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숨은꽃 2~1. - 양귀자
김제에서 금산사로 들어가는 국도의 가로수는 수령이 녹녹잖은 단풍나무들이다. 지난 가을의 이 길은 하늘에 붉은 융단이 깔린 듯했다. 가을 하늘의 푸른 빛깔과 화염 같은 붉은 이파리들, 그 사이사이 번쩍이며 내비치던 금빛 햇살의 광휘는 겨울이 다 지나도록 내 기억의 창을 물들이고 있었다.
가을에는 거칠 것 없이 붉었던 이 길이 지금은 푸르고 싱싱한 녹색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주조를 이루는 색깔이 바뀐 탓이겠지만, 스치는 바깥 풍경은 지난겨울 동안 간직하고 있었던 기억 속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나는 택시 기사에게 두 번쯤 이 길이 맞는지 확인을 하였다. 한 번은 정식으로, 그리고 또 한 번은 앞좌석의 기사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우물거리는 형식으로 내 의혹을 표시하곤 이내 포기하였다. 기억에 대한 배신이 어디 이번뿐이던가.
추억의 영상은 한번 저장되었다고 해서 움직임을 멈추고 각인되어지지 않는다. 저장된 그 순간부터 기억은 저 혼자의 힘으로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영상으로 바뀌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때로는 기억과 현실을 맞추려는 덧없는 노력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끔씩 지금 보고 있는 것보다 이전에 보았던 기억을 더 신뢰하고, 그것에 더 많은 의미를 두고자 하는 고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그 속에 담긴 붉은 단풍나무의 환영을 털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더욱 세게 머리를 흔들어서 톱밥이 가득 찬 것 같은 이 무딘 머리를 말끔하게 털어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지난 가을, 나는 친구들 몇 명과 이곳을 찾은 적이 있었다. 지금은 전주로 옮겨 앉았지만 금산사 입구에 한 친구가 살고 있었던 탓이었다. 서울을 떠나 바람도 쐴 겸 시골 살림에 재미가 붙은 친구를 찾아보자는 그 여행은 의도가 그랬던 만큼 머리 아픈 일 조금도 없이 온전히 휴식으로만 채워졌었다. 늦가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고 있던 시월 하순이어서 끄트머리 단풍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도 알맞게 북적거려 축제의 분위기까지 풍겨주던 여행이었다.
그때도 서울역에서 같은 시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탔었고 거의 같은 시간에 김제역에 도착해 택시를 대절했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거의 여섯 달의 시차를 두고 똑같은 여로에 서 있는 것이었다. 그때는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들과 함께다소 들떠 있는 상태로 이 길을 밟았다면 지금은 혼자서, 물밑으로 가라앉는 듯 한 마음을 추스르면서 가고 있는 중이었다.어쩌면 그때의 거리낄 것 없는 휴식이 그리워 이곳으로 가보자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기계 앞에 앉아 끊임없이 모음과 자음을 찍어 내다 보면, 그런 어느 순간 삭제키를 눌러 흔적 없이 글자들을 없애버리고 다시 빈 화면에 자음 하나를 찍어 넣다 보면, 그 자음을 받쳐 줄 모음을 찾아 자판 위를 헤매다 보면, 그러다 보면 내가 지금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쩔쩔매게 되는 것이다. 망가진 것들을 위한 복원, 또는 휴식. 나는 좌석의 등받이에 몸을 묻고서 겨울을 지낸 나무들의 싱싱한 새 잎을 바라본다. 똑같은 식으로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별수가 없다.
나는 지난 가을에도 그랬던 것처럼 삼거리의 느티나무 아래서 택시를 내렸다. 그때는 여기에서 마중 나온 친구를 만났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다.
