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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감별사 보험모집인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Joyfule 2023. 3. 24. 09:25





인간감별사 보험모집인 - 엄상익 변호사 에세이  



삼십육년전 처음 변호사를 시작할 때 힘이 들었다. 난 매일같이 모멸과 굴욕감에 시달렸다. 팔자 편한 소리라고 치부하는 사람이 있어도 고통이란 주관적이다. 사람들은 변호사를 판사에게 뇌물을 주는 통로쯤으로 인식했다. 판사실 앞에는 청탁을 하기 위해 변호사들이 줄을 서 있었다. 거기에 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무성의한 변호사로 간주 되었다. 겉으로는 변호사지만 나는 외판사원이나 보험모집인과 다르지 않은 굴욕감과 모멸감을 맛보았다.

내가 고통을 받아보니까 남의 고통도 알 것 같았다. 우연히 내가 좋아 했던 친구가 보험모집원으로 일한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물론 당당한 직업이다. 그 세계에서 높은 수입을 올리고 인정도 받는다. 그러나 일을 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모멸감과 굴욕감은 변호사와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보험모집인은 당당한 직업이지만 우리 세대는 중학 일차시험에 떨어지고 간 이차학교 같은 사회적인 인식도 남아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보험을 들어 위로해 주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문제는 동정으로 내가 보험을 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험에 들어야 할 절실할 필요성을 구상해 보았다. 그와 함께 식사할 자리를 자연스럽게 만들고 보험얘기도 먼저 꺼냈다. 그리고 바로 계약을 했다. 


그렇게 하면서 과거의 기억 하나가 삽화처럼 떠올랐다. 대학 일학년 무렵 아르바이트로 책 외판원을 해 본 적이 있다. 평생 잊혀지지 않는 고마운 여성고객이 있다. 그녀는 재수생이라고 하면서 니체의 철학책 한권을 사 주었다. 그녀가 필요한 책이 아니었다. 내가 발품을 들여 찾아간 게 안되서 사준 것 같았다. 그때 느꼈던 감사한 마음이 오십년이 넘은 지금도 남아있다. 

얼마전 유튜브에서 세시봉 출신 국민가수들의 무대를 보았다. 대가수들의 부인을 소개하는 속에 그녀가 있는 것 같았다. 인연이 닿으면 그 가수 부부에게 뭐라도 보답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기회가 오면 작은 선이라도 행해 두어야 하는 걸 배운 셈이라고 할까. 상대방의 마음에 담긴 고마운 마음은 오래간다.

친구의 부인이 나의 법률사무소로 보험상품을 팔어 온 적이 있었다. 그녀가 받을 보험판매 수당의 금액을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해 보고 그에 해당하는 보험을 들었다. 그리고 두 달만에 해약했다. 보험회사 담당자가 원금의 손실을 가리키면서 “그 돈은 모집인의 수당으로 가는 거 아시죠?”라고 확인시켜 주었다. 

세상에는 드라마 보다 더한 반전스토리도 있다. 보험상품을 가지고 왔던 친구 부인이 여류사업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매년 수백억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의 씨이오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때마다 일류호텔의 고급레스트랑에 우리부부를 초청해 식사를 냈다. 와인잔을 부딪치며 이태리 요리를 얻어 먹었다. 수시로 선물도 받았다. 나는 사고 팔고 따지는 비즈니스의 세계보다 정을 주고 받는 인간의 관계를 추구하고 싶었다. 


얼마 전 고교동기인 친구가 내가 묵는 실버타운을 찾아왔다.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었지만 잘 몰랐다. 그는 재벌그룹인 대기업의 임원이었다. 변호사로 소송을 대리하는 과정에서 그가 투쟁의 상대방이었다. 나는 그를 약한 업자를 짓밟는 재벌의 앞잡이로 생각했다. 그는 나를 도둑놈을 비호하는 악덕변호사로 보았다. 그러다 화해를 했다. 다른 동창이 그에게 나를 변호해 준 것 같았다. 그러다 그가 좋아진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동창회에서 만난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룹의 사장급 자리를 놓고 경쟁을 하다가 회사를 나와버렸어. 백수가 된 거지. 택시 운전을 시작했어. 하루 열시간 매연을 맡으면서 운전을 하니까 일이 끝나고 나면 머리가 빙빙 돌고 쓰러질 것 같더라구. 거기다 택시회사에서 잘리기까지 했어. 학벌이 너무 좋다는 거지. 중학교 졸업으로 속이려고 하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쇠와 쇠가 부딪치듯 자존심이 강한 동창집단이었다. 자신의 이면은 절대로들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모든 위선의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있었다.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보험모집으로 일을 바꾸었다. 그때 그를 통해 보험을 들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는 다음 직업으로 시민단체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내가 묵는 실버타운의 온천탕에 몸을 담그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중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보험모집원을 할 때 정말 여러 형태의 인간을 봤어. 제일 기분나쁜 건 보험을 들어주지 않으면서 온갖 모멸감이 드는 말을 하는 거야. 그 다음은 큰 보험을 들어주는 데도 나는 굴욕감이 드는 경우였지. 진짜 인격이 된 사람들은 이쪽의 마음을 배려하면서 보험을 들어주는 거야. 정말 감사한 경우지.”

그의 말 속에 산 진리가 들어있었다. 어려서부터 ‘역지사지’라고 해서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라고 배웠다. 

나는 친구의 말을 통해 입장뿐 아니라 상대방의 심정도 생각해 봐야 하는 걸 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