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을 위한 ━━/기독교자료

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3.1운동 5.

Joyfule 2007. 2. 28. 01:14

다.3.1운동 이후의 활동

 

 


3.1만세 시위가 잠잠해갈 무렵 여성들은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들을 서울과 서북지방에서 비밀리에 조직하고 있었다. 이러한 부녀단체들은 처음에는 투옥지사의 옥바라지와 그 가족에 대한 구조 후원을 목적으로 하는 소규모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의 소규모 단체들이 점차 통합되어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는 큰 단체로 발전하여 갔으며 이렇게 확대된 조직체는 상해의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체제로 바뀌었다.

 

이러한 부녀단체들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단체로는 서울을 중심으로 조직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와 평양의 대한 애국부인회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체들의 중심 멤버는 거의가 다 기독교 여성들이었다.45)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혈성단 애국부인회와 대조선 독립 애국부인회를 병합한 단체이다. 위의 두 단체는 조국의 독립이라는 같은 목적을 가진 운동체이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병합한 것이다. 그런데 회장이었던 오현주가 남편에 뜻에 따라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려고 하자 활동은 자연히 저주해졌다.

 

이때 마침 1919년 8월 4일 예심면소로 출감된 김마리아, 황에스터가 이를 전국적 규모로 확장시켜 독립운동에 전력하고자 조직의 확대강화를 제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9월 9일 회의에서 종래의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확충해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본부로 개칭하기로 결의했다.46)

 

김마리아 등은 이 애국부인회,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대일독립전쟁에 맞는 체제로 개편하기 위해서 종래의 부서와는 달리 적십자상,결사장이란 부서를 두었다. 이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군관학교는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부상자 치료구출을 위한 대한민국 적집자회를 조직한 것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국내외에서 동시에 독립전쟁 준비를 위하여 기존체제를 정비,강화,보완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한 자는 주로 기독교계 여학교 교사들이었는데,그후 독립전쟁 준비를 갖춘 체제로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간호원들을 대거 규합하여 점차 그들의 참여활동의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다.47)

 

또한 서북지방의 기독교 부인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항일부녀단체인 대한애국부은회는 처음에는 평양의 장로교계와 감리교계의 부인신도들이 각기 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상해 임시정부의 요원들의 권유에 의하여 연합된 조직이다.48) 이 조직 역시 기독교계 교사와 전도부인들이 주를 이루었다.49)

이들 조직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려는 목적하에 돈을 모아 보내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러나 이 조직들은 얼마가지 않아서 일경에 의해서 검거되어 활동이 중지되었다. 즉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1919년 11월 27일에,대한애국 부인회는 1920년 10월 15일에 일제히 검거되었다.

 

단기간이었기 때문에 체제를 정비하고 돈을 보내는 일 이외에 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지만, 그 당시 일경보고서에 의하면 이들에 계속 활동했을 경우 일제에 끼치는 심각한 영향력을 우려하고 있다.

즉 "저들의 계획은 자못 대규모이며 조직은 심히 정돈되어 있어서 만약 13도에 걸쳐 본부와 지부가 서로 책응하여 대활동을 벌인다면 그 해화는 실로 측량할 수 없을 것이다."50) 라고 하였다. 이렇게 이들 여성들은 남성들 못지 않은 조직력과 활동력을 가지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근대식 교육을 받아 사회적인,민족적인 문제를 자신들의 문제로 고려할 수 있는 여성들의 역량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직들에 있어서 조직의 결성 및 관리과정이 완전히 자주적이었다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혈성단 부인회와 대조선독립 애국부인회가 연합되어 대한 애국부인회로 된 것은 상해의 임시정부를 지지하기 위하여 조직된 대한 청년 외교단의 총무 이병철의 권유에 의해서였다.51)

 

민족의 고난은 남녀 모두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든 여자든 민족의 고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가부장제의 억압이라는 남성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억압 또한 존재하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구의 반이나 되는 여성들이 자주의식이 없이 남성이 시키는대로 보조적인 역할만 한다면 참된 의미의 민족적 독립을 쟁취하기 어렵고 평등한 사회를 이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 없는 활동은 결국 남성들의 보조자적 역할에 불과한 것으로 운동을 이끌어간다. 사실상 여성들이 3.1운동에 참여하고 다치고 고난받고 한다 하더라도 운동 전체의 방향,그 이후의 방향 정립에 여성들은 아무런 참여도 못하고 그저 돈이나 걷어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예를 들어 3.1운동이 독립을 선언한 운동이었던 만큼 그 결과로 정부 수립이 추진되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정부수립 운동은 노령의 블라디보스톡과 상해(1919.4.10)서울에서 각기 조직되었는데, 결국 세 정부 사이의 이해를 넘어서서 이승만의 한성정부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통합정부가 이루어졌고, 그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 두기로 하였다. 이는 민족운동을 계속 이끌어나갈 임시정부의 성립을 열망하는 민족적 여망이 뒷받침된 때문이었다.

 

3.1운동의 정신을 구현하여 비록 임시정부이긴 하지만 우리 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가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후의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임시정부의 위치문제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데 임시정부가 그 위치를 상해에 정했다는 사실부터가 독립전쟁론에 입각한 정부라기보다 실력 양성론,외교독립론 중심의 정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만주나 연해주 지방에 있는 많은 독립군 단체들을 직접 통어하지 못했고 따라서 이 지방 독립군의 전력이 통일되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애초에 독립전쟁을 "최후의 수단"으로 정했었기 때문에 독립전쟁을 포기하다시피 한 임시정부는 심한 논쟁과 파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특히 외교 독립론에 바탕을 둔 이승만의 국제연맹 위임통치론은 논쟁의 가장 큰 불씨가 되었고 임시정부 안의 평안도파와 기호파의 대립은 파쟁의 중심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북경을 중심으로 신숙,신채호 등 독립전쟁론자들이 이승만을 불신임하면서 임시정부 활동과 독립운동 전체의 방향전환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주장했고,각 지방 해외동포사회의 70여 단체라는 개조파와 해체파,새 정부를 수립하라는 창조파로 나뉘어져 쟁쟁히 맞섰다. 결국 국민대표회는 결렬되고 국민대표회에 대한 찬반양론으로 크게 타격을 받은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집단체제로 변화, 헌법의 적용범위도 "인민"에서 "광복운동자"로 좁히는 등 큰 변화를 겪으면서 독립운동 단체로 변하는 침체기에 들어가게 되었다.52)

 

이러한 상해임시정부의 변화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소리는 얼마나 반영되었는가? 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문제의 해결은 순진한 정열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체를 총괄적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것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의지와 힘은 오직 여성들 스스로의 자각과 굳게 단결된 조직적인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독립운동 참여에 있어서 여성들이 그 방향이나 중요한 결정에 참여치  하고 남성들에게 맡기고 남성들의 권유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보조적인 역할만 했다 하더라도 여성들의 자주의식을 싹트게 하는 데 큰 계기가 된 사실마저 부인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