커다란 모과나무 두 그루, 가지가 찢어질 듯이 자잘한 감들이 매달려 있던 먹감나무가 세 그루, 단감나무와 굵은 가지의 벚나무도 한 그루씩 마당을 채우고 있던 친구의 옛집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친구는 과실수들이 많던 양지 바른 그 집을 팔아 버리고 전주에서 피자 가게를 열었다. 향기로운 모과와 신선하고 달콤한 먹감들 대신 친구는 밤낮없이 치즈와 양송이 냄새를 맡으며 남의 월세를 산다. 팔아 버린그 집이 눈에 밟혀 금산사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산다던 그 친구는 내가 지금 이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되짚어 서울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지는 않을 것이므로 나는 지난번 묵었던 바로 그 여관에 방부터 하나 잡았다. 아니, 이 표현에는 상당한 왜곡이 있다. 방부터 잡아 누군가에게 오늘 밤 묵고 갈 것이라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되짚어 서울로 가는 마지막 기차를 타고 말 것 같아서 나는 여관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일단 방을 하나 달라는 말을 던져 버리고 나자 조용한 평화가 찾아왔다.
방을 달라는 내 말에 한 점의 의혹도 없이 앞장을 서는 여관 아주머니의 뒷모습이 마치 운명의 신호 같았다.
나는 물릴 수 없는 패를 던져 버리고 말았다. 이것으로 나는 이 여행에 대한 끝없는 망설임에 자진하여 마침표를 찍었다. 그리고 묵묵히 아주머니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하나의 숙제를 겨우 끝내 놓고 다음 숙제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방은 의외로 밝고 깨끗했다. 창은 뒤뜰을 내다보고 있었고 그 창에 활짝 피어난 벚꽃이 그림처럼 아른아른 내비쳤다. 지난번에는 길가에 면한 방에서 묵었기 때문에 상당한 소음을 감수해야 했었다. 물론 그때는 그런 것이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이 여관을 찾으면서 그 이상의 기대도 품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깨끗하고 조용한 방을 하룻밤 거처로 삼을 수 있게 되자 기분도 훨씬 맑아졌다. 다음에 할 일은 방을 나가서 때늦은 점심을 사먹어야 한다는 것도 확실하게 결정이 되었다. 이만큼의 확실함도 얼마 만에 가져 보는 것인가. 나는 가방에서 손지갑만 꺼내 들고 허리를 꼿꼿이 편 채 여관을 나왔다. 나오면서 보니 여관의 뜰에도 무너질 듯 가득 꽃 더미를 이고 있는 벚나무가 어려 그루 서 있었다. 낙화를 밟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날개를 달기 전에는 발밑에서 으스러지는 여린 꽃의 비명을 도저히 피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밥집들은 모두 상가에 모여 있었다. 식당과 기념품 가게, 춤을 출 수 있는 술집이 상가에 있는 업종의 전부였다. 단풍놀이 철도 아닌데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식당 여주인한테 물어 보니 단풍보다는 일제 때 심어 놓은 벚꽃나무가 더 장관이라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덧붙이는 말이, 요즘 사람 놀러 다니는데 계절이 어디 있느냐는 반문이어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나 또한 그녀가 보기에는 계절에 구애 없이 놀러 다니는 사람일 것이고, 나 스스로도 소설 쓰기의 연장으로 여기에 왔으니 이것도 노동의 하나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은 탓이었다.
소설이 창작 노동이라는 개념을 마음의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데 아직까지 서투른 사람이 나였다. 어깨가 뻐근하거나, 약국에 달려가 파스 따위를 사다 등에 붙이고 뒤척이는 날이나 되어야 저작 노동의 고단함을 얼굴의 화끈거림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문학의 절대화나 신비화를 편들고 있지는 않으면서도 이 노동이 목숨 걸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제대로 ‘일용할 양식’이 되어본 적이 있었던가 하는 경계심 때문에 나는 이 뼛골이 빠지는 노동을 감히 노동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소설 쓰기가 노동의 한 양상으로 분류되는 것의 미덕은 문학의 폐쇄화를 막아 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기꺼이 열어 놓으며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 이 말은 곧 문학이 어떻게 하면 한 시대의 진정한 동반자가 될 수 있는지를 일러주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또한 이 말은 기꺼이 열고자 하면서도 전부를 열어 보이려고 하지 않는 작가의 속성에 대한 질타처럼 내게 들린다. 내 마음의 저항은 이 열림과 닫힘의 반동에서 야기된다.
