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5)
11) 서상륜과 노춘경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1886년 7월 11일에 세례를 받은 노춘경(盧春京)에 대하여, 언더우드는 <한국의 소명>에서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수고한 첫 열매"라고 주장하였고, 한국교회사는 "노춘경이 한국 최초의 수세자"라고 일제히 포문을 열고 있다. 그러나 노춘경의 수세 사실을 자세히 살피면 그의 개종과 수세도 서상륜의 수고로 얻은 열매였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노춘경에 대한 언더우드의 기록을 여과 없이 살펴본다.
"그는 한학자요 지식욕이 강했던 사람으로 알렌의 서재에서 한문으로 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고 자택으로 가져가 탐독하고 난 다음 "이것은 대단한 것이다" (It's good! It's grand!)고 외친다. 그 후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앞으로 될 일에 대하여 더 자세히 말을 나눔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고 결국 세례까지 받게 된다"
그러나 노춘경의 세례식에 참석하여 감격스런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을 남긴 제 삼자의 기록들이 있어 이 부분 연구에 큰 도움을 주며, 이런 기록들은 객관성이 있어 더 좋은 자료가 된다. 이제 제 삼자의 기록들을 소개한다.
일본 주재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 톰슨(Austin J. Thomson)도 첫 세례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는데, 그는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남겨 놓았다.
"그 主日 午後에 나는 韓國 人으로서 처음으로 洗禮를 베푸는 한국 Protestant 敎會 史上 가장 興味있는 일을 목도할 수 있었다. 韓國政府가 아직 公然한 기독교 예배의식을 許하지 않는 때문에 洗禮式은 비밀리에 가장 긴장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중략).....나는 Underwood 牧師에게서 그의 改宗의 動機가 오직 Ross Version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精讀한데 있었다는 말을 듣고 더 한층 놀랐다."
톰슨은 언더우드를 빙자하면서도 그와는 차이가 있는 주장으로 이 사건에 접근해 가고 있는 것이다. 즉, 언더우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하여 함께 말을 많이 나누었다"고 하는 반면, 톰슨은 "성경만을 읽고 기독교의 진리를 깨달아 알았다"고 한다. 무엇인가 잘 맞지 않아 삐걱거리는 느낌이 든다. 더욱이 큰 잡음은 언더우드가 톰슨의 말을 "입증해 주었다"는 부분이다.
다음으로 노춘경 자신의 간증을 들어보도록 하자.
盧道士는 그의 信仰간증에서 入信의 動機를 "내가 기독교의 眞理를 깨닫게 된 唯一한 길은 聖書를 읽는데 있었다"고 말하였다. 聖書를 읽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같은 경험을 가졌다.
로스가 언더우드에게 들은 말도 "Ross Version을 정독하고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전부이다. 톰슨과 로스, 그리고 노춘경도 자신의 수세 동기에 대하여 듣고 고백한 것은 "성경만 보고"가 아니면 "Ross Version의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精讀한 것"이 개종의 동기였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언더우드는 <한국의 소명>에서 전혀 다른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이제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한 기록인지를 가려야 하는 고민을 부담으로 안게 되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언더우드는 노춘경의 수세를 선교사의 "첫 열매"로 부각시켰을까? 짐작컨대, 그의 기록대로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수고한 첫 열매"라고 주장할 수 있는 사건이 노춘경밖에 별로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춘경, 그는 유학자이면서도 기독교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기독교의 교리를 알기 위해서는 서양인들과 사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알렌, 헤론, 스크렌톤의 어학선생이 된다. 따라서 언더우드와도 많은 말을 나누었을 것이 분명하고, 이런 사유가 언더우드로 하여금 그런 기록을 남기는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김양선은 다음과 같은 결론적인 말을 남김으로 그것마저 부인하고 있다.
"1886年 7月 11日 主日 午後에 貞洞 Underwood 牧師의 저택에서 洗禮를 받고 韓國 內의 最初 受洗者의 榮光을 가진 盧道士라는 學者의 개종의 動機가 역시 徐相崙의 傳한 Ross Version에 있었다는 事實을 看過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과연 노춘경의 수세는 "선교사의 첫 열매"가 아니라 <로스·서상륜 공역 성경>의 출판과 반입, 그리고 목숨을 던진 전도의 결과, 복음의 씨는 노춘경의 마음밭에서 영글게 되었고, 목회 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선교사는 그에게 세례를 주어 거두어 들였을 뿐이라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러기에 노춘경의 회심과 수세 뒤에는 서상륜의 헌신적인 전도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며, 노춘경도 서상륜이 뿌린 복음의 씨에서 맺은 여러 열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다.
12) 최초의 수세자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한국교회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1886년 7월 11일 수세한 노춘경이 한국의 첫 수세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주장하는 교회사가들이 <사기 상>의 기록과 서경조의 논문만이라도 자세히 살폈으면 이런 큰 실수를 범하지 아니 하였으리라. 더구나 필자가 종로 구청에서 확인한 서병호의 생년월일은 <사기 상>의 기록과 서경조의 논문이 정확하다는 사실과 함께 한국교회사가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해 주는 결정적인 요인을 제공하였다.
이제 이상의 여러 자료들을 소개한다.
첫째, <사기 상>의 기록이다.
