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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고난과 기독교 여성 - 2) 3.1운동 4.

Joyfule 2007. 2. 27. 00:45

(2) 기독교 여성들의 참여

 

나.3.1운동에의 본격적 참여


2.8선언 당일에는 김마리아,황에스터,현덕신,정자영,유영준,나혜석,노영조,성목진 등의 여자 유학생들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2.8운동이 동경에서만 그쳐서는 안되며 이 기회에 국내에서 거족적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여자유학생들이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을 하였다. 송복신 등이 먼저 민족자결운동에 관한 비밀문서를 가지고 국내로 들어왔으며 뒤이어 김마리아,황에스터도 곧 이어 귀국 활약을 하였다.35)

 

일본에서 귀국한 여자유학생 또는 상해에서 파견된 여성지도자들에 의하여 3.1운동을 위한 여성조직이 학교와 교히를 중심으로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고 각 여학교에서는 비밀써클이 활발히 조직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한 여학생의 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2개월간 우리들은 여러가지 준비를 하였다. 학우의 주소를 조사하여 재정을 구취하며 일인의 눈을 피하여 비밀리에 동지를 단속하였다. 혹 때로는 아궁지 앞에 널짝을 놓고 그 밑에 들어가 가만히 한마디 두마디씩 연락하여 주기도 하였다가 3월 1일 오전을 당하여 어린아이 큰 사람 할 것 없이 하나씩 둘씩 알고 가서 오늘 할 일을 알려주었다."36)

 

또 3.1운동을 목격한 영국인 맥켄지의 저서인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록된 다음 내용을 통하여서도 3.1운동을 위한 여학생의 철저한 준비 상황을 알 수 있다.

"어떤 미션스쿨의 여교장은 며칠 동안 여학생들이 이상하게 들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입했어'하고 서로 묻는 것을 보고 어떤 여학생단체가 새로 조직되는가보다 생각했다. 이것은 그 위대한 날이 오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어느날 아침 교장이 교실에 들어가 보니 자리가 모두 비어 있었다. 선생 책상 위에는 여학생 전원이 서명한 자퇴서가 놓여 있었다..."27)

 

이러한 활동에 연대한 교인인 듯한 한 여학생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호소문은 이 여학생이 민족의 문제와 신앙의 문제를 얼마나 잘 연결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여학생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호소문:"파리 평화회의의 여러분이여,한창 인류의 정의와 권리를 개정하기에 주의하는데 우리들 한국아동은 삼가 上帝의 앞에 정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부휴하여 주시며 안무하여 주시기를 앙청하나이다. 우리들은 불행히 여신을 타고나서 말할 수 없는 수치적 대우를 받았으며 입으로 옮길 수 없는 모욕을 당하였사오니 아! 吾人은 장차 누구를 향하여 호소하여서 원억을 伸하오리까? 오인은 장차 어디를 향하여 원조를 걸(乞)하오리까?오인은 설사 허공을 우러러 규호한들 불쌍히 여길이 누구오리이까?요사이 듣건대 각국 사람들이 모두 자유를 요구한다 하옵기 우리 한국의 원한을 품은 남녀아동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우리의 받던 압제를 벗어버리려고 한국의 독립을 선포하였삽더니 우리들은 마침내 구타를 받고 감금을 당하고 타마를 입고 칼에 찍히고 철구에 끌리고 자도에 찔리고 머리채를 끌려 다녔사오며 우리 방실은 소휘되었사오니 이것을 정의라 하리까? 이것이 인도라 하리까?오인은 예배일을 당하여도 교히당에 갈 자유가 없습니다. 오인은 국내에 거주하면서도 항상 기독교인이 아니냐는 힐문을 받습니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곧 구타와 장초를 받고 피상당한 자 벌써 다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항치 아니합니다. 다만 양수를 들고 상제께 향하여 국가를 위하여 호소하면서 자유와 민권을 간구할 뿐 이외다. 여러분! 여러분은 장차 오인을 연민하여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려나이까?여러분은 장차 일본의 참혹한 학정과 불평한 대우를 저지하려 하나이까? 우리는 이 글월이 반드시 평화회의 석상에까지 도달되지 못할 것을 잘 압니다마는 행여나 이 글월을 득견하는 이가 있어 우리의 처참한 통고에 감동되어 이것을 말씀하는 이가 있을까 함이외다. 우리들의 이 글월이 착오된 것 있사와 소아의 장난거리 같음을 면치 못하리다마는 바라건대 여러분은 양찰하소서 우리들은 권력도 없고 호소할 곳도 없습니다. 우리들은 오직 상제께서 여러분을 감동시켜 우리들의 말씀을 부청하여 주시도록 하실 것을 믿을 뿐이외다. 듣건대 아국인민중에는 일본의 현재와 장래의 포학을 인수치 못할 것을 우려하여서 지상에 서명하여 일한 합병을 청구한 일이 있다합니다마는 그것이 참뜻이 아니요, 일본사람들의 유괴입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여, 우리들은 당신을 아버지와 같이 바라오니 한번 우리들의 독립선언을 청납하시고 세계각국에 포고하시면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이 간절히 기원하는 바외다."38)

 

3.1운동이 주동적 매체 역할을 한 청년, 학생들 가운데 여학생들의 활동은 눈부신 것이었다. 예를 들어 한 미션학교의 여학생들은 온 읍내를 돌아다니면서 데모를 하였는데 여교장이 와서 학생들이 돌아가지 않으면 자신이 대신 경찰에 체포된다고 하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이제 모든 게 다 잘됐어오. 우리는 우리가 하려던 것을 다 했으니까.우리는 남자들이 분발하도록 했어요. 그들은 마음이 약해서 우리 여자들이 먼저 나서기를 바랐던 거에요. 이제는 그들이 앞으로 나아가겠죠"39)라고.

