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로마서 10장에 들어가면서

Joyfule 2024. 3. 28. 20:51


    로마서 10장에 들어가면서



 롬8장까지는 죄인에 대한 구원론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는 주체는 생명의 성령이십니다(롬8:2)

한 마디로 생명의 성령에 의해 죄에서 해방이 됩니다.

(예수만 믿겠다고 야무지게 신앙을 굳힌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세요)

해방이라는 말은 벗어난다 또는 자유케 된다는 의미입니다.

죄에 얽매였던 자리에서 해방이 되어 자유를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 얽매는 것은 죄와 사망으로서 올무와 같이 얽어매고 죄여옵니다.

숨도 못 쉬도록 종노릇 하도록 하다 그 결과는 죄의 종에게 주어지는 삯인 사망입니다.

인간의 질병을 포함해서 총체적으로 불행하다는 정체감의 원흉이 바로 사망입니다.

이 사망은 흰 보좌 심판 이후에 불 못에 가는 그 쪽의 최상위의 존재입니다(계20:14)

 

죄의 종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욕심, 질병, 생활의 악습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면 상습적인 알콜 중독자나 담배를 즐기는 자들은 죄의 종들일 수 있습니다.

욥기를 해석하는 관점에서 그 사람이 생명의 성령의 사람인가 죄에 속해 있는가를 압니다.

그래서 욥의 경우처럼 죄의 구원은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구원도 될 수가 있습니다.

사실 욥은 땅의 의인에서 하늘적인 의인으로 도약을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롬7장은 구약의 욥기를 축약해 놓은 것과 같습니다(귀 있는 자는 듣겠지요?)

그런데 죄의 종류는 부정적인 요소도 있고 긍정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부정적인 요소는 인간이 보기에 악한 것이지만

반면에 긍정적인 요소는 욥과 같이 인간이 보기에 선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를 얻지 못한 사람은 욥과 요셉과 같아라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주관적인 선으로서 주관적인 신앙으로 열심을 가지고 있는 종교인이 많습니다.

지나친 국수주의적인 애국자, 인간이 가진 자비, 책임감, 의무, 소위 열사들과,

베푸는 일들, 사회적인 공헌, 윤리 도덕적인 사람들이 다 긍정적인 죄인들입니다.

 

 신앙은 무엇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언제든지 그것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죄이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싫어지고 그럴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비로소 죄를 이기는 겁니다.

주의 종들은 쟁기를 잡고 뒤 돌아 보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눅9:62)

과거에 잡히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왕자가 도박판에서 왕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나는 이제 도박하지 않는다고

말하고는 툴툴 털고 일어나듯 지금까지의 삶을 청산해 버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척도에 따라 상황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욕심과 자아가 처리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간혹 교제하는 주의 종들 가운데 아직 욕심이 처리되지 않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그리스도 안에서 징계를 받으면 제일 먼저 욕심을 버립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의 고난이나 질병이 징계라고 여기지 않는 욥과 같은 이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의 요소가 가득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소속이 바뀌고 자신을 주관하는 주관자가 바뀐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 그로 인해 삽니다.

진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원리이며 그 원리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의에 의해 성령이 역사하여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되고 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사실 법이란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을 조직하여 제도화한 것입니다.

이것을 거역하면 죄가 됩니다(하마르티야) 과녁을 빗나간 거지요.

법은 밖에서 우리를 제재하지만 원리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임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 원리가 되어 실제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표현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법은 내가 원치 않아도 의무로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만 원리는 그 자체가 바로 자신이 되기 때문에 서서히 그렇게 되어갑니다.

신령한 사람이란 이와 같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원리가 장착이 된 사람입니다.

넘어지고 자빠지고 거품을 물고 희한한 소리를 질러내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이 아닙니다.

죄와 의의 경계선을 알고 어둠과 빛, 사망과 생명의 삼팔선을 알고 이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의 다른 한 의(롬3:21)이며 이 땅에서는 치외법권의

원리입니다. 따라서 신령한 사람들은 이 원리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우리를 조급하게 하고 충동질 하여 염려나 근심이 나를 삼키게 합니다.

따라서 구원의 투구를 쓰고 생각관리를 아주 잘 해야 합니다(엡6:10)

왜냐하면 마음속에서 승리가 생활에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서 창조되지 않는 것은 생활 속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죄는 나의 자아와 욕심을 충동하여 행동하도록 합니다.

혼란이 오고,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다만 그게 좋겠다 하는 생각만 들뿐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감각을 충동질하고 분별력을 가립니다.

모든 것이 다 엉켜 버립니다. 이는 반드시 사고가 예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의 감각과 판단력을 뚜렷하게 합니다.