닫혀 있었기에 글쓰기의 품성을 배웠고, 열어야만 했기에 끝없이 회의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얼굴을 화끈거리지 않고 나의 일을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난 시대의 부채를 바라보면서 다른 이들은 또 어떻게 계급성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것이든, 그 일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행위라면, 그 노동에 의미를 두는 순간부터 오류가 시작된다. 문학은, 그것의 무게를 강조하면 할수록 떨어지기 쉬운 무엇이다. 강조할 대목은 삶이지 문학이 아니다.
점심때가 지난 시간이어서인지 식당 안에는 나밖에 없다. 주인아줌마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의 숙제를 봐준다고 언성을 높이며 열을 내고 있었다. 맨날 오락실이나 기웃거리니 이 모양이지, 하는 말이라든가 배달되어 오는 학습지는 한 번도 제 날짜에 푸는 꼴을 못 보았다는 푸념 따위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익히 듣는 내용들이다. 늘어뜨린 발을 대롱대롱 흔들면서 마지못해 공부를 하고 있는 사내아이는 이제 국민학교 2학년이나 될까, 제 어머니의 꾸중을 건성으로 들어 넘기며 자주 바깥을 내다본다.
“장사한다고 놀자판 동네에서 애를 키우니 되는 게 없이 엉망이라요.”
컵에 물을 채워 주며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다. 이 땅에는 이처럼 맹모삼천지교를 현모의 비결로 삼는 어머니가 많다. 강남의 8학군에 들어가 산들, 아니 이 땅의 어디에 터를 잡은들 맹모의 한숨이 사그라질 것인가. 밥값을 치르며 모자가 하고 있는 숙제를 들여다보니 문제집을 복사해서 나누어 준 듯한 시험지 풀기다. 아이는 봄에 피는 꽃, 여름에 피는 꽃을 가려내는 문제 앞에서 제 어머니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 보도 못한 꽃들만 맞춰 내라고 하니, 지천으로 흔하게 널린 꽃 이름이나 제대로 배워 주면 그만이지, 무슨 수수께끼도 아니고.”
말하다 말고 푸, 웃어 버리는 여자 앞에서 나도 그만 싱긋이 웃고 만다. 공부도, 사는 것도 모두 수수께끼 같다고 생각하면 성마른 심정이 다소 누그러든다. 수수께끼 앞에서 무작정 화를 낼 수는 없다.
오늘 처음으로 밥다운 밥을 먹어서인지 식당에 들어오기 전보다 한결 안정이 된 상태다. 누군가 그랬다. 배가 고프면 우울증에 빠지니까 자꾸 먹어서 위를 빈 상태로 방치해 놓지 말라고. 그 말도 일리가 있다. 기분 전환에도 에너지가 필요한데 에너지를 채워 주지 않으면 우울에서 빠져 나오기가 힘이 들 것이다. 우울, 혹은 우물.
이제는 산보삼아 귀신사에 갔다 오면 해가 질 것이었다. 자동차를 이용하면 십여 분 만에, 걸으면 삼십 분 정도의 거리에 귀신사가 있었다.
귀신사는 내일 아침에 들러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새로 단청을 입혀서 울긋불긋하기가 새색시 색동저고리 같은 금산사는 지난번 둘러본 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하고 나니 당장 가볼 만한 곳이 없었다. 아니, 이 말도 보다 정확한 진술로 바꾸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사실을 말하면, 이곳에 오면 제일 먼저 귀신사의 텅 빈 적요 속에서 두어 시간쯤 앉아 있고 싶었다. 무작정 떠남에 있어 가장 많은 유혹을 던졌던 곳도 귀신사였다.
