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채보상운동
근대에 들어와서 여성들이 국난에 대처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한 예는 국채 보상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1876년 2월 27일,강화 연무당에서 12개조의 수호조약이 조인된 뒤 일본은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한국을 거액의 채무자로 만들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의 발목을 점점 쇠사슬에 얽매어 영영 국권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 된다 하여 1907년 2월 21일에 맨 먼저 대구 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그의 향우인 동지 서상돈이 우선 단연동맹으로 국채를 보상하자는 취지서를 공함으로 발표하였다.
신문을 통하여 이 소식을 규방에서 알게된 서울의 부인들은 마음에 크게 자극을 받고 전 평리원 판사 김규홍 부인과 이준 부인 이일정이 남북촌유지 부인들과 회합하여 "국제보상부인회"를 조직하고 대안동 414통 4호 김규홍 집에 임시 사무소를 정하였다.
이에 뒤를 이어 대구부인들의 발기로 손에 꼈던 은가락지를 뽑아놓고 경고문을 발표하였고, 부산의 좌천리 부인회의 부인들 역시 살림을 알뜰히 하고 반찬거리를 절약함으로써 그 남는 돈을 국채보상금에 제공하기로 결의하였다. 1907년 4월 평안남도 삼화항에서는 "패물 폐지 부인회"를 조직하고 취지서와 규칙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가 항일의 급선봉인 대한매일신보를 타도하려는 책략을 꾸며냈고 이 바람에 서리를 맞아 좌절의 비운에 빠져버렸다. 대한매일신보 사장 베델의 후임 사장 영국인 만함(한국명)이 신문운영권을 통감부 앞잡이에게 매도하고 일본으로 떠나버린 뒤 친일의 간부들과 사회유지로 국채봉삼처리회를 구성하고 처리방법을 결정한 다음 새로 입사한 간부진에게 대한매일신보사에 예치하였던 의연금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그들이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동안 소위 한일합방이 이루어져서 총독부에서 그 돈을 압수하였다.10) 이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결과적으로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한 투쟁방법으로는 너무나 사태를 단순하게 본 순진무구한 방법이었음이 드러났다. 이 운동에는 물론 전국적으로 많은 국민들이 참여하였고 특히 여성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기독교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예는 다음과 같은 조직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국미적성회 1907.3.29.인천(기독교)박우리바,여누이사.정혜쓰더.장마리아 김쓸비여,송천심이. 기독교부인.식구 수대로 일시식, 황성 1907.3.14 남양군 부인의성회 1907.4 경기도 김희경,김혜중,안마리아. 기독교신도성.현금,기타 제국 1907.4.17. 영도국채 보상부인회 1907.6 부산 유지 기독교부인 현금등 황성1907.6.22 비석동예수교 부인국제보상회 삼화항 기독교부인 현금등 대매 1907.4.24 11) (대매=대한매일신보의 약어)
이렇게 기독교부인들로 조직된 4개 단체는 국채보상 여성단체의 31%를 차지하고 있다.12) 이 중에 인천에서 기독교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활동한 국미 적성회는 1907년 3월 29일에 발기하였는데 발기인은 박우리바,여누이사,정혜스터,장마리아,김쓸비여,송천심이이고,개최 당시의 회원수는 80여명이었다. 이중 20명을 권고위원으로 결정하였고 위원 두사람이 한 동리씩 맡아 여성참여를 권고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들 권고위원에 의하여 매주일마다 의연곡물이 수합되었으며 회원수는 활동 수일 만에 500여명으로 증가되었고, 음력 2월 한달 동안에 수합한 의연미와 의연금품이 무려 18섬 8되 8홉에 달하였고 동화가 254원 36전에 1냥중짜리 은비녀 2개가 수합되었다. 이들의 의연미는 매조석마다 매식구당 일시씩 떠서 모은 것이었다.13)
