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4)
8) 귀국 연대
서상륜이 로스에게 권서의 직책을 받고 귀국한 시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소래교회의 설립연대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이미 1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간 옛일이기에 명확한 기록이 없는 한 이견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런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한국 교회는 깊은 연구와 살핌을 가지지 못한 것 같고, 따라서 통일된 견해도 가지고 있지 않다. 통일되지 않은 많은 주장들이 잡초와 같이 무성하게 난무한 상태에서 공부하는 오늘의 후학들은 정답을 가지지 못한 한국교회사를 공부하고 있다.
이제 이 부분에 대한 [한국교회사]의 기록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그의 입국연대는 1883년 초에서 1884년 겨울까지 다양한 의견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퍽 다행한 것은 대부분 1883년에 귀국한 것에는 동의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1883년을 주장하는 의견들은 다시 1883년초, 이른봄, 봄, 가을등 다양한 주장으로 나뉘고 있다.
1883년 귀국에도 여러 의견이 있다.
1883년 초: 이찬영. 앞의 책. 196쪽
1883년 이른봄: 김양선. 앞의 책. 109쪽
1883년 봄: 김성준. 앞의 책. 33쪽. 이덕주. 앞의 책. 474쪽.
1883년 가을: 박성겸. 앞의 책. 39쪽
이런 여러 의견들을 검토하면서 우선 1883년 봄에 이주한 것은 분명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이유는 서경조는 "一千八百八十三年 癸未年 長淵 松川洞에 移住하게 된지라"
(서경조. 앞의 책. 89쪽).
고 분명히 이주 연대를 밝히고 있고, 서상륜은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그때는 쥬강생 일쳔 팔백 팔십년 봄쯤 됨나이다"라고 자서하였는데, 이들 형제의 고백을 종합할 때 1883년 이른 봄, 서상륜은 귀국하여 즉시 소래로 내려왔고, 서경조는 형의 뒤를 따라 그 후에 소래로 온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9) 서울 전도
소래교회 설립이 그의 인생 전부일 수는 없었다. 그는 서울에서 전도하려는 꿈을 버릴 수 없어, 결국 소래교회는 동생 경조에게 맡기고 자신은 수도 서울을 공격하기 위하여 상경한다. 물론 그의 전도는 비밀리에 진행되었는데 여기에도 난관은 없지 않았다. 그 중 최대의 난관은 전도의 절대 수단이 되는 성경이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필요는 공급을 유도하는 법이다. 그는 만주의 로스에게 성경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새문안교회당회(1958). 새문안교회70년사. 서울:새문안교회 16쪽).
로스는 1884년 봄 상해(上海)를 경유하여 6천 권의 성경을 중국인 상인편으로 보내 주었다. 그것은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인 복음서와 한문 성경이었다.
(이진호 장로는 "6000권의 성경은 대부분 한문 성경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금서가 은밀히 국내로 반입되려다 적발되자 인천 세관과 정부는 초비상이 걸렸고 이 책을 인수하게 될 서상륜은 다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때도 주님은 그를 도우셨다.
당시 외무협판(外務協辦)으로 있는 뫼렌도르프(P.G. Von Morendorb, 한국명 목인덕 穆仁德)
(뫼렌도르프 Paul G. Von Morendorb; 한국명 穆仁德 1848-1901. 독일인, 구한말 정부의 외교고문. 청국 주재 독일 영사관에 근무중 이홍장의 추천으로 내한, 총리아문협판에 부임(1882. 11), 갑신정변(1884)시 수구파에 협력. 한독 수호 조약(1884.5) 수립에 공이 있음.
의 부인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성경 반입 사실을 듣고 협조를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의 도움으로 서상륜은 감옥행을 면하였을 뿐 아니라 귀중한 책 상자를 모두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전도를 하게 된다.
그의 활기찬 전도의 제 1차 대상자들은 서울에서 상업을 하는 고향 친구들이다. 이들에게 복음서를 나누어주면서 전도한 결과 즉시 성과가 나타나 그 해에 친구 중 13명이 개종할 뜻을 밝히게 된다. 이 감격스런 소식은 곧 로스에게 전달되었고, 속히 서울로 와 그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를 세워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로스는 그 요구에 응하지 못하였다.
(김양선. 앞의 책. 52쪽).
1885년에도 다시 편지를 보내어 세례 지원자가 79명으로 증가된 사실을 보고하며 내한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이 때도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김정현(1982). 한국의 첫선교사. 啓明大學出版部. 110쪽).
