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3)
5) 권서의 출발
성경을 번역 출판한 서상륜은 우선 남만주 일대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의 남만주 전도는 고국 복음화를 위한 전초적인 준비작업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민경배 교수는 "서상륜은 이 성서를 가지고 다니면서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남만주 지역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에게 성의껏 반포하였으며"라고 하였고, 로스는 그의 보고서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 사실을 밝히고 있다.
"上海에 있는 貴 주재원 (성서공회)을 통해서 徐氏는 3개월간 勸書 行路에 나셨다. 그는 朝鮮 전역을 여행할 수 있지만 우선 鴨綠江 연안부터 시작하였다."
(민경배(개정판). 앞의책. 169쪽).
서상륜의 남만주 전도에 대하여 역사는 1882년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밝혀 주는 부분이 없기 때문에, 어디서, 어떤 활동을 통하여,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는 앞으로 계속 연구할 숙제로 남겨 두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국으로 돌아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연단 과정으로 이런 수순을 밟게 하신 것만은 확실하다.
6) 국경을 넘다
쇄국으로 굳게 닫혀 있는 은둔의 고국에 들어와 어둠과 고통에서 신음하는 동족에게 하늘의 소식을 통하여 희망을 주는 것이 그의 바램이요 꿈이었다. 그리하여 1883년 이른 봄, 로스로부터 권서(勸書)의 직임을 받고 드디어 고국 전도의 장도에 오른다.
그의 귀국 년도에 대한 제 견해
1883년: 김광수, 이장식, 박용규, 조남선, 민경배, 김득황,
1883년 초: 이찬영
1883년 이름 봄: 곽안전, 김양선.
1883년 봄: 김성준, 이덕주.
1883년 가을: 박성겸, 박완.
그 당시 한국은 기독교는 물론 성경도 국금(國禁)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런 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한문성경 등 100여권을 지참하고 입국을 도모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고 결행하였을 뿐 아니라 은밀히 숨어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한중 교역로를 통하여 정정당당하게 입국을 시도한다. 이 때 그가 넘어야 할 첫 관문은 압록강에서 120리 정도 떨어진 국경의 고려문이다.
고려문이란 봉황성 바로 밑의 작은 촌 거리로서 '루카'라고도 하고 책문(柵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청태조가 중원을 통일한 후 한국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장책을 두른 후 설치한 6문중 하나이며, 한국의 사신이나 상인들의 내왕은 오직 고려문으로 제한함으로써 한·청 양국의 유일한 통로가 되었다. 그는 이 고려문을 통하여 정정당당하게 입국을 시도한 것이다.
그가 어려운 고비를 넘어 고국에 입국하는 데 성공한 후의 일이지만, 이성하는 복음서를 가지고 압록강 연안의 구련성(九連城)까지 왔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입국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며칠간 기회를 엿보다가, 휴대하였던 복음서 전부를 불에 태워 압록강에 뿌리며 "이 물을 마시는 사람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은 매우 유명한 고사이다.그 후 이성하도 귀국하여 (1884년) 로스가 보내준 성경을 가지고 의주지방에서 열심히 전도를 했다.
이런 위험한 시절이지만 호협하고 담대한 성격에 믿음까지 겸한 서상륜은 두려움 없이 고려문 통과를 고집하며 이에 도전한다. 그는 그 당시의 심정을 후세 사람들에게 간증할 때 결코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다만 간단하게 "나는 두렵지 않았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6문은 威遠, 英額, 旺淸, 城廠, 遼陽, 高麗임.
차재명. 앞의 책. 8쪽.
李永獻(1978). 韓國基督敎史. 서울: 컨콜디아사. 64쪽.
E.Wagner. 앞의 책. 95쪽.
서상륜 자신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놓았다.
"또 로쓰목사의게 감동하샤 죠션국에 젼도할 사무를 맛기시매 쥬압희셔 로쓰목사와 그 부인과 함끠 업대여 쥬끠 도아주시며 보호하심을 긔도하고 서로 작별한후 내가 봉텬부에셔 떠나 바로 죠션국 한양으로 올라와셔 석달 동안은 남의게 붓쳐 잇다가 남대문안 창동으로 집을 졍하고 올맛나이다. 그때는 쥬강생 일쳔 팔백 팔십년 봄즘 됨나이다."