"一千八百八十五年(乙酉)에 義州人 徐景祚가 中國으로부터 福音을 得聞하고 歸國하야 黃海道 長淵縣 大救面 松川洞에 移住하고 ... (중략) ... 是夏에 景祚난 上京하여 元杜尤 牧師의게 洗札를 밧고 是秋에 元杜尤 牧師난 松川에 巡往하야 景祚의 幼子 丙浩의게 洗札를 주어스니 此가 朝鮮敎會의 兒洗의 始니라"
<사기 상>에는 분명히 是夏(1885년 여름)에 서경조는 상경하여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았고, 是秋(그 해 가을)에 언더우드가 소래로 내려와 서경조의 어린 아들 병호에게 유아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1886년 7월 11일에 있은 노춘경의 세례식보다 무려 일년이나 앞서 있는 사건이다.
둘째, 서경조의 논문도 이와 맥을 같이 한다.
"一千八百八十五年 乙酉 春에 伯氏의 下書를 보고 上京하니 元杜尤 牧師가 前年에 나왓난대 셔울 사람 一人과 의쥬 사람 一人이 셰례를 밧앗더라 ... (중략) ... 그 (저자주: 1885년) 九月에 원목사가 유담공문을 가지고 숑쳔에 내려 온 지라 丙浩가 난지 셕달되어 유아 셰례를 밧으니라]"
서경조는 자기의 둘째 아들이 출생한 지 3개월 만에 유아 세례를 받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무리 오래되고 기억이 흐리더라도 자기의 아들이 출생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강보에 싸인 영아였는지, 아니면 걸음마를 배운 3세 가량 된 유아였는지 분명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태어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영아시절에 유아세례를 받은 것은 확실하다.
셋째, 종로구청에서 확인한 서병호의 호적에 의하면 그의 생년월일은 1885년 7월 7일이다. 서병호의 호적에 적혀 있는 생년월일은 <사기 상>의 기록과 서경조의 기록이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인 문서 자료가 된다.
넷째, 일본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 톰슨(A. J. Thomson)이 첫 세례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고 진술한 바가 있다. 이 부분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톰슨의 내한은 1884년과 1885년 7월에 있었고 1886년 7월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1884년에 내한하였을 때는 부산에 상륙하였을 뿐이고, 1885년에 내한하였을 때 비로소 내한한 미국 선교사와 교제를 나누게 된다. 그렇다면 그의 세례식 참관은 1886년에 있은 것이 아니라 1885년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섯째, 토마스 목사 연구로 명성을 떨친 오문환은 그의 저서에서 송천의 세례식이 "1885년 가을에 있었다"고 하였다.
"徐牧師는 일찍이 지금으로부터 52年前 戊寅年 1878年 中國 營口에서 맥킨타이어목사에게 傳道를 받고 믿을 마음이 생기었다가 언더우드 목사의 來韓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乙酉 1885年에 洗禮를 받고 내려왔으며 同年 가을 언더우드 목사가 松川에 왔을 때 그 아들 병호가 幼兒洗禮를 받아 形式으로 교회를 設立하였다."
이상의 자료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언더우드는 입국한 그 해(1885년) 여름 이전에 이미 서상륜과 교분을 가졌고 그 해 여름(7월) 의주 사람과 서울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서경조도 이 때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그해 9월에는 서경조의 아들 병호가 소래에서 언더우드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그러면 한국 최초의 수세자는 과연 누구일까? 지금까지 한국교회사는 1886년 7월 11일에 있었던 노춘경의 수세가 최초의 것이라고 의심없이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의주 사람과 서울 사람이 있었으며, 그들의 세례식에 일본에 주재하고 있던 톰슨(A. J. Thomson)이 참석하였으니 그들이 첫 세례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1885년 여름에 세례를 받은 서경조는 세 번째 수세자가 될 것이며 유아세례로는 서병호가 첫 번째가 될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 이와 같이 뚜렷한 데도 한국교회사는 언더우드의 기록 "첫 열매"(first fruit)라는 말에 매료되어 노춘경이 "첫 세례자"라고 속단하는 큰 오류를 범하고 말았다.
최후로 노춘경을 "첫 열매"라고 기록한 <한국의 소명>을 다시 자세히 살펴보자. 이 책 "첫 세례식"난에는 "1886년 7월과 9월에 첫 회심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하였을 뿐, 첫 세례자가 노춘경이라고는 하지 않고 있다. 이 첫 세례식이 "7월과 9월"에 시행되었다는 기록에 관심의 초점을 맞추어 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7월과 9월"은 서경조의 논문을 위시하여 <사기 상> 등에 "여름과 가을"이라고 기록한 것들과 공통 분모를 이루기 때문이다. 언더우드의 기록에 혹시 차질(?)이 있어 1885년을 1886년으로 잘못 기록하였거나 고의적(?)으로 연대를 틀리게 기록한 것은 아닐런지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 사료를 평가할 때 사건발생의 장소나 시간은 부주의로 혹은 고의적으로 잘못 기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언더우드의 기록이라고 모두 절대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더우드의 기록과 그의 부인의 기록을 대조해 보면 연대의 차이가 있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즉, 언더우드는 "처음 소래를 방문하여 그 곳의 신자 7인에게 세례를 준 것이 1887년 가을이라"고 기록한 반면, 그의 부인은 "1888년 4월에 소래의 남자 7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1887년 봄에는 소래의 신자들이 서울로 와, 엄격한 심사를 거쳐 3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기에 역사의 기록을 검토할 때 어느 기록이든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이 농후한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만일 "첫 열매"와 "최초의 세례자"가 동일한 인물인지, 아니면 다른 인물인지를 좀 더 깊이 살피는 신중함이 있었으면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제라도 다시 살피고 역사의 오류가 있으면 바로 잡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 영성을 위한 ━━ > 신앙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0) | 2018.03.08 |
---|---|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0) | 2018.03.07 |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0) | 2018.03.05 |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0) | 2018.03.04 |
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0) | 2018.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