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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Joyfule 2018. 3. 2. 00:22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서상륜의 생애 (1)

"一八七三年 (癸酉)頃에 我國商民이 中國奉川에 往하얏다가 英國 스카트란드 長老會 宣敎師의게 福音을 始聞하엿고 一八七六年(丙子)에 我族數人이 奉川 宣敎師 매킨다일의게 洗禮를 밧고 其後에 該宣敎師의 指導를 밧아 金鎭基, 李應贊 數人은 奉川에 滯在하야 漢文福音을 鮮文으로 飜譯하야 木版으로 印刷하고 徐相崙 李成夏等은 本國 賣書로 任命되야 潛縱으로 傳道케 할새 徐相崙氏난 先히 義州로 潛入하다가 鳳凰城 柵門에 至하야 當時 巡捕의게 搜索되야 聖書가 露出된지라. 卽時 別定所에 拘禁되니 當時 國禁에 依하면 生命이 危境에 至하얏더니 適其 戚屬인 本府執事 金孝順이 此를 見하고 警愕周施하야 當夜四更에 貰馬馳送으로 死地를 逃脫케 하니라. 後에 京城에 潛到하야 福音傳布키를 經營하더니 奉天 宜敎師 로스 요한이 上海 聖書公會에 委託하야 鮮文으로 譯刊한 聖經 六千餘本을 朝鮮 京城 徐邸에 輸送케 한것이 仁川 海關에셔 發覺되야 押收하고 不測의 事가 生케되엿더니 適其時 外衙門協辦 穆仁德의 婦人은 篤實한 信者라. 傳道에 有意하더니 로스牧師의 致書囑托으로 穆協辦이 徐相崙을 密招하야 事由를 聞知하고 政府에 善言하야 無事이 되엿스며 書箱은 徐邸에 送致됨으로 徐君은 隱密히 傳道에 從事하다가 其後에난 元杜尤牧師의 來京을 機會로 하야 京城에셔 傳道의 門이 漸開케 되니라."
차재명. 앞의 책. 8쪽.

 

기독교를 말할 때 베드로와 바울을 빼놓을 수 없는 것처럼 한국 교회를 말할 때 서상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자이며 전도자이며 교회 설립자이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의 베드로라고 할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귀츨라프와 토마스 등 외국 선교사들이 굳게 닫힌 쇄국의 문을 열기 위하여 안간힘을 쏟았고, 순교의 피를 흘리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열지 못한 은둔의 문을, 생명과 생애를 송두리째 바치는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굳게 닫힌 문을 뚫고 들어와 복음을 이 민족의 가슴에 심은 장본인이 바로 서상륜이다. 그는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였고, 어렵게 출판한 성경을 품에 품고 국경을 넘어 제 2의 고향인 소래와 서울을 왕래하며 복음의 씨를 뿌림으로써, 이 강산에 역사적인 민족 교회를 탄생시키는 위업을 이루었다. 이런 분이 한국 교회에 있었다는 것은 매우 자랑스런 일이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은 세계 선교사상 유래 없는 자생적 교회를 가질 수 있었고, 내 손 내 힘으로 세운 [민족 교회]를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 근대사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한 이광린 교수는 이 경이적인 사실에 대하여 "언더우드나 아펜젤라는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이 아니라 즐거운 수확을 거두기 위해 온 것이라 볼 수 있다"고 논평하였고,
(이광린(1984.4.28) "여명의 개척자들" 경향신문).

민경배 교수는 "언더우드나 처음 선교사들은 세례의 적격을 문답하고 성례(聖禮)를 집행할 목회의 대임을 맡았다 함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경배(1982). 한국기독교사. (개정판). 서울: 대한기독교출판사. 172쪽).


언더우드 자신도 이 사실을 시인하기를 "한국 최초의 교인들이 나의 현전(現前)에서 그들의 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거의 전부가(Almort entirely) 당신의 매서인(賣書人) 서(徐)씨의 결실들입니다."라고 존 로스에게 보낸 편지에 기록하고 있다.
(민경배. 앞의 책. 16쪽).

 

1) 어린 시절

세계 선교사상 유례가 없는 업적을 남긴 서상륜은 1849년 7월 19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서석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생일을 7월 27일이라는 학자도 있다.)

