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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Joyfule 2018. 3. 3. 00:26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2)

 

3) 회심과 수세

부모의 별세로 기울어진 가세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 서상륜은 20여 세의 젊은 나이로 상업에 종사하였는데, 국경을 넘어 만주를 왕래하며 인삼을 판매하는 매약행상이 그의 직업이었다. 그가 30세 되던 1878년의 일이다. 동생 경조와 함께 상업차 영구(營口)에 갔을 때 우연히 열병에 걸려 생명에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그 때의 일을 본인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나는 1878년 戊寅에 아우와 함께 장사차 營口에 갔다가 熱病에 걸려 危至死境이 된지라"

그를 옆에서 지켜보던 로스는 "자살을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위기에서 그를 구출하신 분은 이천만 백의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그릇으로 선택해 놓으신 주님이시다. 서상륜이 위독하다는 소문을 듣고 고향친구 몇 명이 그를 찾아와 선교사가 경영하는 병원에 입원시킨다. 이 병원은 아일랜드 교회가 만주로 파송한(1869년), 의료선교사 헌터(Joseph M. Hunter ?-1884)가 경영하는 병원이었다. 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한국의 안드레"라고 할 수 있는 멕킨타이어에게 끈질기게 전도를 받았으며, 결국 그는 병이 완쾌되면 예수를 믿기로 약속한다. 월여 동안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가 주효하여 완쾌되자, 약속대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세례를 받는다.

 

그의 수세연도에 대하여 여러 주장들(1873, 1879, 1881, 1882, 1884)이 있으나, 크게 나누면 1879년 이전과 이 후가 될 것이다. 우선 서상륜 자신의 말을 들어 보도록 한다.

"일년젼에 마근태 목사가 객뎜에셔 죽을 인생을 그 갓치 구원하여 내셧기로 내가 아모리 무인졍하고 뮤념치한 놈이라도 그때에 그 애쓴 은공과 약식갑(저자주: 藥食값) 걱졍으로 말한즉 마근태 목사가 말삼하시기를 네 생각은 됴흔 마음이나 재물이 업사니 할 수 업거니와 네가 진실노 고마온 마음이 나거든 하나님께 감샤하고 그 말삼대로 예수씨를 밋으면 이에셔 더 깃붐이 업겟다 하시더니 지금 로쓰목사가 또 이 갓치 참 사랑으로 권하시니 예수씨를 밋난 사람은 참 하날 나라 백셩이로다. 이 갓치 생각할 때에 내 마암이 감동하야 고맙고 반가온 마암이 니러나거날 이에 로쓰목사를 차져보고 내 마암이 반가옴과 이젼 불의를 행한거시 매우 붓그럽고 졀통하야 뉘웃난 말을 하니 로쓰목사가 묵묵히 듯다가 갈아대 그려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샹관이 매우 즁한지라 그리스도씨 압희 나아와 그 명하신 대로 밋고 슌복하는 거시 맛당하다하고 이에 셰례를 베풀매 내가 매우 반가히 그리스도 압희 나아와 쟉뎡하고 목사와 대쳥국 여러 교우들 압희셔 셰례를 밧고 쥬의 무리가 되엿나이다. 그 때 내가 자셰히 긔억지난 못하나 짐작건대 쥬 강생 일쳔 팔백 칠십년간이외다."

 

여기 서상륜의 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첫째, 그가 매킨타이어의 전도에 쉽게 감동을 받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동기이다. 그것은 어려운 질병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고마움에 기인하고 있으며, 이런 큰 은혜를 무료로 제공받았기에 더 큰 부담을 안게 되었고 감격하고 있다.

 

둘째, 그 고마움과 감격이 세례로 이어지는 과정이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로스를 찾아갔고 이것이 바로 세례로 연결된다. 이 부분을 서상륜은 "일년젼에 마근태 목사가 객뎜에셔 죽을 인생을 그 갓치 구원하여 내셧기로"라고 표현하였다.

 

셋째, 서상륜 자신은 자신의 세례연도에 대하여 정확하게 기억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다만 "짐작건대 쥬 강생 일쳔 팔백 칠십년간이외다"라고 하였지만 그의 언질은 매우 중요한 몇 가지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제공한 단서들은 (1) 자신은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요, (2)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이 1년 전의 일이라는 것이요, (3)"일쳔 팔백 칠십년간"이라고 한 사실이다.

 

이 말들이 왜 그리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면, 그 연대가 로스의 안식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스는 안식년 휴가를 위하여 1879년 5월에 본국으로 들어갔고, 1881년 5월에 만주로 귀환한다. 따라서 그가 로스에게 세례를 받았으면 1879년 5월 이전이든지 1881년 5월 이후가 될 것이다.

