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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초기의 교회여성 - 2. 일반교회 여성(신앙형태 2.)

Joyfule 2007. 2. 1. 00:44

여성들은 이제 복음을 다른 이웃에게 전파하기도 한다. 그녀들은 자신의 손이 미치는대로 복음을 전한 것이다.

 

"리메례 부인의 젼도함 인쳔 뭇지니 사느 리메례라 하는 부인은 본리 언문도 못하고 문밧 출입을 아니하더니 쥬 밋은지 일년만에 언문을 달통하와 셩경공부를 열심으로 하야 닐(日)헤 한 번식 교우의 집에 드니면서 셩경말슴으로 권면하고 또 누구를 맛나던지 하나님 밋으시요 하고 항샹 젼도하오니..."75)

직접적으로 전도하러 다니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여인들은 가진 것을 내놓기도 하였다.

 

"부인열심 철원읍 젼도서 리화춘씨의 통신을 거한즉 동리 부인 레아씨는 삼년전에 샹부하고 다만 어린아히 셋을 다리고 세월을 보내더니 이곳 교회에셔 례배당 겸 학교로 쓸 집을 사랴훌 때에 그 부인이 즈긔 살든 와가 삼입여간을 1천환에 팔기로 작뎡하고 말하기를 나도 망부의 3년샹이나 지내면 예수를 밋겠스니 집갑일천환은 교회에 기부한다 하고 칠빅환만 밧은후에 삼년상 지내기를 고디하더니..."76)

또한 [동아일보]1926년 5월 1일자 신문기사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다.

 

"함남단천군 파도면 주남리 신금곡 녀사는 일졈혈육이 업시 이십여년 과거생활로 항상 근검 저축한 결과 상당한 토지를 가지고 로년생활을 하는 중에 혹은 교회사업에 혹은 녀자교육사업에 혹은 공원설치에 수천원을 긔부하야 칭송이 놉는바 금년 삼월에 또 토지 이천평 현가 일천 이백원의 것을 야소교회에 긔부하엿는데..."77)

그러나 대부분의 여인들이 신앙을 가지는 것조차 자신의 의사대로 밀고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교회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부인들은 그래도 자신들이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는 쌀로 연보를 하기로 하였다.

"우리 송도부ㅈ에 감샤한 일이 특별히 하나 잇스니 이 부인의 쌀로 연보하는 것이라 쌀연보 하는 것슬 엇더케 하시는지 기저하옵나이다. 쟝단 감바위교회 누님들 ㄲ셔 먼저 시작하시기를 우리녀인은 하나님나라의 쓰이는 지경을 일비지력이라도 도울 모임이 하샹잇소나 남자와 치 돈을 벌수도 없고 가사에 주관은 쟝이라... 오날부터 우리 밋뇬 부인들은 미일밥하는 쌀중에 호수쌀식이라도 끼마다 져축하엿다가 연보하는 거시가 한지라... 이 쌀모화오시는 것소르 전도인의 미삭월은에 보용케 되오니 대단히 감샤하옵나이다... 김순일."78)

 

여기서 성미의 유래를 볼 수 있는데, 성미라 함은 성의있게 바친쌀이란 뜻으로 외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 특유의 헌납방식이다. 1903년 신교가 선교사를 통해 이 땅에 들어온 지도 2년이 다 되어서 비교적 교세가 안정되었을 때였고 각 지방에 교회가 확장 건립되던 시기에 마만 문창교회에서 교회건축을 돕기 위한 한 방법으로 각 가정에서 매끼 쌀 다섯 숟가락씩 떠내기로 결정했다 한다. 그

 쌀을 팔아서 건축에 보태쓰기로 한 것이 서미의 시초이며 1907년 건축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후 1920년경 3.1운동이 있은직후 교회가 타격을 받아 교세가 약해지고 거기에 겹쳐 경제공황이 잇따라서 선교사의 보조도 줄어들어 교역자의 생활이 위협을 받게되었다고 한다. 그때 황해도 재령교회에서 교역자를 돕기 위한 직접적인 방법으로 성미를 거츨하여 식량을 보조하였다 한다.79)

 

여성들은 열성을 다하여 연설하며 교회 재정을 도왔으며, 또한 교회건축에 헌신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대동군 신흥리 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평양 여도 박관선의 전돌 방승건 이용진,고씨응선이 동신하고 초옥사칸을 매수하야 수년에배하다가 신흥리에 십이칸 예배당을 신축하고 전도 익면하야 교회가 전진하니라."80) 라는 보고가 있으며 또한

"이유제씨의 미거 경북 안동군 남면하희동에 거하는 리부인 란강(七0)씨는 본시 경셩출싱으로 본동류씨의 문에 출가하야 가뎡을 일우어지는 ㅈ 지금 이십년전에 처음으로 쥬를 밋고 십여리되는 풍산면고창동 교회에 다니며 십여년동안을 하로치 쥬일을 직하고 불샹한 사룸의게 형편을 따라 의복과 젼곡동으로 구제하며 즈긔단니는 고창교회에 됴흔포전 두말락을 긔부하엿고 본동의 불신쟈를 휘하야 독담으로 전도인도 세워섯 스며 또 본동리에 례비당을 세우기 위하야 일년동안이 산샹긔도를 한 결과 하느님이 허락하샤 완고흘 류씨네의 삼백년넷터에 굉장할 례비당이 몃회젼에 건축되었는디 이 건축비는 정부인 동안씨와 채부인 원식씨가 협력하엿으며..."81)

 

라는기사가 실려 있다. 이와 동일한 예들을 우리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여성들의 헌신은 그녀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도 여실히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교회 건축시 남자와 같이 직접 육체노동을 하기도 하였다.

