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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신문 움직이는 名家

Joyfule 2006. 12. 6. 01:50

[창간 81주년 특집] 미국 3대신문 움직이는 名家


 

◆사진설명 :
 
 

"언론자유" 위기마다 든든한

 방패 역할

1963년 10월말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은 뉴욕타임스지 사장이자 발행인 아서 옥스 ‘펀치’ 설즈버거(Arthur Ochs ‘Punch’ Sulzberger)를 백악관으로 초청했다. 케네디는 이 자리에서 ‘정중하게’ 타임스의 베트남 주재 특파원인 데이비드 할버스탬(David Halberstam)의 교체를 요구했다. 그의 ‘사이공발’ 기사가 미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베트남 전쟁을 시작한 케네디 정부로서는, 현지 실상을 그대로 전하는 타임스의 보도를 그냥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타임스 사장에 취임한지 불과 넉달 밖에 안된 37세의 젊은 발행인 펀치는 케네디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아무리 미국 대통령의 ‘부탁’이라고 해도, 뉴욕타임스에게 무엇을 하고 또 무엇을 하지 말라는 외부의 주문이 받아들여졌다는 선례를 남겨서는 안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펀치는 백악관을 나오기가 무섭게, 막 휴가를 떠나려던 할버스탬에게 전화를 걸어 “(휴가를 미루고) 당장 기사를 보내라”고 독촉했다. 당시 케네디와 펀치간의 백악관 면담은 이후 미 언론의 베트남전 보도 태도의 주요한 분기점이 됐다.

 

1971년 5월 워싱턴포스트지도 비슷한 요구를 받았다. 백악관측이 6월13일로 예정된 닉슨 대통령의 둘째 딸 트리시아(Tricia)의 결혼식을 취재키로 돼 있는 포스트의 쥬디스 마틴 기자의 취재를 불허하겠다고 알려온 것이다. 핼더먼(H.R. Haldeman) 백악관 비서실장이 사주이자 발행인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Katharine Graham)에게 “대통령 가족이 불편하게 여긴다”며 기자의 교체를 요구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마틴의 취재 스타일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레이엄은 백악관측의 요구에 불응, 결혼식 당일 행사장 취재를 포기했다.

 

워싱턴포스트지 출입기자가 ‘백악관 결혼식’ 취재를 거부당했던 1971년 6월13일은 미 정부와 언론간의 사실상의 ‘전쟁’이 시작된 날이었다.

 

‘펜타곤 페이퍼즈(Pentagon Papers)’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무려 7000여쪽에 달하는 베트남 전쟁 관련 극비 문서의 보도를 놓고, 닉슨 행정부와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가 정면 충돌했던 것이다. 펜타곤 페이퍼즈는 1967년 존슨 미 행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의 지시로 만들어진 보고서로, 단 15부만이 제작됐을 만큼 ‘1급 비밀’ 이었다. 1971년 3월말쯤 이 문서를 입수한 뉴욕타임스는 보도 여부를 놓고 엄청난 내부 논란에 휩쌓였다. 무려 12주 동안 자문 변호사들은 보도를 반대했고, 편집국은 강행을 고집했다. 변호사들은 미국의 치부를 전 세계에 드러낼 경우 예상되는 닉슨 정부의 보복을 크게 우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발행인이었던 펀치는 편집국의 손을 들어줬고 예상했던대로 닉슨 정부는 즉각 보복에 나섰다.

 