총명의 저울이 매우 예민하게 됩니다.

혼란한 상태와 정돈된 상태의 행동의 결과는 현격하다는 걸 우리는 잘 압니다.

예를 들면 혼란된 상태에서 차선을 위반하면 사고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나 정돈된 상태에서 다른 차와 충돌을 피해 차선을 위반했다면

사고 예방을 위해 필요한 현명한 조치가 됩니다.

이는 법을 어겨도 인명피해를 막았기 때문에 칭찬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내면의 원리는 자연스럽고 아름답고 편리합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주관하시는 새 언약입니다.

현실 속에 나타나는 구원이며 실제적인 그리스도의 역사이십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 교통법규가 필요 없듯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가므로 율법에 대해서는 치외법권의

소속이 된 것입니다. 다른 의이며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의가 됩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가 롬8장까지 계속이 되다가

9장부터는 구원이 개인으로 끝나서는 안 됨을 알게 합니다.

구원의 결과가 반드시 이웃을 향해 나타나야 합니다. 그의 나라는 복수로

된 단수입니다 그의 의는 하나님의 원리가 내 것이 될 때에 나의 의가 됩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도 나 때문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나로 인해 민족적, 세계적, 우주적인 구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모든 만물은 다 세계화 우주화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인간만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과 구원은 오직 인간에게만 필요한 것입니다.

지리산 철쭉을 한 번 보세요. 한 날 한 시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어우러져 피잖아요?

생명이란 하나님의 원리이며 에너지이고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예를 들면 태양계를 일정한 속도 간격 시간으로 돌리는 힘과 같습니다.

공전과 자전의 원리와 썰물 밀물의 원리, 해 달 지구 사이의 힘을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뉴턴은 우주전체가 하나님이 움직이는 하나의 기계와 같다고 말했겠지요?

아르키메데스는 물의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벌거벗고 물에 뛰어 들어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뉴턴의 만류인력도 이미 우주 속에 되어 있는 하나님의 원리를

발견한 것뿐입니다. 만물이 어떤 한계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되므로 원리라고 말을 합니다.

 

 죄를 가진 인간이 원리의 한계를 벗어나므로 법을 만들고 법도 지키지 못하면 감옥에

들어가야 하고 아니면 영원히 사회와 격리가 됩니다. 이와 같이 세상은 자꾸 좁아집니다.

그것은 법이 더 많아진다는 의미입니다. 지금 법을 계속 만들지만 사회는

더 혼란스럽습니다. 죄가 더욱 큰 소리를 치니(딤후3) 법을 계속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에게는 종말에 이를수록 구원이 더 절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예수 믿고 죄 사함’만 강조하다보면 죄 지은 것만

해결하려 하고 진정한 구원-원리적인 사람-의 말씀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거다 저거다 말마시고 반드시 주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인간은 잘 못되어 태어났기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重生 born again)

놀랍게도 이 거듭남에 대한 원리를 받아들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됩니다.

그건 예수를 믿는다 예수를 영접하라는 반쪽짜리 복음을 듣고 내가 믿는다

죄 사함 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등의 신념으로 나아가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 영접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당신 참 재주 좋다 2000년 전의 예수나

하늘에 계신 예수를 무슨 재주로 당신 안으로 모셔 들이냐고 핀잔을 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죠(고후13:5) 그 안에 역사하시는 생명의 성령이십니다.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대속의 은총을 듣고 믿음으로 따라가서

자신이 선 자리 그 소속을 그대로 받아들이므로 아담 안에 있던

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제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이

발견 되어야 하는 겁니다. 자신이 수고하여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은 구원이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세계적으로 우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만유화가 되어야 합니다. 자연 속으로 동화되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특별계시가 열리면 자연계시도 환하게 열리게 되는 겁니다.

죄인으로 태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그 만유 안으로 들어가서 그 분과 영생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 아닙니까?

 

 잘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바로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일이듯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위해서 민족적이며 세계적인 구원이 일으켜야 합니다.

이게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롬9:1) 환경이 나빠지면 바퀴벌레와 같은 독종만 살아남습니다.

지금 신앙의 환경이 엄청나게 열악해 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여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구원하여 자신의 신앙의 환경을 하나님의 나라로 고쳐나가야 합니다.

믿음을 자동차에 비유를 한다면 모든 장치가 다 만들어져 있어서 기름만 넣으면 움직입니다.

믿음의 원리를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는 말씀만 넣으면 몸이 움직입니다.

스위치 온만 하면 혼과 영과 육신이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 말씀을 받아들여 믿음으로 실상화 시킬 원리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보이고

만져지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게 됩니다.

오늘 날엔 성령님께서 이 일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시며 그 영광을 보여주며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며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