(서상륜. 앞의책. 306쪽).
기도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였을 때 응답해 주시는 것을 믿은 그의 순수한 믿음이 이런 거대한 일을 해낼 수 있게 한 것이다. 김양선은 이 때의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Ross牧師는 傳道人의 任務를 完遂할 수 있도록 훈련을 마친 후 파송하였다. 奉天敎會에서 派送式을 엄숙히 거행하였다. ....(중략)....친구들도 그를 奉天 郊外에 있는 十里河까지 전송하였다."
이상과 같이 하여 서상륜은 죄와 우상으로 얽혀 있는 삼천리에 복음의 사도로 보내심을 받는다. 아직 선교사의 발자국도 나 있지 않은 영적 처녀지에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해 자기 손으로 번역·출판한 복음서를 들고 찾아 온 것이다. 마침내 고려문에 도착한 그는 중국 관헌의 불심검문에 걸려 금서(禁書)인 성경이 발각되자 예측하였던 대로 절망적인 사항에 직면하게 된다. 성경은 압수되고, 자신은 투옥되었으며, 예상할 수 있는 일은 죄인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陵遲處斬)을 당하는 비극이 그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 때 그는 어떤 심정으로 이 현실을 받아들였을까? 믿음의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순수한 믿음을 가진 그는 이런 때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 주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도우셨다. 예루살렘 감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출한 주님은(행12:1-19) 한국 복음화의 위대한 사명을 가지고 입국하던 그를 별정소의 옥중에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기적적으로 구출해 내신 것이다.
그 사역은 이러하다. 한국측 별정소에 근무하는 관리 김효순과 김천련은 의주부 집사로 별정소에 파견 근무하던 중 서상륜의 투옥됨을 보고 대경실색하였다. 이들은 황급히 말 두 필을 준비하여 야간에 탈옥 도주케 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 김효순이 안내자가 되어 고향까지 인도해 준다. 이런 숨막히는 순간에도 사명감에 투철한 서상륜은 압수당한 복음서를 찾아 줄 것을 강청하였고 마침내 10여 권을 품에 간직하고 떠나게 된다.
7) 세 가지 문제
여기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때의 형편을 알리는 사가들의 의견 몇 가지를 정리하도록 한다.
첫째, 고려문 별정소에 있던 한국 관리는 누구였을까?
둘째, 서상륜은 과연 고향 의주에서 복음을 전하였는가?
셋째, 고향을 떠난 그는 어디로 갔는가?
이 세 가지 문제는 교회사를 다루는 학자에 따라 각기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에 큰 혼란을 일으키는 부분이다.
첫째, 고려문에 있던 한국 관리는 과연 누구이기에 자신의 신변이나 직업을 포기하면서 서상륜을 야간도주하도록 도와주었을까? 우선 이 상황을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한 <사기 상>의 내용을 다시 소개한다.
"卽時 別定所에 拘禁되니 當時 國禁에 依하면 生命이 危境에 至하얏더니 適其 戚屬인 本府 執事 金孝順이 此를 見하고 警愕周施하야 當夜四更에 貰馬馳送으로 死地를 逃脫케 하니라"
(차재명. 앞의책. 8쪽).
위의 글에서 <사기 상>의 편집인은 그 관리들은 서상륜의 [戚屬] 즉 친척관계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 때문에 많은 사가들은 그의 도주를 방조한 사람은 그의 친척이라고 한다.
(박용규, 김광수, 김양선, 곽안전, 이영헌,김득황 등이다).
그러나 또 다른 주장도 없지 아니하다. 즉, 고향 친구, 고향 사람, 혹은 하인등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주장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서상륜의 가문에서 전해 오는 구전을 소개하면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별정소 관리의 신분대한 의견들.
고향친구: 이진호 앞의책 142쪽.
고향사람: 이덕주 앞의책 474쪽
하인: 박완 앞의 책 119쪽
"그 날 밤 큰 할아버지를 구출해 주신 분은 본래 우리 가문의 하인으로 있었던 사람이며 큰 할아버지가 옥중에 갇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말 두 필을 세내어 그 밤으로 탈옥 도주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 한 필은 큰 할아버지가 타시고 한 필은 그 분이 타고, 그리고 고맙게도 그 분이 직접 길을 안내하여 압록강을 무사히 건너 의주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서재현 증언_.