"나사는 곳에 례배당을 지을때 일이다. 나는 느헤미야셔중에서 녀자들이라고 교회일할슈잇다하신 말삼을 긔억하고 남자와 갓치 등으로 흙을져 날러 예배당을 건축하는데 힘을 다썼다."82)

그런데 이러한 열성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여성들이 자신들이 남성들보다 더 죄를 많이지었기 때문에 남성들보다 더 연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녀인의 죄를 싱긱하면 남즈브텀 더만하니 하느님의 졍셩을 더하여야 할지라 웨그러하고 하니 태초에 아담이 먼저 하느님의 범죄한 것이 아니오 해와가 먼저 죄를 범한 것이라 젼에부터 오늘까지 마귀를 숭본하야 굿하기와 불공이며 미력과 산쳔으로 좃츠디니며 여러 귀신들을 섬기는 것시 다 부인의 조화하는바니엇지아니 남자브터 녀자가 더 죄를 짓는 사룸이 아니뇨..."83)

 

여성들은 아직도 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자신들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여성들이 미신을 더 많이 찾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남성들에게서 받는 억압과 학대의 돌파구를 이런 데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며,문제의 근원은 가부장에 사회에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제도적,구조적 죄를 보지 못하고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더 죄를 많이 지었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는 가부장제,유교전통에 젖은 집을 나와 교회에 가서 열심으로 가진 것을 바쳐 봉사를 해도,교회에서도 역시 남성들을 잘 받들어 모셔야 하고 남성들이 결정하는 일들을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오늘날의 교회여성들까지도 중대한 일은 남성이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것은 이런 조상들이 신앙적유산이라 하겠다.

 

여성들은 교회를 위해서 많은 희생과 열성은 바치면서도 자신들의 이러한 지원이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쓰여지는가를 알아보거나 결정하는데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의식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었다.즉 여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여서 교회생활을 할 때, 가진 것을 다 바치고 열심히 섬길 때 목적이 무엇이며, 그 결과는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을 성찰하는 일은 중요하다.

 

열심히 목사님을 섬기고 교회가 커지도록 열성을 다하는 것이 잘못된 제도와 구조의 사회를 그냥 받아들이고,유지시켜 나가는 것이라면 참된 보음의 전파라고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표현양태,교회의 나아갈 방향 등의 결정에 여성들은 참여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남자들이 결정한 것에 무조건 따라가기 때문에 남성중심적인, 정의가 없는 교회체제를 고수하고, 사회의 빛과 소금 노릇을 못한다. 따라서 주님의 명령대로 하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복음을 전해들은 여성들은 이제까지 억눌려 있던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경험을 한다.즉 하나님 앞에서는 남녀 모두 평등하다.

 

"상쥬-뎐디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내히샤 그ㅈ에 가장 귀하쟈-사룸이라고로 만물이 나 사룸의 싸우는 바-되여 남녀의 분간이 업시 구유하는 거시 리치의 당연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구체적인 삶에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1898년 3월 20일자 [대한그리스도인회보]에는 달성회당 여교우가 믿는 바를 실천하자고 주장하는 기사를 싣고 있다.

"아모 사룸이나 쥬를 밋으라면 줌 회기하야 이젼 힝실 다 버리고 쥬를 밋고 텬쥬를 의심업시 즐 밋어 쥬의 게명대로 힝흐느냐 뎐당복밧을 쟈요 세상에서도 평안하 복 밧을 자요."85)

 

(2) 술,담배에 대해서

 

그런데 여성들은 우선 술,담배를 멀리하고 미신숭배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믿는 징표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경셩마표교회 전도서 채규홍씨의 통신을 거하즉 거월 이십칠 저녁에 연초와 후환이라는 문데로 본교회 형데즈미의게 一쟝 권면하엿더니 맟춤 이때에 권사표지를 밧은 신태면 리태형 량씨와 녀쇽쟝 리한나 김마리아 녀교육 젼이나 왕씨가 그날브터 담비를 영영 거절하였다더라."86)

 

또한 "강화그믐교회의 마리아김씨의 굿셈"이라는 [그리스도인회보]에 실린 기사에서는 술장사로 연명하던 김씨 부인은 "내가 예수만 밋을뿐이 아니라 과연남을 죽게하는 슐쟝사도 아니하겠소이다"하고 남편에게 갖은 핍박을 당하여도 술장사를 그만두고 믿음을 지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즉 초기부터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술,담배를 멀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바로 선교사들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들 자신의 청교도적 신앙양식의 결단에 의하여 또 한국인의 개화진보를 위하여 술,담배,아편을 금지시켰다.

 

즉 술은 백성의 재산을 탕진케 하여 백성들을 점점 곤궁하게 만들며 장부의 기운을 꺾어 회복하지 못하도록 하는,건강과 재산의 손실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이들은 개화를 저지하는 요소라고 생각하여 술을 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교회에서는 계주론을 지어 교인들과 일반 백성이 술마시는 것을 금하기도 하고 북감리교 선교사들은 12회 연환회에서 공식적으로 금주를 결의하기도 하였다.88)

오늘날까지도 서구에서는 알콜중독의 문제가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적인 병폐에서 선교사들이 술,담배 등에 대해 신경질적인 금지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천주교의 경우 한국에서 술,담배의 문제는 신앙생활을 크게 좌우하는 요인이 아니었다. 유독 개신교만이 그러한 것은 아마도 선교사들의 세속문화에 대한 지나친 보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술,담배를 과용하는 것은 건강에도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가릴 수 있을 만큼, 결정적인 처도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가 그렇게 좁은 척도를 고집한 때 기독교는 점점 더 숲을 보지 못하고 가지만을 보는 편협한 종교로 화하고, 복음의 참 뜻은 상실한 채 형식만 무성한 종교로 타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