이와 같이 서상륜이 서울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1884년 가을, 알렌이 입국하였고, 그 다음 해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입국하였다. 이 때 서울에는 서상륜의 권서활동으로 이미 3백여 명의 신앙인이 있었으나 다만 공개되지 못하였고, 교회도 없어 정식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앞의 책. 247쪽).
참으로 그의 전도 결과는 경이적이었다. 이런 폭발적인 성과를 거둔 능력의 원천은 그가 만주에서 번역 출판한 복음서에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둔다.
10) 언더우드와의 만남
기독교에 대한 감시와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 전도에 전념하여 수확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선교사의 내한을 간절히 소원하던 서상륜에게 외국 선교사의 정식 입국은 꿈과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면 그는 언제, 어떻게 내한한 선교사와 만남을 이루었을까?
이 부분에 대하여 언더우드는 <한국의 소명>에서, 그의 부인은 <한국의 언더우드>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1886년 가을, 서상륜이 로스의 소개 편지를 지참하여 옴으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H.G. Underwood. 앞의 책. 107쪽).
"1886년에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소래의 세례 지원자들에게 세례 줄 것을 요청하였고 1887년 9월에 소래 교인 3명에게 세례를 주고 11월에 첫 전도 여행을 하였다."
(Lillias H. Underwood(1918). UNDERWOOD OF KOREA. N.Y. FLEMING H. REVELL COMPANY. 62쪽).
이런 언더우드의 기록에서 연유된 듯 한국교회사에서는 이들의 만남이 1886년에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한 학자들이 퍽 많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사명감에서 수륙 만리를 찾아 온 언더우드와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전도하는 개척 전도자가 넓지도 않은 서울 하늘 밑에 함께 살면서 서로의 만남을 가진다는 것이 어찌 이렇게 어렵고 힘들 수가 있었을까? 납득이 가지 않는 여운이 있는 부분이다.
그러기에 언더우드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과 함께 여과를 거쳐야 한다.
첫째, 서상륜은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었는데, 어찌 선교사가 입국한 후에도 1년이 지나도록 만나지 못하였을까?
둘째, 언더우드의 입장에서는 어학 선생과 전도를 위해서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언제나 만났을 터인데 어찌 만주에 있는 로스의 소개 편지가 필요하였을까?
셋째, 초기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사랑방을 공개하고 그 곳에서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있었다.
(서명원. 앞의책. 1966. 50쪽).
이런 때 언더우드는 그의 사랑방을 왜 개방하지를 아니했을까?
넷째, 1886년 가을이 오기 전에 노춘경의 세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서상륜과의 만남은 어찌 그 후에 이루어졌을까?
다섯째,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노춘경의 세례도 서상륜에게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건인데, 어찌 언더우드와 서상륜의 만남이 그 후에 이루어졌을까?
여섯째, 노춘경의 세례가 서상륜과 관계된 것이라면 1886년 가을에 서상륜이 로스의 소개편지를 가지고 왔다는 언더우드의 기록은 어색하지 않은가?
일곱째, <한국의 언더우드>에서 "1886년 서상륜이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소래의 세례 지원자들에게 세례 줄 것을 요청하였다"는 글은 처음 만났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번 만나는 중에 그런 요청을 하였다는 뜻은 아닐까?
아무래도 언더우드의 기록에는 소화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상과 같은 여러 의문점들과 가설을 제기하면서 언더우드에게 어떤 숨은 의도(?)가 있는지 여부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우선 당시 서상륜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와그너(E. Wagner)의 글을 소개한다.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들어왔을 때, 이 외로운 사역자의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복음의 씨를 뿌리는 수고를 함께 할 몇 사람이 생긴 것이다"
(The Korea Mission Field. Vol xxxiv. May. 1938. 95쪽).
동역자의 출현을 고대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이 "외로운 사역자의 기쁨"(The joy of this lone worker)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언더우드와의 만남은 1886년 가을까지 기다리지 않았음이 분명하며,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그가 소개 편지를 받기 위하여 만주까지 가는 수고를 하지 않고, 선교사의 입국과 동시에 그를 직접 찾아가 만났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왜 언더우드는 그와의 만남이 오랜 후라고 기록하였을까? 고인에게 글은 있으나 해명은 없는 법이다. 다만 살아 있는 후세의 사가들의 명석함이 요구될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이 사실은 잠시 후 현명한 독자들의 면전에서 베일을 완전히 벗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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