 벌써 자끄라는 이름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삐에로뜨 양은 내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갑자기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을 여기 못 오게 한 사람이 꾸꾸블랑인가요?"
처음에 나는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두 뺨이 연분홍으로 점점 물들고 그녀의 얇은 조끼가 들썩이는 걸 보니 꽤나 흥분된 듯이 보였다.
아마도 누군가가 꾸꾸블랑 얘기를 하자 그녀는 제멋대로 사태를 짐작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단 한마디로 그녀의 오해를 풀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어떤 어리석은 자만심이 솟아올라 그만두었다.
내가 아무 대꾸도 없이 잠자코 있자
그녀는 내게로 돌아서더니 내리깔고 있던 눈을 치켜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또다시 일어났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삐에로뜨양이 아니었다.
눈물에 젖은 채 부드럽게 비난하는 빛을 담은 그 옛날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사랑스럽던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 내 영혼에 환희를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환상일 뿐이었다.
그 기다란 속눈썹을 내리깔자 금방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사라져 버렸다.
내 옆에는 삐에로뜨 양의 얌전한 모습만이 남아 있었다.
또다시 환상의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나타날까 두려워진 나는
자끄 형 얘기를 정신없이 지껄이기 시작했다.
우선 나는 형이 얼마나 착하고, 성실하며, 용감하고, 관대한가를 얘기했다.
그리고 형의 헌신적인 사랑과 늘 깨어 있는 모성,
우리 어머니가 질투할 만큼 내게 쏟은 깊은 애정까지도 주절댔다.
나를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는 것은 자끄 형이라는 사실도 말했다.
형이 나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얼마나 검소한 생활을 하는지도 낱낱이 얘기해 주었다.
형이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싸르랑드의 그 우울한 감옥에 갇힌 채
끝없이 고통받고 있을 거라는 얘기도...
내 길고 긴 연설이 그쯤에 이르자 삐에로뜨 양은 깊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눈물이 자끄 형에 대한 연민을 의미한다고 믿고는 내심 몹시 기뻤다.
'자! 일이 잘 돼 가는구나!'
그래서 나는 목청을 돋구어 더욱 열을 내며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헤어날 길 없는 고독과 가슴을 바짝바짝 타게 만드는 그 깊고 신비로운 형의 사랑에 대해 말했다.
나는 형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녀가 몹시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삐에로뜨 양의 머리에 꽂혀 있던
그 자그마한 붉은 장미가 미끄러져 내리더니 내 발 밑으로 떨어졌다.
그때 나는 자끄 형이 반한 그 행복한 여자가 바로
그녀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킬 만한 기발난 수단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발 밑에 떨어진 장미를 보자 그 방법이 떠올랐다.
천천히 그걸 주워든 나는 가장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이 장미는 자끄 형을 위한 것이로군요."
그러자 삐에로뜨 양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원하신다면 자끄에게 드리세요."
바로 그 순간, 검은 눈동자의 그녀가 나타나더니 다정하고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아녜요! 그건 자끄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 거란 말예요!'
뿌리치기 힘든 순진함과 정숙함을 가득 담은 검은 눈동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때까지도 머뭇거리며 아무 대답이 없자
검은 눈동자의 그녀는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 장미는 당신을 위한 거예요!... 당신을 위한 거란 말예요!'
나는 흘린 듯 그 자그마한 빨강 장미에 입을 맞추고 천천히 가슴에 꽂았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자끄 형이 평소처럼 책상에 엎드려 시를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내가 그날 하루도 꼼짝 않고 방안에만 있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웃도리를 벗을 때
속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붉은 장미가 침대 발치에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 장미에 마술을 건 요정은 악의에 가득 차 있는 게 분명했다.
장미를 본 자끄 형은 그걸 주워들더니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내 얼굴은 난로불처럼 화끈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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