 

또한 유관순이란 여학생은 어느 남학생 못지않게 용감했던 투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녀는 3.1운동 당시 16세의 소녀로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본래 충남 천안군 목천면 지령리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3.1운동이 터지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 서울에서 활약하다가 고향인 충청도에 내려가 천안,연기,청주,진청 등지에서 공작, 봉화신호로 음력 3월1일 수만의 군중을 천안군 동면 아내 장터로 모이게 하였다. 수많은 군중을 일본헌벙에게 체포되어 천안 헌병대를 거쳐 공주재판소로 넘어갔다. 유관순은 검사국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였으며 그후 재판정에서 "하는 한국 사람이다,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며 일인에 의해 재판받는 것을 거부하였다. 끝내 3년형의 언도를 받았다. 다시 경성 복심 법원에서도 판결을 거부하고 독립을 주장하였으며 일인 검사가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독립이냐"고 모욕적인 발언을 하자 법정에서 유관순은 걸상으로 검사를 쳐서 7년형으로 가형되었다.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자 조석으로 만세를 연창하여 그때마다 죽도록 매를 맞았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일인들은 나중에는 고문을 하다못해 유관순의 밥에 모래와 쇳가루를 섞어 주었다. 유관순은 오랫동안 계속된 악형과 불굴의 투쟁과 영양실조로 1920년 10월 12일 17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옥사하였다.40)

 

여성들은 이제 집에만 갇혀 잇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여성을 묶어 두었던 가정으로부터,제도로부터 벗어나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외쳤던 것이다. 시집살이도,아이기르는 일도 다 잊어버리고 하루종일 뛰어다녔던 것이다.

서용란씨의 말에 의하면 "3월 1일이 되자 독립만세가 일어났다. 만세소리가 나면 길이 모두 하얗게 되어서 뛰어다녔다. 나도 큰애를 시어머니에게 맡겨두고 거리로 뛰어나와 만세를 부르고 다녔는데 결국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41)고 한다.

 

이렇게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일은 여성의 지위 향상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즉 김종희 씨에 의하면 3.1운동 이후 여자는 쓰개치마,장옷을 다 벗어던지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즉 이후부터는 아주 완고한 집안 여자만을 빼놓고는 여자들이 쓰개치마, 장옷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42) 이렇게 여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주장하던 사회적인,민족적인 문제들에 여성들이 관여할 수밖에 없었을 때, 여성들은 종래의 자신을 억누르던 억압으로부터 스스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남자들이 하는 일에 동참하거나,보조자의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고, 주체적인 결단이나 독립적인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경험은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주었고 종래의 억압적인 구습에서 해방시켜 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여성들은 여성들이라고해서 무자비한 고문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석방된 소녀 죄수의 이야기는 일제가 행한 만행을 여실히 드러낸다.

 

"오늘(1919년 3월 28일) 21세 가량되는 한 여자가 찾아와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돌아갔다. 나는 평양에서 3월 2일에 체포되어 경찰서에 구금되었었다... 거기에는 오직 12명의 감리교 여자들과 2명의 장로교 여자 및 1명의 천도교여자만 남았었다. 감리교여자 중 세사람은 전도부인이었다. 그런데 경관들은 채찍으로 우리 여자들을 내리치면서 옷을 다 벗기고 벌거숭이로 여러 남자들 앞에 세워 놓았다. 경간들은 나에게 대해서는 길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는 죄목밖에 찾지 못했다. 그들은 내 몸을 돌려가면서 마구 구타해서 전신에 땀이 흠뻑젖었다.

그것을 보고 이들은 '너 몸이 더워졌구나'하면서 내 벌거벗은 몸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 양손을 뒤로 잡혀져서 꽁꽁 묶였다. 그리고는 내 알몸을 사정없이 때리고 땀이 흐르면 전처럼 또 찬물을 끼얹곤 했다. 춥다고 말하면 그때는 담배불로 내 살결을 지진다(어떤 이는 단 인두로 몸을 지지기도 했다)...우리들은 성경책을 다 빼앗기고 기도는 고아간에 서로 말도 못하게 했다. 사람으로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욕과 조롱을 우리는 다 받았다..."43)

 

그러나 여성들은 용감하였다. 기전여학교 결사대원들의 재판과정에는 일본검사가 '누가 너희를 시켜 이런 일을 하였느냐?'하자 여학생들 대답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전국이 의를 지팡이 삼아 일어나 만세를 일제히 호창한 것이어늘,시켰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너희는 진실로 세계적 정세에 어두운 섬 사람이다"44)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