둘째, 서상륜은 고향 의주에 도착하여 그 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이 사실을 처음 주장한 사가는 클라크(Allen D. Clark, 한국명 곽안전)이다.
"서상륜이 국경을 넘어 자기 집으로 들어간 후 우선 가족과 친척을 위시하여 이웃에게 전도하며 복음을 전한 결과 반 년도 못되어 수십 명의 신자를 얻어서 주일마다 서상륜의 집에 모여서 성경을 읽고 그것을 강해하였다. 말하자면 이 곳은 한국에 있어서의 최초의 교회였던 것이다."
(곽안전(1961). 韓國敎會史.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4쪽).
이 기록을 후대의 학자들이 인용하여 "서상륜은 고향에서 전도하여 10여 명의 결신자를 얻었다"고 하며, "한국의 최초 교회는 의주에 있는 서상륜의 집에 설립되었던 것"으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가 고향을 떠나 황해도로 피신한 것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고 주변 정세가 점차 험악해지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 후의 일"이라고 한다.
(박성겸. 앞의 책. 39쪽).
정규호(1983) 한국장로교회사. 한국복음문서협회. 22쪽.
이영헌. 앞의 책. 64쪽.
(김광수. 앞의 책. 32쪽).
박용규. 앞의 책. 39쪽.
백낙준. 앞의 책. 51쪽.
이런 가능성은 희망적인 사항일 뿐 그 때의 정황으로 보아 고향에 느긋하게 눌러 앉아 전도를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평안하게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탈옥 도주하여 죄인으로 돌아 왔으며, 관가의 수색은 곧장 뒤를 따라왔을 것이다. 이런 형편에서 고향에 체류하며 복음을 전하였다고 추측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이런 때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선 현장을 피하는 길이 있을 뿐이다. 그는 결코 가장 쉽고도 안전한 방법을 외면하면서 모험을 강행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 사실에 대하여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구전은 사가들의 추측보다 매우 합리적인 방면으로 전해오면서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그의 손자 서재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 때 큰 할아버지는 집에 도착하자 곧 지금까지 되어진 모든 형편을 할머니와 동생에게 고하고 황해도 봉대로 내려가 은신할 것을 말하고, 동생 경조에게는 속히 가산을 정리하여 할머니를 모시고 봉대로 내려 올 것을 부탁하였으며 그 길로 그를 안내한 분과 함께 말을 총총히 몰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교회사에 "고향에서 전도하기가 두려워 장연 소래로 와서 전도하여 교회를 세웠다"는 기록과 상륜 자신이 남긴 다음의 기록을 연결하여 생각할 때 그의 의주 전도는 없었던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蔡基恩(1977). 韓國敎會史.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38쪽}.
"고향에는 몸을 의탁할 곳시 업게 되매"
(서상륜. 앞의 책. 306쪽).
셋째, 그가 자신의 몸을 숨기기 위하여 찾아간 곳은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구미리에 있는 봉대이다. 그가 이 곳을 은신처로 선택한 이유는 그 곳에 외육촌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분과 서상륜과의 관계에 대하여 엇갈리는 많은 견해가 있다. 혹은 삼촌, 혹은 오촌 당숙, 혹은 친척 등이다. 그러나 가문에서는 외육촌으로 알고 있으며 이 분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봉대 할아버지가 전부이다. 그를 봉대 할아버지로 부르는 이유도 명확하지 않다. 봉대지기이었는지, 아니면 봉대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봉대 할아버지로 통하는 것이 전부이다.
상륜은 비록 은신처를 찾아 봉대로 오기는 하였어도 쓸쓸한 이곳에 한가롭게 머물러 있을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호탕한 성격과 남을 사로잡는 언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넓은 견문, 그리고 고국 복음화를 위한 뜨거운 사명감 등은 그로 하여금 곧 행동을 개시하여 봉대에서 약 20리 정도 떨어진 소래를 드나들면서 소래의 유지 김윤방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아 소래에서 복음도 전하고 생활의 기반도 잡게 되면서 몇 명의 결신자와 함께 관가의 눈을 피하여 은밀한 곳에서 예배를 드리니 이것이 소래교회의 시작이며 그의 일차적 소원이 달성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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