적성회 취지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 일개인으로 말하여도 남에게 빚을 지고 그 전주를 보면 압기가 되어 스스로 자유권리를 잃어버리고 필경 그 집은 점점 쇠퇴하여 보전치 못하나니 나라일도 또한 일반이라.외채가 있고야 어찌 보전하기를 바라리오. 나라를 사랑하는 자매양 눈물을 흘리고 한탄하기를 마지 아니하더니 하나님이 도우사 근자에 사방에서 유지하신 선배들이 의조금을 모집하여 단연회를 실시하고 일심으로 국채갚기를 결심하는 자가 상약한 바 없이 각처에 불일 듯하니 어찌 우연타 하리오. 그러나 우리나라 여자로 말하면 규중에 있어 바깥일은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한 도리로 알았더니 지금 세계각국을 볼진대 남녀의 분별은 있으나 권리는 남자와 조금도 등분 없는 것을 본즉 이것이 떳떳한 이치라 여자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적자는 일반이온대 어찌 녹녹히 옛법을 지키고 만연히 두동하오리까.비록 일푼일지라도 보조할 터이온데 우리 여자가 다른 권리는 없으되 집마다 양식 다루는 주권은 우리 여자에게 있는 고로 몇 사람이 작정하고 매일 먹을 양식중 식구 수효대로 때때에 한술씩 모아 국채갚기로 이회를 실시하고 이름을 적성회하라 하니.. 우리는 밥한술씩 덜 먹고 십시일반으로 모으는 쌀로 국채갚아 노예를 면하고 자유를 찾아 영원히 세계상 상등국이 되기 바라나이다..."14)
이 취지서는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는 남자만이 바깥 일에 관여하는 옛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국채봉상운동의 취지문서들의 내용은 거의 이와 유사한 경향을 띠고 있다. 1907년 3월 9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나타난 대구부인들의 경고문은 "나라 위하는 마음과 백성된 도리에야 어찌 남녀가 다르리오"라고 역설한다.15)
더 나아가서 "이렇듯이 국채를 갚고 보고 국권만 회복할 뿐 아니라, 우리 여자의 이름이 세상에 전파하여 남녀 동권을 찾을 것이니..."16)라는 차원까지 발전한다.
즉 나라를 위하는 일은 곧 여자의 권리를 찾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취지서들에는 "우리가 함께 여자의 몸으로 규문에 처하와 삼종지도의에 간섭할 사무가 없아오나..."(대구부인들의 경고문17) "정승이 어질지 못하면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아내가 어질지 못하면 집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니 제가는 치국지본이라 우리가 치산을 잘 하여야 군자들에게 의무를 보상하려니와"<부산부인들의 감선의연취지서>.18)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여성의 근본 영역은 가정인데 나라가 위태로와진 지금 가정도 위태롭고 따라서 이 운동에 여성이 참여하여야 한다고 역설하는 내용도 있다.
이 운동은 남성들의 발기로 시작되었고 거기에 여성들이 적극 참여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 따라서 참여한 여성들의 의식수준도 남자들이 하는 일에 협조하는 정도이다. 민족의 고난이 끝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심화되어 갔는데 국채보상운동 이후의 발전적인 여성 조직활동이 계속 맥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이 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의 의식이 주체적인 활동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라는 점을 밝혀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은 여성들의 의식에 변화를 가져왔고,눈앞에 벌어지고 있는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할 만큼의 초보적인 싹이 트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국채보상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한 이일정은 이미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얽매인 여성이 아니었다.
이일정의 활동을 보면, 그녀는 남편 이준이 정치개혁운동을 하다가 옥고도 겪고 유배되는 동안 어린 딸을 데리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여성은 반드시 독자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아놓지 않으면 안된다"는 경험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가 1907년 신년벽두 서울 안현동(지금의 안국동 일대)11통 16호 길가집에 안현부인상점을 개업한 것이 그의 소신으로 이루어진 한국 최초의 일이다.
이 상점은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돌아오지 않자 자세한 소식을 알려고 러시아 등지를 헤매는 동안 상점은 페지되고 말았지만 그녀의 딸을 그 자립정신으로 진명여학교와 동경 유학을 시킬 수 있었다고19) 한다.
그녀는 아직도 상인을 천시하던 시대여서,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생활 기반을 구체적으로 닦을 줄 아는 한 독립된 인격이었고 그것이 그녀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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