귀신사, 거기에는 무언가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획 속에서 자꾸 귀신사 행을 뒤로 미루기만 하였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먼저 부닥쳐서 먼저 실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내 머릿속에 저장된 귀신사의 풍경 또한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배신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기대가 무너질 때에 대비해서 나는 스스로를 단련시킬 셈인지도 몰랐다. 김제역에서 곧장 귀신사로 가지 않은 것도, 그러면 방을 구한 뒤라도 바로 귀신사를 찾지 않은 것도, 그곳에 가도 점심 요기쯤은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이곳에서 허기를 때운 것도 나름대로는 아끼고 감춰 둘 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지난 가을에 귀신사는 우선 이름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영원을 돌아다니다 지친 신이 쉬러 돌아오는 자리. 이름에 비하면 너무 보잘 것 없는 절이지만 조용하고 아늑해서 친구는 아들을 데리고 종종 그 절을 찾는다고 했다. 단지 서울에서 멀리 왔다는 것만도 흔감해서 애써 명승지를 찾아다닐 마음이 없던 일행은 여행의 구색을 맞춘다는 의미로 흔쾌히 귀신사를 찾았다. 확실히 그곳은 멀리서 일부러 들른 사람들에게 구경시켜 줄 만한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절임에는 분명했다.
본당의 문을 열어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한 금동불상을 보기 전에는 여느 여염집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십상인 외양이어서 그때도 그 흔한 관광객 한 사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면 상당히 많은 말을 하고 있는 절이 귀신사였다. 드러나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낡고 허름한 귀신사의 풍경은 여행 중의 온갖 화사한 기억을 다 물리치고 가장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물러 있었다.
경내도 좁고 볼 만한 석탑 하나 갖고 있지 않은 이유도 오랜 시간 마음으로 보고 마음을 채워 가라는 속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한 바퀴 휘 둘러보고 나와 버리려는 자는 사절, 이라는 팻말을 어디선가 본 듯싶다는 황당한 착각도 얼마든지 품게 만드는 그런 절이었다.아마도 나는 착각 속의 팻말에 충실하기 위해 여기에 다시 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 단지 스쳐 지났을 뿐이었다. 마음에 담을 것을 제대로 주워 담지 못하고 왔다는 생각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기억의 세부적인 영상들이 뭉그러지기 시작하자, 나중에는 아주 중요한 무엇을 거기에 놓아두고 와버렸다는 식으로 느낌이 굳어졌다.
빨리 가서 찾지 않으면 영영 사라져 버릴 무엇, 시효가 지난 뒤에 가면 버려지고 말 무엇. 거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서둘러야겠다는 다급함이 솟았다.
나는 삼거리를 돌아 좌회전하려는 택시 하나를 붙잡았다. 그때 절 마당에 피어 있던 이름 모를 가을꽃은 지금 뿌리로만 견디겠지. 위태위태한 아름다움 대신 넉넉하고 다정한 꽃송이가 참 푸근했었는데. 가을의 그 마지막까지도 꽃잎 한 점 뭉개지지 않고 송이송이 많이도 피어 있었지. 지금도 처마끝 에서 풍경이 바람 소리를 내며 흔들거리고 있을까. 너무 낡아 단청 빛깔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채, 그저 세월에 바랜 나무의 단아한 갈색만이 흔들리는 풍경과 그 위의 푸른 하늘을 받아 내고 있었지. 절 뒤의 작은 동산에서 홀로 열매를 맺고 있던 오래된 감나무들은 이 봄에도 새 잎을 틔우며 하늘향한 해바라기에 골몰하고 있을 텐데. 꼭대기 가지에 열린 감들은 수십 년을 두고 산새들이나 입을 댈까, 사람의 손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을 걸, 그 때 우리는 바닥에 버려진 대나무 막대기를 휘둘러 터질 듯이 익어버린 달디단 감을 땅에 떨구곤 했었지. 그 맛은 얼마나 달콤했던가. 도시로 돌아와 며칠을 찾았어도 그런 감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 년 전의 감맛을 떠올리고 있는데 벌써 절 입구였다. 택시 기사는 휭하니 차를 돌려 오던 길로 달아나 버리고 나는 인기척 없는 동네를 기웃거리며 절로 가는 길을 밟았다.