서상륜은 분명히 말하기를 고침을 받은 지 일년 만에 로스를 찾아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고, "일쳔 팔 칠십년"대를 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로스가 영국에 들어가기 전에 세례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서상륜은 1879년에 세례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

 

4) 성경 번역

[로스역 성경]하면 어감상 로스 개인이 번역한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되나 사실은 전혀 다르다. 다만 로스가 한글성경 번역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일 뿐이며, 실은 여러 사람들의 숨은 노력의 결정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서상륜이 세례를 받기에 앞서 만주에는 백홍준, 이성하, 김진기 그리고 이응찬 등이 멕킨타이어에게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았으며, 성경 번역도 이미 착수하고 있었다. 세례를 받은 서상륜도 멕킨타이어의 집에 유하면서 성경 번역에 뒤늦게 참여한다. 그러나 국내 자료에 의하면 이익세, 최성균 등이 성경 번역사업에 가담하고 있었고, 식자는 중국인들을 고용하였으나 저들이 한글을 모르기 때문에 서간도 한인교회의 설립자 김청송이 식자공으로 참여하게 된다.

 

로스역이 빛을 보기까지는 이 외에도 더 많은 사람의 수고가 있었다. 이름은 알 수 없으나 누가복음의 원고를 교정하면서 평북 사투리를 서울 표준말로 고쳐 준 동지사 수행원이 있었고, 행정관서의 서기로 있던 사람으로 아편 때문에 해고당한 조선인 학자 등이 있었음을 로스의 보고서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참여와 수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스는 그의 보고서(1883년도)에 서상륜을 평가하기를 "누가복음 공역자"라고 하였다. 로스가 진행하고 있는 성경 번역사업에 서상륜의 공헌도가 절대적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보고문이다.

1904년에 내한하여 개성 선교부에서 캐롤(Arrena Carroll)과 함께 호수돈 여고를 창설한 와그너(Ellasue Wagner)는 '로스역'성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다.

 

"로스 번역이라는 말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서씨 번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알맞지 않은가? ... (중략) ... 로스 목사는 그의 언어학적 능력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그의 과중한 다른 업무들로 인하여 그가 이 어려운 한국어를 배워서 중국어로 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실력을 가졌을 것 같지 않다. 합리적 결론은 [로스 번역]은 이들 한국 청년들의 작품이라고 하여야 한다."

"徐相崙은 義州 靑年들 中에서 가장 年小한 사람이었으나 學識에 있어서는 앞서는 便이었고 한글에 對한 知識이 매우 정확하였으므로 성서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상의 기록들로 보아 한글성경 번역사업은 누가 먼저 참여하였는가 하는 순서의 문제를 초월하여 공헌도에서 서상륜의 역할이 월등하였다는 것을 후세의 역사가들은 인정하고 있다. 서상륜은 마치 [포도원에 오후 다섯 시에 도착한 농부가 해질녁, 한 시간만 일하였으나 한 데나리온의 노임을 먼저 받은 것](마20:1-15)과 같은 경우이다.

이런 사정을 고려할 때 통속적으로 [로스역 성경]이라고 불려지는 성경은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명칭에 대하여 한국 교회사가인 이진호 장로는 로스역 성경을 [로스·서상륜 팀역]이라 칭하고 있다. 매우 합리적인 명칭이다.

 

오랜 각고 끝에 성경은 번역하였으나 한글 활자가 없어 인쇄가 불가능해지자, 이번에는 또 다른 수고를 해야 했다. 동역자들과 함께 목판에 붓으로 한글을 쓰고 칼로 판 후, 이것을 일본으로 보내어 4만 개의 납활자를 만들어 오는 거대한 작업이 진행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추리해 볼 때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의 글씨체는 서상륜의 것이 분명하다. 앞서도 언급한 바 대로 그는 이미 명필로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출판을 향한 서상륜의 강한 집념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 모든 활자들은 우장(牛莊)을 거쳐 심양으로 옮겨졌고, 인쇄기는 상해에서 구입하여 역시 심양으로 운반되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자 드디어 1882년 3월 24일에는 <예수 셩교 누가 복음젼서> 3천 부가 출판되었고, 동년 5월 12일에는 <예수셩교 요안내 복음젼셔> 3천 부가 심양의 문광서원 발행으로 출판되었다.

 

반만 년 유구한 역사의 장벽을 뚫고 최초로 한글 성경이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이 때 발행한 누가복음 3천 부 중 1천 부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일본 총무 릴리(Lilly)에게 송부하였고, 상당한 분량을 식자공으로 동참하였던 김청송(金靑松)이 서간도로 가지고 가, 그 곳에서 판매하여 많은 결신자를 얻게 된다. 김청송의 수고는 곧 열매가 되어 1882년 11월, 로스는 웹스터(Webster)와 함께 북간도 한인촌을 방문하였고, 그 곳의 한인 결신자 75인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25인에게 세례를 주어 열매를 맺게 한다. 우리 손으로 번역·출판한 성경을 우리 힘으로 동포에게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하고 열매를 거두어들인 역사적인 쾌거라고 할 수 있다. 로스는 이 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선교사가 찾아간 일이 없는 그 곳에 한글 성경과 전도문서가 들어가므로 놀랄만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만주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한국교회사는 소흘하게 취급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