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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의 교회여성 - 1.전도부인 (지위와 문제들)

Joyfule 2007. 1. 29. 01:03

4) 지위와 문제들 1.

 

전도부인들은 신도들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더 많은 일을 담당하게 된다. 즉 전도하고 책을 파는 일 이외에도 "주일성수""교회 안에서의 행동""가족의 통제와 관리" "위생과 보건"등에 관한 책자를 가지고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로 여성교인들을 교육시켰다.44) 즉 순수한 종교적 전도사업뿐만 아니라 한국 부인들의 생활교양을 가르침으로써 기독교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삼았으며, 문서활동도 병행해 나갔다.45) 또한 야학을 열기도 하였다.

 

"신창지방 양덕구역 구읍교회 전도부인 한봉은, 김윤실,손덩셩 三씨는 일삭전부터 야학을 열고 국어,산술,한글 신철자법,주의 기도문,사도신경 등을 열심 교수함으로 남녀학생이 오십명에 달하였다는데..."46)

또한 전도부인은 교회 내에서 신도들을 조직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운산구역 고당교회는....아직까지 자치회가 없는 것을 선생님께 1대유감으로 생각하시다... 九月에 男女신자 二十여人으로 자치회를 조직하고.."47)

 

1935년 7월호 [한국선교](Korea Mission Field)지에 실린 [한국 전도부인과 그 사업](The Korean Bible Woman and her work)에는 전도부인의 놀라운 역할에 대해 보고하고 있다.

 

첫째, 많은 여성들이 전도부인과 만남으로써 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전도부인은 극도의 빈곤과 어둠 속에서 헤매는 여인들에게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부유한 노인의 첩으로 살고 있던 여인들에게는 자유와 새 삶을 가져다 주었다. 남편에 의해 버림받은 자살 직전의 여인을 구해주었고,식구들이 기생으로 팔아넘긴 작은 소녀는 전도부인한테 도망쳐 와서 미션 스쿨의 학생이 되기도 했다.

 

또한 전도부인의 일은 선교사의 일만큼이나 다양하다. 도시교회에서 주일학교의 관리자로서만이 아니라 교사로서 가르쳐야 하고 그 주인 동안에 결석자들을 찾아다녀야 하며, 결혼식과 장례식에 참석하고, 병든이와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방문해야 하며,교회 안나오는 사람들을 다시 오게 하고는 목사의 보조자로서도 일해야 하며, 또한 해당 교회에 속하는 구역 내에서 전도도 해야 한다.

 

일 년마다 열리는 여성 성경반이 열릴때,전도부인은 그것을 운영할 뿐 아니라 가르쳐야 하며 저녁에 좌담회를(evening talks)이끌어 나가야 하며 새벽기도 모임들을 인도해야 한다. 종종 잘 훈련된 전도부인들은 다른 교회의 사경회(Bible Conferences)에 초청되기도 한다. 각종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으며, 여선교회(Woman's Missionary Society)의 일에 협조하는 등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일에 관여한다.그들은 일상적인 교회생활 전반에 걸친 지도자일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지도자이며, 아픔을 나누는 친구이며 조언자였다.48)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는 전도부인들은 얼마만한 보수를 받는가? 우리는앞에서 전도부인들이 대부분 그녀들의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해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1910년도의 스윌른 여사의 보고에 나타난 전도부인의 월급은 7원이었다. 1935년도 헤이즈(Hayes)여사의 보고에 의하면, "박씨는 일년에 150원을 받지만(한달에 약 4달러)그 지역의 교회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교회에서 다 보수를 받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돈으로 그녀는 나이든 어머니를 부양하다. 대개 전도부인들은 한달에 5달러를 받고 일한다."49)

 

1929년 남장로교 선교사 에밀리 윈(Emily Winn)의 보고에 의하면, 석달간 전도부인의 월급이 15원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니까 한달에 5원을 받는 것이다(1928년 4월부터 1929년 4월까지 회계).50) 따라서 이들 전도부인들은 한달에 5-10원 정도를 받고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이들보다 더 훈련을 받은 지도자격인 여전도사들은 1922년경에 20원 정도를 받고 있다.

 

이미 1922년에 남감리교회의 여전도사들은 300명의 수를 헤아리고 있었다고 한다. 동년 9월 17일자 [매일신보]에 의하면 당시 남감리회의 감독으로 새로 임명된 "뽀아드씨"에게 여전도사의 급료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여자전도사 300여명이 증급운동을 개시하여 태업중이라고 하여 내지(內地: 日本)모 당국에서 이것의 사실 여부를 경기도 경찰부로 조회하였다"51)고 보도하고 있다. 그녀들의 불평의 내용은 "남녀균등을 찾는 이때에 남자목사의 급료는 7,80원에서 100원까지인데 여전도사들은 20원 내외"라는 것이었다.

 

"남자 목사라야 한둘 급료가 칠팔십원으로 빅원선지이고 뎐도사는 더욱 박하야 녀자 뎐도사들로 말하면 남녀균등을 찾는 이 시에 급료가 만흔 사람이 약 이십원 가량이며 디방으로 십오원씩 쥬는 곳도 잇스미 이것이 결코 작금에 비로쇼 싱기인 것이 안이오 멧해 젼부터 급료가 부족하다느 부르지즘이 잇셧더니 이번에 이것이 아죠엇지 흘수 업시 불어터진 모양은 표면에 낫혀느 것으로 아직 알 슈 업스나 이런 사실이 업기가 만무하다"고 말하더라.52)

 

1936년도에 이르기까지도 여전도사의 봉급은 20원이었다. 평서노회 제31회 촬요에 보면 "시일 1936년 11월 30일 오후 칠시로 십이월삼일까지 1.결의사항...2.여전도사 봉급은 매삭 20원으로"라고 정해놓고 있다.53) 이같이 전도부인들은 한국교회의 초석을 깔아놓는 일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상당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 보고서에 의하면 이러한 전도부인보다 남자 목사가 더 필요함을 점차로 역설하고 있다.

 

"한국여성은 아침부터 밤까지 집안일에 너무나 매어달려 바쁘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을 하러 밖에 나갈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가가호호 방문하는데 시간을 낼 수 있는 전도부인을 원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방여성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목사를 더욱 원하는데,그는 그의 목회적인 일과 개인적인 일에 아무런 구속을 받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는 놀라운 방법으로 교회의 여성들이 그를 열성적으로 보좌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54)

 

말하자면 전도부인들의 역할이 아무리 중대하다 하더라도, 가사노동에 얽매여 있는 그들보다는 그런 구속을 받지 않는 남자목사들이 목회에 더 합당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도부인들은 대개 그 임금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즉 그들이 비록 과부이거나 독신인 경우가 많다. 하더라도 가사노동은 여전히 그들에게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선교사들이 기독교적 가정으로 꿈꾸고 있는 이상은 확고한 일부일처제하에서 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생활을 영위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여성만의 세계라고 간주되어온 가정을 여성들이 비울 때,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가사노동을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로 남는다.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여성에게도 바깥일과 더불어 가정일이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에 이런 여성은 이중부담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들은 직장에서 남자와 같은 능력을 낼 수 없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인시되어 왔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많은 계층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서 이를 해결할 수가 있다. 선교사들의 아내들이 남편과 더불어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값싼 노동력을 쉽게 많이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요리사,정원사,운전사 등등을 고용하면서 살 수 있었다.55) 결국 한 여성이 바깥일을 하기 위해서 또 다른 계층의 여성을 억압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되고 그것은 결코 바람직한 결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