인기척은 없었지만 발걸음소리에 내다보는 개들은 많았다. 사립문에 기대어 커다란 눈으로 낯선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개들은 내가 가까이 가면 슬그머니 꼬리를 사리고 뒤로 물러선다.
길의 왼쪽은 단감나무 과수원이고 오른편으로 대여섯 채의 집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절이 보일 것이다. 길에서는 절대 보이지 않는다. 길의 끝까지 가서 몸을 돌려야 비로소 절의 옆구리가 나타나는 것이다. 나는 흙에서 풍기는 향내를 맡으며 천천히 길을 올라갔다.
바로 그때였다. 곧 보게 될 귀신사의 모습에만 몰두라고 있던 내 귀에 찢어질 듯한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이내 귀신사 쪽에서 죽어라고 달려오는 여자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택시에서 내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하고 개들의 마중만 받았던 나는 눈앞에 나타난 여인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구분을 못할 만큼 깜짝 놀랐다. 그럴 만도 했다. 여자는 맨발에다가 목단꽃 무늬가 화사한 긴 치마를 펄럭거리면서 달음박질을 치고 있었는데 쇳소리로 질러댄 비명의 주인공답지 않게 얼굴에도 환한 목단꽃 웃음을 그려 놓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는 잽싸기도 흡사 산토끼 같아서 단숨에 내 곁을 스쳐 바람같이 어느 집으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 여자가 내 옆을 지날 때 나는 한 번 더 온통 흰 이빨이 드러난 팽팽한 웃음을 확인하였다.
소름이 돋던 그 비명은 그럼 환청이었던가, 하는 의혹을 품을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또 한 남자가 여자가 왔던 길로 구르듯이 내달려 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한테선 비명은 없었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흰 런닝 셔츠 밑으로 뚜렷이 드러나는 늑골의 오르내림이 비명 이상의 거친 호흡을 선명하게 전달해 주었으므로 나는 다시 긴장하여 옆으로 비껴 섰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내 곁을 바람처럼 씽하니 지나치지 않았다. 두어 걸음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고 선 남자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주의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의 새된 외침이 들려 왔다.
“뭐하는 거야! 빨랑빨랑 들어오지 않고 뭘 우물거려?”
여자는 내 뒤쪽의 어느 집 담장에 기대어 서 있었다. 치마에 새겨진 굵은 목단꽃이 어지러울 만큼 붉었다.
“이런, 썅, 너 거기 가만있어!”
남자는 이내 활처럼 휜 늑골을 내보이며 덮칠 듯이 여자에게로 가버렸다. 남자가 여자의 어디를 어떻게 했는지 금방 여자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리고 그 위에 다시 숨넘어가는 여자의 깔깔거림이 겹쳐졌다. 나는 그때까지도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멍한 시선으로 그들 남녀가 사라진 대문 없는 집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 작은 소동 덕분에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빨리하여 귀신사를 향했다. 이제는 귀신사가 예전의 분위기와 같은가 다른가를 따져 볼 기분도 아니었다.
회상 속으로 들이밀었던 내 발은 아까의 남녀에 의해 호되게 짓밟히고 말았다. 진실로, 메마른 황토를 걷고 있는 오른발의 발가락 어디가 한순간 끓어질 듯이 아픈 듯도 싶었다. 따지고 보면 바로 그 남자와 여자가 나타난 순간부터가 이 여행의 첫 시작이었다. 이제까지는 반 년 전에 있었던 가을 여행의 연장이거나 그것의 반추에 불과했지 한 번도 새 경험에 마음을 후르르 떨어 본적이 없었다. 발가락 어디가 아팠다면, 그것은 꿈속인 줄 알고 여지없이 꼬집어 봤다가 느닷없이 껴안게 된 생살의 아픔일 터였다.