“미국의 국익을 해친다”는 이유를 내세워 정부는 타임스의 관련 보도에 대해 ‘출판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결국 타임스의 보고서 연재물은 나흘만에 중단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워싱턴포스트지가 나섰다. 3500만달러 규모의 포스트 주식 상장을 앞두고 사내 자문 변호사들이 모두 반대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레이엄은 보고서를 입수하자 ‘보도’를 결정했다. 훗날 그레이엄은 “지금은 신문의 정신이 걸려있는 순간”이라던 당시 포스트지의 수석 편집부국장 진 패터슨의 말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고 회고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월스트리트저널지와 더불어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들이다. 각각 진보와 중도, 보수 등 성향이 다르지만 모두 명가의 명품이란 점에서 공통적이다. 옥스-설즈버거가의 뉴욕타임스, 그레이엄가의 워싱턴포스트, 뱅크로프트(Bancroft)가의 월스트리트저널은 미국은 물론 세계를 대표하는 언론으로 지난 100여년 이상 존재해 왔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의 사주들이 신문의 주요 결정마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 월스트리트저널의 뱅크로프트가는 은둔에 가까울 만큼 자신들의 존재를 철저히 숨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뱅크로프트 가문의 신조는 “신문이 우리 사업의 뼈대이니,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면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은둔은 자신의 사진 1장 공개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다. 언론인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퓰리처상을 받았던 피터 칸(Peter Kann)은 “뱅크로프트가를 사주로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크나큰 행운”이라고 말한다.

 

미국 3대 신문의 성장사는 권력 기관들과의 끝없는 충돌의 과정이었다. 이들이 항상 ‘재정적 독립’을 강조해 온 것도 따지고 보면 항상 언론을 굴복시키려 하는 권력기관등 ‘외압’을 이겨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68년부터 1991년까지 워싱턴포스트의 편집국장을 지내며, 닉슨 대통령의 하야를 가져온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등을 이끌어냈던 벤 브래들리는 “재정 독립과 언론자유는 동전의 앞·뒷면 같은 관계”라며 “3대 신문이 ‘독립 언론’으로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경영상의 성공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라고 말한다. 일찍부터 미국내 지방 TV 방송 및 해외판 발행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추구해 온 이들 3대 신문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는 인터넷 뉴스 분야에서도 선두를 지키고 있다.

 

이들 3대 신문에 대한 미국인들의 긍지는 대단하다. 말린 피츠워터 전 백악관 대변인은 “미국의 하루는 이들 3개 신문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했다.

------------------------------------------- 신문 명가의 사람들 NYT 옥스-설즈버거가...부도 신문을 권위지로 WSJ 뱅크로프트가...철저히 은둔, 관여 안해 -------------------------------------------

4~5대에 걸친 가족 경영에 성공한 미국의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등은 미국 기업사에서 아주 드문 사례로 꼽힌다.

1896년 테네시주 출신 언론인인 아돌프 옥스(Adolph Ochs)가 뉴욕타임스를 인수할 당시, 타임스는 ‘황색 저널리즘’과의 상업적 경쟁에서 패배, 사실상 부도 상태였다. 하지만 옥스는, 100여년 이상 타임스의 상징처럼 된 ‘인쇄하기에 적합한 모든 뉴스(All the News That’s Fit to Print)’란 모토 아래 정론지로 다시 도전, 성공을 거두었다. 옥스의 사위인 아서 헤이스 설즈버거가 1935년 사장겸 발행인으로 취임하면서 미국을 대표하는 신문으로 자리잡았다.

워싱턴포스트의 역사도 비슷하다. 1877년 창간됐지만 경영상 실패를 거듭하던 중, 1933년 경매를 통해 포스트를 인수한 유진 마이어(Eugene Meyer)와 그의 사위 필 그레이엄, 딸 캐서린의 시절을 거치면서 제 궤도에 올랐다.

경제 소식지 형식으로 1882년 창간된 월스트리트 저널은 1902년 사업가인 클레어런스 배론(Clarence Barron)이 인수한 후, 그의 사위 휴 뱅크로프트(Hugh Bancroft)의 후손들이 소유하고 있다. 이 신문이 미국을 대표하는 경제지로 자리잡게 된 데는 1941년 사장겸 발행인에 취임한 언론인 출신 버나드 킬고어(Bernard Kilgore)의 역할이 컸다.

이들 3개 신문들은 외부의 강압적 인수·합병으로부터 ‘신문의 가족 경영’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에 공개된 주식의 10배의 의결권을 갖는 ‘클래스 B 주식’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다.

( 박두식기자 dspark@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