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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등(氷燈) - 반숙자

Joyfule 2015. 6. 29. 22:08

 

환상의 아시아 빙등 광장

 

빙등(氷燈) - 반숙자


음성에서 충주로 가는 37번 국도를 달리다 보면 야트막한 언덕에 집 한 채가 있다. 나는 그 집을 ‘솔베이지의 집’이라 부른다. 기억의 연상작용이랄까. 눈 덮인 겨울 그 언덕에 눈길이 닿으면 불현 듯 그리그의 ‘솔베이지’ 노래가 귓가에 맴돈다. 그만큼 외딸고 고즈넉해서 사람이 사는가 싶기도 하고 기다림의 진액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솔베이지는 희망이기도 하고 위안이기도 하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 그 여름날이 가면 또 세월이 간다 /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 내 님일세 /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기다림은 사랑에서 출발한다. 누구나의 가슴에 화인으로 남은 사랑은 세월을 거스르고 젊어져 사심을 자극하고 감성을 부채질한다. 예술은 이런 토양을 먹고 자란다.

 

이 노래는 기다림을 안고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다. 노래의 배경이 노르웨이여서 그 긴 겨울의 이미지가 더 가슴을 시리게 한다.

 

12월이면 오후 세 시에 해가 떨어져서 춥고 긴 북구의 밤이 계속된다. 눈 쌓이고 인적 없는 밤. 기약 없이 떠난 페르퀸트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그녀에게는 밤은 더 길고 외로움은 한없이 깊다. 그 긴 겨울이 지나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세월은 가지만 또 겨울이 와도 떠난 연인은 돌아오지 않고 눈은 쌓이고… 눈을 들면 보이는 것은 만년설이요 빙하의 싸늘한 표정만 가득하다.

 

이 노래는 페르퀸트 조곡에 나온다. 헨리크 입센의 환상시극에 그리그의 음악이 함께하여 이루어낸 명품 중에 명품이다. 꿈을 그리며 방황하던 몽상가 페르퀸트는 결혼식장에서 남의 신부를 유괴하여 산으로 달아난다. 신의 마왕과 계약을 하고 환락을 쫓던 중 산골 소녀 솔베이지를 만나 헌신적인 사랑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곧 그녀를 버리고 공상적 여행을 떠나 모로코, 알비아, 캘리포니아를 전전하며 거부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다가 국경에서 산적을 만나 돈을 다 빼앗긴다. 백발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어머니는 이미 죽고 오두막에 백발이 된 솔베이지가 그를 맞는다. 병들고 지친 페르퀸트는 솔베이지의 무릎에 머리를 누이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평화스런 죽음을 맞는다. 대충 이런 내용인데 내게 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솔베이지의 기다림이다.

 

사람은 기다림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직장에 간 남편을 기다리고. 객지에 사는 자식을 기다리고, 가을을 기다리고, 오늘보나 나은 내일을 기다리며 평생을 산다. 무엇인가를 기다림은 오늘을 견디는 힘이 될 수도 있다. 그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만큼 절실한 일이 또 있는가. 입센은 인간의 보편성을 염두에 두고 솔베이지를 창조해 기다림의 심연으로 초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그리그는 노르웨이 베르겐에서 출생했다. 노르웨이의 민속전통에 뿌리를 둔 그리그의 음악은 섬세한 서정감각으로 유명하다. 페르퀸트에 나오는 솔베이지 노래에도 북구의 청결한 서정과 순수한 서정성이 색조 깊은 정취로 섬세하게 사람들 감성을 파고든다. 아마도 입센이 그리그가 아닌 다른 누구에게 음악을 부탁했다면 오늘날과 같은 사랑은 받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솔베이지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빙등을 생각한다. 빙등을 처음 본 것은 1990년대 초 스위스의 융프라우에 갔을 때다. 얼음동굴에 들어가니 조각품이 있고 오색등이 밝혀져 환상의 나라에 온 듯했다. 그 후 우리나라에도 빙등축제가 열리기 시작했다. 겨울의 화천에 가면 얼음과 빛의 향연을 볼 수 있다. 원래 빙등축제는 하얼빈의 역사이나 이제는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나라에서 빙등축제를 볼 수 있다. 얼음으로 광화문을 조각하고 이순신 장군, 선녀와 나무꾼도 조각했다.

 

특이한 것은 축제장의 낮과 밤의 세상이 완연 다른 것이다. 낮에는 흰 조각상들뿐이다. 겨울 무채색 하늘을 이고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선 얼음조각들은 마치 깊은 잠에 취해있어 영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밤이 되자 화천광장은 수많은 색으로 생생하게 생명을 부여받아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것은 시극과 음악의 조화로도 보였다. 입센의 페르퀸트 환상시극을 시극으로만 읽는 것과 그리그의 작곡이 붙어 노래로 들을 때 느껴지는 작품성은 현저하게 다른 것과 같다. 음악이 솔베이지를 더욱 가엾게 포장하고 기다림을 안고 사는 여인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빙등은 얼음 속에 조명을 넣어 빛이 나게 만든 얼음 등이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을 밝히는 기능을 가진 ‘등’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빛나는 것에 만족해야 하는 예술품이다. 밖의 어둠을 사르는 등이 아니라 안의 어둠을 밝히는 등이라고 할 때 예술은 자기완성에 초점을 맞추는 창조의 작업이 우선되어야 함을 은유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솔베이지의 집’은 내 창작의 심연을 자극해서 생명의 불을 밝혀주는 빙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