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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막7장 그리고 그후 (멈추지 않는 삶을 위하여) 홍정욱 中 - 미국이라는 나라

Joyfule 2006. 12. 7. 01:42






 


7막7장 그리고 그후 (멈추지 않는 삶을 위하여)
홍정욱 | 위즈덤하우스 | 2003.11.07 | 302p 


미국이라는 나라


 160년 전 사회학자 토크빌A. de Tocqueville은 미국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미국은 모든 것이 쉴 틈 없이 움직이고, 모든 변화가 발전을 보이는 경이로운 땅이다. 이곳에서는 어떤 자연적인 장애도 인간의 노력을 굴복시킬 수 없는 듯하다. 그리고 그들의 눈으로 볼 때, 이뤄지지 않은 일이란 아직 시도하지 않은 일일 뿐이다.

 

 분명 미국은 다양성독자성이 융합된 이 넘치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져본 적이 없다. 나의 유학은 한 인물과 한 학교에 대한 서정적인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지 미국이라는 정의하기 힘든 사회를 좇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포츠머스의 작은 수도원에서 하버드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나에게 고독하고 힘든 시험의 장소였다. 아무리 웃고 떠들어도 내 마음은 미국사회라는 물로부터 격리된 기름 같았고,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나는 미국이 계급부재의 사회라는 주장을 뉴포트의 저택들을 돌아보며 부정하게 되었고, 미국이 자유국가의 양심이라는 주장의 허구성은 라피버W. Lafeber의 책을 보며 깨닫게 되었다. 또한 미국 전역의 빈민가, 초우트의 귀족 교육, 그리고 유색인종이 한 명도 없는 하버드 클럽의 초상화들을 보며 ‘American dream’의 현주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로드니 킹, 게리 하트, 데이비드 코래시를 기억하며 미국은 그저 거대한 실수일 뿐이라는 프로이트S. Freud의 절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같은 치부를 보며 미국의 몰락을 점치는 일은 경솔한 행동이 아닌가.

 

 내가 접한 미국의 학생사회는 변혁의 힘이 태동하는 곳이었다. 진보의 거센 물결은 하버드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다. 하버드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들이거나, 한 방면에서 특출한 역량을 지닌 천재들이다. 이런 그들이 대학에 와서 부딪히게 되는 충격은 초일류 엘리트 집단에 속하게 된 자부심이 아니라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우수한 이들이 많다는 냉정한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좌절에서 오는 방황은 대부분 자기 성찰진로 모색의 방향으로 전환되게 마련이다. 즉 이들은 ‘최고’라는 천편일률적인 목표를 두고 경쟁하는 무모함을 버리고, 개인적인 관심사와 재능을 발굴하기 위해 신축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모든 분야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양 얕고 편협적인 지식을 쌓느니, 실제로 전문 분야를 찾아 그 분야에서만큼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일인자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졸업논문의 가장 중요한 심사요인은 창의력이다.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쓴 논문이라도 그 주제가 광범위해 이미 많은 학자들에 의해 다루어진 것이라면 제대로 읽혀지지도 않은 채 저자에게 돌려보내질 것이다. 반면 ‘한중 수교’, ‘중국의 흑인사회’, ‘유색인종의 백인 차별’과 같이 비교적 다뤄지지 않은 주제라면 더욱 보람 있고 성공적인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주제에 관해서는 세계적인 전문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 전문 주제를 정해 연구하고 서로 그 결과를 나누는 스터디그룹의 제도적 정착과 심지어 스스로 창작해 낸 분야를 전공으로 정할 수 있는 전공 선택의 자유도 학생들로 하여금 새로운 도전의 포부를 갖게 하는 미국 교육환경의 강점이다.

내가 경험한 하버드는 이 같이 숨쉴 틈 없는 진보의 욕구창의적인 정신이 조화를 이루는 정력적인 곳이었다. 자신과 자신이 몸담은 집단의 환부를 직시하고 비판적인, 그러나 건설적인 자세로 해결의 묘책을 찾아내려는 젊은이들의 기상이 꿈틀거리는 곳이었다.

물론 하버드대학은 선택받은 소수의 집단일 뿐 미국사회의 축소판이 아니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소수의 엘리트가 때로는 우수한 다수보다 효율적인 진보의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컬럼비아대학의 한 동양학자가 미국과 한국의 사회를 비교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린 적이 있다.

 

 90%의 역량을 지닌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90%를 이루고 있다면 미국은 100%의 역량을 지닌 10% 지도 계층과 50%의 역량도 채 갖지 못한 90%의 일반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가 전문가이고 모두가 최고인 한국사회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이끌어지는 미국사회를 단적으로 표현한 예다. 그렇다면 이들 엘리트 집단이 미국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재정의해야 한다. 지나친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는 다양한 사회적 폐단의 원인을 제공한다. 많은 미국인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창조발전의 개념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소비와 향락을 위한 노력으로 여기고 있음은 불행한 일이다. 이 같은 추세는 졸업 후의 취업 분포에서도 극명히 나타난다. 이처럼 대학 교육이 부여하는 엘리트의식과 진보정신이 사익 추구에 집중된다면, 미국의 자본주의는 희망이 없다. 극작가 유진 오닐E. O'Nell은 미국을 평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메리칸 드림이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경우 고작 물질적인 풍족을 향한 꿈이 아니던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때로 미국이 이 세계가 목격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실패라고 생각한다. 미국사회를 칭송한 바 있는 토크빌도 미국의 가장 큰 취약점은 개인의 경제적인 이해가 국가적인, 공적인 이해보다 훨씬 강한 사회적 분위기라고 지적하지 않았던가. ‘나’ 이전에 ‘우리’를 생각하는 사고, 이는 미국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둘째, 미국의 힘을 균형 있게 활용해야 한다.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국가의 이익과 책임을 균형 있게 조정하는 일은 탈냉전시대 미국의 엘리트들이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트루먼독트린 이후 마치 세계의 경찰인양 근육을 자랑해온 미국이 이제는 스스로의 힘과 위치를 냉정히 파악하고, 균형 잡힌 지도자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특히 잦은 국제분쟁 간섭은 국민들에게 일종의 전쟁 무관심 증세를 유발함으로써,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인종말살정책 같은 비인도적 사건 앞에서는 오히려 머뭇거리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국가, 어느 단체나 내실을 기한 뒤에 외부적 책임을 이행해야 한다. 과도기적 국제정세 속에서 주관 없는 힘의 행사는 도리어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더 많은 분쟁을 유발시키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W. Shakespeare는 거인의 힘을 거인처럼 사용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라고 했다. 힘과 책임의 균형이야말로 미국의 엘리트들이 가장 고민해야 하는 역학관계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