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김요한목사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바울의 결론

Joyfule 2024. 3. 26. 00:38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바울의 결론(롬9:30-33)



 마5-7장은 천국의 절대윤리 혹은 추호윤리라는 말을 합니다.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말씀이며 그래야만 천국백성이 된다는 의밉니다.

그러므로 8복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율법의

행위를 좇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차원의 의인이 됩니다.

그로 인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는 온전한 의를 얻습니다.

그러기 위해 주기도를 반복하므로 그리스도께서 보물이 되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않으므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로 발전합니다.

이런 사람은 남을 비판하는 외식에 빠지지 않고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고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해도 주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십니다.

왜 불법이냐면 말씀을 듣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행함이 없고 사람들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이 되기 때문에 그만 그 집은 무너지고 마는 겁니다.

반석 위에 말씀을 듣고 짓는 집이 아닌 사람들 위에 세운 불법건축물입니다.

어쩜 이 시대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신앙의 불법건축물이 많습니다.

 

Q.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바울의 결론이 무엇인가요?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롬9:30-31)

 

A. 이스라엘은 아웃이 되고 의를 추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습니다.

그 의는 바로 율법의 행위에서 난 의가 아니라 믿음에서 난 의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의를 얻으려고 하는 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 우상숭배자들이며 그 아들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희생을

현저하게 무시하므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의 신성을 모독하는 자들입니다.

문제는 유대인만 유대인이 아니라 현대판 유대인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만약 표적이 나타나는 것이 성령세례라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임과

동시에 그 사람은 율법 아래에 있는 유대인과 같기 때문에 죄 가운데 서 있는 겁니다.

 

의의 법 곧 율법의 의를 추구한 이스라엘은 그 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행위로는 결코 목표에 골인을 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합니다.

야구선수가 베이스에 닿으려고 슬라이딩을 해도 터치하지 못해 아웃을 당하는 꼴입니다.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 주시고 우리의 의가 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주로 믿으므로 의를 얻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어 드디어

죄를 범하여 미치지 못한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는 믿음에 이릅니다(롬4:25-5:2)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를 얻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기에 以信得義(이신득의)라고 말합니다. 

 

Q. 행위를 의지 하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었나요?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쳤느니라”(롬9:32)

 

A. 어찌 그러하냐는 말은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의 의지를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계시는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믿을 때에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이

역사하셔서 그 말씀을 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동사를 성령의

지원을 받아 행할 수 있는 비밀을 가진 자가 비로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성령은 선행하는 역사와 동행하는 역사가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성령은 말씀을 믿을 때에 동기를 부여하시고 또 행할 수 있는 능력도 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행위를 의지한다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열심과 모양을 보시지 않고 그 힘의 출처를 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냐 자신의 주권이냐?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와 유대교의 차입니다.

부딪힐 돌에 부딪혔다는 말은 딱 걸려 넘어졌다는 의미입니다. 함정 같은데 빠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건 바로 메시아를 기다렸으나 그리스도께 걸려 넘어졌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의 돌 성전에 완전히 빠져 주께서 세우신 몸 성전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돌 성전을 보시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하신

말씀을 꿈에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자들도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재하실 때에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롬9:33)

보라! 시온에 부딪힐 돌을 두시는데 그 돌은 거치는 반석이며 헷갈리는 돌입니다.

지금도 모리아의 반석이며 솔로몬 성전의 자리 지금은 오마르 회교사원입니다.

지금도 유대인은 이 돌을 벗어나지 못하고 통곡의 벽에 서서 찔찔거리고 있습니다.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이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마16:16)

눈에 보이는 반석 위에 성전을 세우려고 하는 자와 눈에 보이지

않는 반석을 믿고 수용하는 자의 신앙의 차이를 말씀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으면 의가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지 인간의 열심에 의한 행위의 의로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생명의 말씀 곧 양식이 안 되는 말씀은 계속해서 인간의 의지를 북 돋웁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로 하여금 역사하시도록

하는 것이 바로 사역자들의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그래서 고후3장은 의문의 직분자와 영의 직분자들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문제는 세상에서도 검사가 변호사 보다 더 힘이 센 것 같이 보이는 것과 같이

의문에 쓰인 율법의 선생 곧 선악의 선생들이 언제나 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해서 그 영혼들을 살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를

따라 말씀을 이루도록 섬기는 영의 직분자들의 외모의 영광은 아주 초라해 보입니다.

그 대표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도무지 도두라진 외면의 자랑거리가 없습니다.

사역자들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나를 어떻게 사용하시는가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