여기서 잠시 족보에 명시되어 있는 그의 가문을 소개를 하고자 한다. 그는 대구 서씨(大丘徐氏)로서 증조부 시절 의주로 이거한 듯하다. 대구 서씨의 족보에 의하면, 서상륜의 증조부 서유묵(徐有默)의 묘소가 의주로 되어 있고, 그 이상 3대조의 묘소는 금곡동(金谷洞)으로 되어 있다. 서상륜의 부친 이름은 족보와 구청에서 발행한 호적에 서석순(徐奭淳)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사는 모두 서필순으로 기재하고 있다. 반드시 수정하여야 할 부분이다.

그의 가문은 생활이 유족한 부유층에 속하였으나 부친이 수인성 질환인 콜레라로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닷새를 사이에 두고 모친마저 별세한다.
(박완, 김광수 등은 모친은 생존한 것으로 기록하나 사실과 다르다).

그러니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어린 두 형제의 앞길에는 암운(暗雲)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이 때 형의 나이는 불과 14세, 동생 상우는 11세에 불과하였다.

(서경조의 본명은 상우(相佑)이고 경조(景祚)는 그의 호이다. 한국 교회는 호를 본명처럼 사용하고 있다.
(서상륜(1901.9.19). "셔션생 샹륜의 경력" 그리스도신문. 306쪽)

 

그들은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 때까지 형제는 한문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으나 부모의 별세로 형만 서당공부를 계속하였고, 동생은 자습으로 한학을 익혀야 했다. 서상륜이 받은 한문수업은 먼 훗날을 예비하시는 주님의 섭리였다. 이 때 갈고 닦은 한문 실력은 수세(受洗) 후 성경 번역에 쓰임이 되었고 로스는 그를 "누가복음의 공역자"라고 극찬하였는데, 그 까닭은 그의 한문 실력이 걸출하였기 때문이다. 서경조의 손자 서재현도 "큰 할아버지는 한학에 능통하였을 뿐 아니라 글씨도 명필이어서 우리도 그 분에게 글씨 공부를 많이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글씨도 명필이었던 것같다. 그리고 그의 좋은 글씨체는 후에 한글 성경 발간에 크게 쓰임을 받는다.

 

2) 로스의 고려문 전도

스코틀랜드 교회가 중국으로 파송한 로스(John Ross)는 만주 지방을 선교지로 정하고 활동을 하였다. 1872년 만주로 온 그는 어학 연수를 마친 후 만주지방 순회전도의 길에 나선다. 이 때 고려문에서 우연히 한국인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중국인과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한국인들에게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게 된다. 그의 제 1차 고려문 전도는 1873년으로 추정된다.

(로스 John Ross; 한자명 羅約翰 1842-1915. 스코트랜드 장로교 목사, 중국 선교사. 중국(1872-1888)에서 선교하는 동안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갖고 이응찬, 이성하, 서상륜 등에게 세례를 주고 한글 성경을 번역 출판하다.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로스의 고려문 전도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
새문안교회70년사: 1차전도 1873년 가을, 2차전도 1876년.
김양선: 1차전도 1873년, 2차전도 1874년.
이영헌: 1차전도 1873년, 2차전도 1874년.
김정현: 1차전도 1874년 10월 9일, 2차전도 1876년 4월말.
민경배: 1차전도 1874년 10월, 2차전도 1876년 4월.
김광수: 1차전도 1873년, 2차전도 1874년.
곽안전: 1차전도 1873년, 2차전도 1874년 봄.

다음 해(1874년), 그는 다시 고려문을 방문하여 의주 청년들을 한국어 어학선생으로 초빙, 심양의 선교기지로 대동한다. 이 때 그와 동행한 의주 청년은 이응찬,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등 4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이응찬은 로스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1. 매켄타이어 John Macintyre; 한자명 馬勒泰. 1837-1905. 스코트랜드 연합 장로교회 중국 선교사, "로스, 서상륜 공역 성경"의 공로자. 로스가 안식년으로 귀국시 한글성경 교정과 출판에 힘쓰다.
2. 서상륜은 [예수 성교가 한국에 시입한 역사]라는 글에서 이응찬은 1874년에 로스목사를 만났고,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이일세 등은 1875년에 맥킨타이어를 만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국땅 만주에서 중국에 파송된 선교사 로스를 통하여 복음의 씨가 한국 청년들 가슴에 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로스에게 복음을 듣고 신앙을 가지게 되며, 드디어 로스의 매부인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에게 세례를 받는다.


 

1. 의주 4청년의 수세에 대한 각기 다른 주장들.
1) 김양선: 1876년 맥킨타이어에게 4인 모두 수세.
2) 백낙준: 1876년 이응찬만 세례를 받음.
3) 사기 상: 1876년 봉천에서 수인이 세례를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