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륜(徐相崙)과 소래(松川)교회 설립(1884)
서상륜의 생애 (6)
13) 더 많은 수세자들
클락크(Charles Allen Clark, 한국명 곽안련)는 <장로교회사 전휘집>에서 당시 세례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통계를 발표하고 있다.
"一千八百八十六年에 元杜尤氏가 九人의게 洗禮를 주엇고 一千八百八十七年에 其年 洗禮人 合하야 洗禮人이 二十五人 되얏고, 一千八百八十八年에 六十五人, 一千八百八十九年에 一百四人이 되얏고."
(郭安連(1918). 長老敎會史典彙集. 서울: 朝鮮耶蘇敎書會. 12쪽).
언더우드는 노춘경에게 세례를 준 바로 그 해에 노춘경 외에도 퍽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후에도 세례자들은 계속하여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누구에게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게 되었을까?
우선 <사기 상>의 기록을 상고해 보자.
"徐相崙이 最先 京城에셔 布敎 前路를 豫備하엿슴으로 宣敎師 等이 來渡未幾에 數十人이 洗禮를 밧앗스니"
(차재명. 앞의 책. 26쪽).
여기서 분명히 밝혀야 하는 것은 선교사들에게 세례를 받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서상륜의 수고로 얻어진 열매라는 점이다. 설령 백보를 양보하여 노춘경이 선교사들의 전도에 의하여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되었다고 인정을 하여도,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상륜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는 분명히 밝히고 있고, 선교사들도 이 분명한 역사적 진실 앞에 사실을 시인하여야 한다. 언더우드도 이런 사실을 암시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들이 도착하기 전 중국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 두 사람에 의해 예비 선교가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H. G. Underwood. 앞의 책. 107쪽).
"초기 개종자 중에 서상륜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개종한 후 당분간 그 곳에 머물면서 성경 번역과 인쇄를 도왔는데, 나중에는 몇 권의 책을 고향에 가지고 가, 자기가 배운 구세주에 대하여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고 로스에게 말하고, 허락을 받은 후 얼마 동안 한국의 북부지방을 여행하면서 설교도 하고 책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수도 서울을 방문하여 그가 말하는 바를 기꺼이 들으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발견하였다. 그 뒤 황해도 장연군 소래에 가족과 함께 정착하였다. 여기서 설교도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생활을 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이 마을을 선교활동의 기초로 삼았다.
(앞의 책. 131쪽).
이상의 글에서 풍겨오는 느낌은, 언더우드는 서상륜에 대하여 언급은 하면서도 핵심은 로스와 매킨타어의 예비 선교로 말꼬리를 돌렸고, 소래교회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설립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회피하였으며, 이 고장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왜 유명해졌는지는 함구하고 있다.
이런 선교사들의 기록들은 역사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의 입장을 고려하면서 남긴 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역사 자료들은 한 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것도 어쩔 도리가 없는 사실이다. 이런 역사 자료들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 서상륜의 지대한 활동보다는 노춘경 한 사람의 세례가 더 소중한 것처럼 오도되었고, 원인을 제공한 위대한 사역보다는 하나의 결과에 만족하는 오늘의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사도 내 것을 찾고 가꾸어 새롭게 자리매김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성경 번역과 국내반입, 그리고 전도에 열중하여 노춘경을 비롯하여 많은 결신자를 얻게 한 서상륜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역사를 정리하여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피나는 수고를 하였으나, 평신도일 뿐 목사가 아니었기에 세례를 주어 열매를 거두어 들이지 못하여 애타했던 그의 심정을 이해하고 높여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결국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시간은 흘러갔고, 오늘의 역사는 심고 가꾼 수고보다는 세례를 주어 수확한 자의 공을 더 크게 부각시겨 왔다. 그러니 이제라도 왜곡(?)된 방향으로 흘러간 역사의 줄기를 바로 잡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 4:37).
14) 새문안교회 설립
1887년 9월 27일은 새문안교회 설립일이며, 설립자는 물론 언더우드이다. 그러나 새문안교회 설립과 관련된 한국교회사의 기록들은 창립예배에 모인 14명의 신자들 모두가 서상륜의 전도를 받은 자들이라고 한다.
(새문안교회70년사. 앞의 책. 22쪽. 연동교회90년사. 앞의 책. 67쪽).
