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독교 여성들의 참여
이러한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교회라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기독교는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교회인사 16명이 서명 날인함으로써 3.1운동에 공식으로 참여하였고, 국내외에 독립선언서와 각종 문서를 전달하는데 교회는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3월1일 만세시위가 지방에 파급되었고 이 만세시위 운동에 많은 기독교인들과 기독교계 학교 학생들도 참여하였다.24)
3.1운동에 참여했던 교회의 각오는 이렇게 나타나 있다.
"이 독립운동이 한국교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냐 하는 문제는 복잡을 극하는 문제이다. 교회지도자들은 만일 이 운동이 실패하는 경우,교회에 대한 피해나 핍박이 올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 운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이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로 해서 기도드려 왔으며 세계의 여러 약소 민족들이 민족적이요,종교적인 자유를 획득하는 역사의 기로에서 자기들도 그러한 축복을 위해 분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25)
따라서 독립운동에 대한 가장 가혹한 보복이 교세가 우수한 지방의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가해지고 있었다. 일본은 경찰과 헌병의 병력으로 교회를 때려 부수고 종탑과 성경책들을 산산조각 냈으며 검거선풍 역시 기독교인들을 특별히 목표로 하고 있었다.26)
1919년 10월의 장로교 총회에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장로교인만의 피해상황만도 아래와 같이 보고되었다. 곧 체포된 자의 수가 3,804명,체포된 목사와 장로의 수 134명,기타 기독교 관계 지도자로서 수감된 자 202명, 사살된 자 41명,그날 현재 수감중인 자 1,642명,매맞고 죽은 자 6명,그리고 훼손된 교회수가 12개소였다. 그런데 함북노회만 해도 26명의 참살자가 기록되어 있었다. 27)
가. 준비단계 - 송죽 비밀결사대
1907년 국채보상운동 이후 조직적인 항일여성 운동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회활동에 익숙한 남자들은 만주,노령,중국 등에 독립운동의 기지를 설치하고 무력을 통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행하고 국내에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국외 독립기지와 긴밀한 연락과 지원을 했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이와같은 독립운동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여성들은 거국적인 독립항징의 기회가 오기까지 개개인이 또는 학교나 교육을 통한 소규모적인 정신적 저항운동을 하는데 그쳤다.28)
특히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경우에는 맘이 맞는 친구끼리 독립쟁취의 비상시를 위하여 각각 다른 명칭을 가진 몇 개의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졸어바 후에도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는데 이것이 1913년경 숭의여학교 교사 황에스터,김경희,박정석 3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송죽 결사대이다.
황에스터와 김경희는 학생들의 지역적 분포가 전국적인 데 착안하여 독립사상을 전국 여성에게 확산시킬 목적으로 정예학생 2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사상 함양을 위한 집회를 비밀리에 가졌었다. 이들 회원들은 주거지역이나 취지지역 등지에서 각기 믿을 만한 동지를 규합하여 송죽결사대의 지휘적 활동을 하였다. 예를 들면 이혜경은 함경도에서,서배몰은 부산에서, 박현숙은 전주 기전여학교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나이든 회원들은 송(松)형제,젊은 회원들은 죽형제로 나누어서 조직관리를 하였다고 한다.
이 회원관리는 매우 철저하였다. 최은희씨에 의하면, "오랜 시일이 흘러 송형제가 결사적인 동지를 얻게 되어도 결코 총본부를 알리거나 합석하는 일이 절대로 없으며 1대 1로 그치고 만다. 어떤 한 사람을 시작으로 2단계,3단게를 구성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죽형제는 송형제가 있다는 것 조차 모른다. 또 자신들이 죽형제라는 사실마저 알지 못한다. 다만 구국동지의 결의 형제로서 비밀을 지킬 뿐이다."30)
이들은 교회마다 부인계몽단체를 결성하고 부인회에서는 국산 장려와 흰 옷에 물을 들여 입자는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황애덕은, "우리는 독립을 위하야 외국물건을 쓰지 말고 우리 국산으로 생활하자는 실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는 왜비누 대신에 녹두가루를 만들어 쓰고 의복도 무명과 명주로 만드러 입었습니다..."31)
고 송죽 비밀결사대의 활동을 회고하고 있다. 그녀들은 회의를 할 때면 의례히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또한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가족을 돕기 위해서 해외에서 밀사가 들어오면 그들의 여비와 체류비를 위해서 회비를 각출했다.32)
이때 회원은 월 30전을 내게 했고 그 회비 이외에도 자수 등을 판매함으로써 특수회비를 마련하여 국외의 독립운동기지에 송금하였다. 예를 들어 김경희는 상해임시정부로 가서 활약하다가 폐결핵으로 1919년 10월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상해에서의 추도사 중에 송죽회라는 명칭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그가 7-8년간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회비를 모아 독립 군자금으로 송달하는 애국적 활동을 하였음을 치하하고 있다. 그 "비밀단체"가 곧 송죽결사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여진다.33)
이러한 조직은 후일 3.1운동을 일으키는 데 준비조직이 되어 주었다. 이를테면 1919년 2월에 3.1운동을 준비하기 위하여 황에스터와 김마리아가 일본에서 국내로 잠임하였는데,김마리아는 부산,대구,전주,서울,황해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만세시위를 독려하였고 황에스터는 서울을 거쳐 평양의 송죽회원 장성석에게 들러 거사 준비를 부탁하고는 서울로 돌아왔다. 이들이 이처럼 여러 곳을 다닌 것은 일본을 떠나기 전에 항일 만세 시위를 거족적으로 전개하는 데 여성을 참여케 하기로 하고 송죽결사대의 조직을 이용하기로 서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4)
이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가면서도 경찰망에 잡히지 않았는데 이는 기독교 여성들이 개인으로사가 아니라 여럿이 모여서 조직을 만들고 관리할 수 있는 성숙함과 축적으로 보여진다. 물론 활동내용이 아직도 독자적인 활동이 아니라 남성들의 독립투쟁을 도와주는 보조적인 역할과 독ㄹ비에의 의지를 깨우치는 계몽적 역할을 담당하였찌만 그러한 역할을 여성들 스스로 결정하고 조직된 힘에 의해서 진행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 영성을 위한 ━━ > 기독교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3.1운동 4. (0) | 2007.02.27 |
---|---|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3.1운동 3. (0) | 2007.02.26 |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3.1운동 (0) | 2007.02.24 |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1) 국채보상운동 (0) | 2007.02.23 |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1. 항일운동 (0) | 2007.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