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복음이 내 안에 들어왔을 때의 반응에 따라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사전적 의미로 좋은 소식을 말합니다.
이 복음을 접함으로 인하여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며
결국, 구원받게 하는 아주 위대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복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복음 1장 1절)
그런데 복음이라는 것을 성경책을 읽는 것으로만 그친다면
그것은 복음을 접한 게 아니라, 성경책에 인쇄된 복음의 내용을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머리로 읽기만 하면 아무 변화도 없이 그냥 내용에 동의하는 수준에 그치게 됩니다.
자신은 구원받았다 하며 맹목적인 확신에 빠집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평소 일반적인 삶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여
지식 따로 삶 따로의 기형적인 영성으로 평생을 보낼 뿐입니다.
이런 분들은 사실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아는 것뿐입니다.
이런 길로 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합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중략)....................................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라디아서 6장 3-8절)
말씀은 믿음의 씨앗인데, 흙속(복음을 받은 사람)에 씨앗이 들어가면
발화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한 영적 원리입니다.
그런데 씨앗만 들어가고 삶 속에서 열매가 없다면
살아있는 말씀의 씨앗이 들어간 게 아니라, 죽은 지식만 들어갔다든지
마음의 밭이 황폐하여 복음의 씨앗이 발화할 여건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주님께서 강권적으로 만지시는 은혜만 바랄 뿐입니다.
복음을 접한 것과 아는 것의 차이는 생명과 사망의 차이입니다.
복음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접한 사람은 말씀에 부딪혀
내 영이 심히 동요되어 나를 뒤흔드는 영적 지진이 일어납니다.
복음에 비추임 당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의 죄 된 모습에 괴로워합니다.
지금까지 인식 못 하던 내 악한 죄에 대하여,
주님의 존재에 대하여,
자신의 삶에 대하여,
간절한 회개에 대하여,
거듭남에 대하여,
자신의 영적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이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게 되므로 통곡하고,
그렇다면 나는 어이할꼬 하며 애통하게 가슴을 치게 됩니다.
세상과 주님께 동시에 걸치고 있는 자신의 양다리를 원망하며
어떻게 하면 주님께로만 기울까 애통의 심한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즉, 나는 어찌해야 하나 하며 심적으로 강하게 요동합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 받기 위해 주님을 간절히 찾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회개하고 거듭나고 주님을 사랑해야 구원받는다는데
그렇다면 어찌해야 회개하고 거듭나는지에 대하여 몸부림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생명의 복음을 접한 분들의 일반적인 반응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도행전 2장 37절)
그리고 이런 분들은 이 상황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갈급한 심령으로 주님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귀한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누가복음 15장 18-20절)
이런 분들의 모습은 참으로 귀하고 그 수가 많지 않지만,
주님께서 이들의 심령을 살피시며 얼마나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마치... 집 나간 탕자인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학수고대 기다렸다가
아들이 돌아오자 큰 기쁨으로 아들을 안아주면서 입 맞췄듯...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장 20절)
이런 분들은 지금 통렬하게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갈 생각이
마음속에 굳혔던 탕자의 심령과 아주 유사한 상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이 아버지를 힘들게 한 죄인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으므로
자신의 악한 죄를 아버지께 용서받으려는 가난한 심령이 되어 지금까지 세상에 취해있던 자신을
과감히 버리고(부인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께로 다가가는 아주 귀한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주님은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살아있는 생명의 복음을 접한 사람들은 이런 모습입니다.
말씀 자체가 생명이고 주님이시기에 이 복음(주님을)을 접한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고 구원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는 마치 애굽(죄에 찌든 세상)을 뒤로하고 홍해를 건널 준비(성령으로 거듭날 준비)가 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고기와 다양한 채소를 먹었던 애굽(세상)이 그리워
그 미련 때문에 뒤로 시야를 돌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애굽의 고기와 채소를 여전히 먹으면서(세상적으로 살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의 보혈 피와 은혜로 이미 홍해를 건너 가나안에 도착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이는 공중권세 잡은 마귀에게 철저히 속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홍해가 아니라, 홍해 근처에도 간 적이 없고
지금도 여전히 애굽(죄된 세상 속에)에 취해 누리면서 그 치부를 정당화하고 가려줄...
자신의 유리한 상황에 맞게 스스로 만든 가짜 그리스도의 은혜와 보혈 피를 부적처럼 붙잡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을 믿는 게 아니라, 보혈 피와 은혜만 믿는 것입니다.
여기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이는 곧 사망만이 기다릴 뿐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의 보혈 피와 은혜는 내가 악한 죄인이란 걸 철저히 인정하고 애통한 마음으로
가슴을 치며 간절히 회개한 귀한 사람들에게 뿌려지는 거룩한 피의 은혜입니다.
자신이 진정 살아있는 생명의 복음을 접했다면 주님의 권위 앞에 무릎 꿇고 아주 겸손하게 낮아지십시오.
뜨거운 마음으로 무조건 매달리십시오.
이 사망의 죄 된 세상에서 나를 건져달라고 통곡하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간섭하지 않으시면 나는 사망하오니 살려달라고 하십시오.
이런 모습에 주님은 얼마나 흥분하며 기뻐하시는지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그 시기가 문제일 뿐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
주님의 아들딸이 되며 제자가 되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산모가 해산할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우나 아이를 해산하고 나면 그 고통은 다 사라지고
그 아이를 보며 얼마나 큰 기쁨에 휩싸이겠습니까...
이를 지켜보는 주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도 기쁜 사건입니다.
짧은 인생... 뒤를 돌아보며 미련을 갖지 마십시오.
애굽이란 죄 된 세상에서 시선을 돌리십시오.
잘 취하도록 숙성된 술과 고기와 다양한 채소가 필요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만이 필요합니다.
세상 것은 당시에는 배부르고 시원하게 만족을 주지만 그때만 지나면
또 목마름이 반복되며 끝내 우리를 살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수입니다.
생명수이신 주님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만을 간절히 붙잡으십시오.
모든 생명의 근원이 그분에게 달렸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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