그러기에 이 교회의 설립에 "한 알의 밀"이 되어 땀흘려 희생한 실제적인 창설자이며 공로자는 서상륜이다. 사실 어느 날 갑자기 선교사가 교회를 설립한다고 광고를 하니 14명의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클락크(Charles Allen Clark, 한국명 곽안련)는 그의 교회사에서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시에 만주의 로스도 참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도한 결과 1887년 9월 12일에는 서울에 있어서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가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집회하였다. 이 집은 원래 어느 정승의 집으로서 현재 감리교 여선교부 숙사, 곧 그레이 하우스가 서 있는 곳인데, 안채에는 언더우드 목사가 살고 사랑채 두 칸을 터서 약 3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방을 만들어 예배 처소로 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새로 된 교회에서 첫 예배를 드릴 때 만주 봉천에서 한국의 복음사업을 위하여 그처럼 수고를 많이 하던 죤 롯스 목사가 참석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처음 날 모인 신자의 수는 14명이었다. 그 다음 주일에는 한 사람이 늘어 15명이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에는 서상륜과 서경조 두 분을 장로로 택하여 안수례를 거행하였다."
(곽안전(1961). 앞의 책. 54쪽).
15) 서상륜과 장로직
새문안교회에 대한 클라크의 기록에 의하면 서상륜이 장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새문안교회 설립과 관련된 모든 기록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즉, 교회사는 일제히 새문안교회를 설립하는 날, 14명의 교인들에 의하여 서상륜과 만주에서 성경번역에 참여한 바 있는 백홍준, 이 두 사람이 장로로 피택되었다고 한다.
"서상륜은 한국 최초의 장로가 되었다. 그것은 1887년 9월 27일에 14명의 신도들을 원두우의 사랑방에 모아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를 조직할 때 선정한 두 사람의 장로 중의 하나로 임직된 것이었다"
새문안교회70년사. 앞의 책. 22쪽.
연동교회90년사. 앞의 책. 67쪽.
박용규. 앞의 책. 41쪽.
민경배. 앞의 책. 13쪽.
조남선; 한국의 교회사. 31쪽.
서명원; 한국교회성장사. 47쪽.
그리하여 서상륜은 새문안교회의 창설자이자, 초대 장로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새문안교회에서는 이 때를 당회 조직으로 간주하지 않고 1904년 10월 2일 송순명(宋淳明)의 장로장립을 기점으로 당회조직을 인정하고 있다.
(앞의 책. 160쪽).
그 이유는 "서상륜이나 백홍준이 새문안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기는 하였으나 새문안교회만을 위해 시무하는 개 교회 장로가 아니라 전 한국 장로교회의 장로로 임직하였기 때문이며 그들도 그런 범위에서 활동하였다"고 한다.
(연동교회(1984). 연동교회90년사. 90년사편찬위원회. 55쪽(이하 연동교회90년사로 표시).
이상은 새문안교회와 연동교회 그리고 교회사에서 주장하는 새문안교회 설립과 관계된 사건의 나열이다.
그러나 시중에서 판매되는 교회사 외의 다른 기록들을 보면 "서상륜은 장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글들도 볼 수 있다.
우선 [황해노회 100회사]가 그 선두 주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서상윤은 집사와 장로직을 가정적인 이유로 받지 못했으나 평생 평신도로서 한국 장로교 사상에 뺄 수 없는 위대한 전도자요 교회 설립에 공헌한 자이다."
(박성겸, 황해노회 100회사).
소래에서 월남하여 온 교인들도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은퇴하고 소래에 내려오신 후에도 그를 교회에서 장로로 호칭하는 것을 전혀 보지 못하였습니다."
(정용하 증언).
그의 손자이며 새문안교회 장로인 서재현도 <새문안교회 70년사>에 서상륜을 장로로 기록한 것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교회사에서는 그를 새문안교회 설립일에 장로로 투표하여 그 다음 주일에 장로로 장립하였다고 주장하나 그는 평생 평신도 전도인으로 지낸 분입니다."
인천에 거주하는 서재현 장로의 4촌, 서재연도 이와 동일한 증언을 하였다.
"큰 할아버지는 장로가 못되었으며 그 이유는 순전히 가정사정에 의하여 그리 되었습니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고인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을 세울 때에도 "조선 최초 전도에 가장 공헌이 만흐신 고 서상륜 (故 徐相崙)선생의 묘소 긔념비석" 건립건으로 헌의된 것으로 보아 장로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장로직을 사양하고 평생 평신도 전도인으로 만족해야 했던 가정 사정이란 무엇일까? 그는 젊은 시절, 아직 예수를 믿기 전 연로하신 할머니의 주선으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하였는데, 원치 않은 결혼이기에 첫날 밤에 소박을 하고, 다른 여성과 재혼을 하였다. 서상륜에게 있어서 "한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자책감은 평생토록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었으며, 그가 소래에 정착한 후 의주에 거주하는 이 분을 소래로 모시고 와, 가정생활은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생활비 일체를 부담하면서 불편없이 살 수 있도록 돌보아 주며 속죄의 길을 걸어갔다"고 한다.
비록 불신시절에 범한 과오이긴 하여도 평생을 두고 단장(斷腸)의 회개를 하며 뉘우친 사건이다. 한 때의 실수를 평생토록 뉘우치면서 성직을 사양하고 겸허하게 헌신한 그의 숭고한 신앙인격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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