기억을 부숴 버리는 또 다른 경험은 마음을 다스릴 새도 없이 연이어졌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한 번 더 발가락을 꼬집어 봐야 믿을 수 있거나 말거나 할 상황이었다.
귀신사는 거기 없었다. 절은 뼈대만 남아 목하 보수 공사 중이었다. 적요 속에 잠겨 있으리라던 경내는 허리춤에 더러운 수건을 찼거나 귀 뒤에 피우다 만 담배를 찔러 둔 대여섯 명의 인부들로 온통 수선스러웠다. 작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 보고 있던, 위패를 봉헌해 둔 사당과 불상을 모신 본당은 커다란 기둥 몇 개만 남은 채 홀랑 껍데기를 벗어던진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게다가 드러난 안의 모습조차 내용물을 보호하기 위해 뒤집어씌운 거대한 너비의 누런 광목에 힘입어 불길한 느낌을 자아내기에 출분할 만큼 섬뜩했다.
아마도 볕에 바래지 않은 누런 광목이 주는 상갓집 분위기 탓이겠지만, 거기는 신이 지친 몸을 쉬기 위해 돌아오는 자리가 아니라 이제는 병들어 옴짝달싹도 못 하는 신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위해 돌아오는 음산한 자리라고나 해야 맞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은 두 채의 건물을 돌아가며 세워 놓은 여러 개의 사다리들과도 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신의 영혼들, 사다리를 타고 아득바득 하늘로 오르는 귀신들의 도포 자락이 보였던가.
그제야 바라본 지붕은, 절망의 빛깔 같은 기와를 이고 기와 틈 사이로 가늘가늘한 풀포기도 숱하게 살려 내고 있던 그 지붕은, 남김없이 벗겨져 흉측한 속살을 부끄럼도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지붕을 보고 완전히 정이 떨어져 경내에 들여놓았던 서너 걸음을 뒤로 물렸다.
말했듯이 서너 걸음만 절 안으로 들이밀었어도 볼 것은 다 볼 수 있을 만큼 귀신사는 작은 절이었다. 그렇게 좁은 공간 속으로 낯선 방문객이 들어왔건만 시멘트를 이기거나 널빤지에 대패질을 하고 있거나 한 인부들은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왜 왔느냐고 물어 주기나 했으면. 나는 돌아서지도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서성거렸다.
모래를 걸러 내는 체가 걸려 있고, 그 밑으로 수북하게 모래무덤이 솟은 자리가 큰누이의 얼굴처럼 아늑하고 포근한 꽃송이가 뿌리를 내리고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는 생각은 분해된 귀신사에 실컷 실망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실컷 기억에 배신을 당해 놓고도 그때까지 나는 귀신사를 벗어날 마지막 한 걸음을 떼어 놓지 않고 있었다. 아직 뒤 안의 감나무 동산과 그 누이 같던 정다운 꽃송이를 기억과 비교하지 못한 탓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나는 뒤 안의 감나무를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만년과(萬年果)쯤으로 마음에 잡아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마든지 배불리 따먹어도 따낸 흔적도 없이 언제나 가지가 휘도록 달디단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는 그 만년과. 그렇게 비유하자면 마당에 소복이 피어 보는 이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던 그 누이 같던 이름 모를 가을꽃은 우담바라화(優曇鉢羅花)였다.
3천 년에 한 번씩 꽃을 피운다는 그것, 단 한 번만 그 향기를 맡아도
온갖 시름과 눈물이 다 사라진다는 우담바라꽃을 귀신사에서 보게 되리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담바라는 흔적도 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 모래무덤만 솟아 있는 것이었다.
나는 차마 눈을 돌리지 못하고 곱게 걸러져 나온 봉긋한 모랫더미를, 그 속을, 한 치 아래의 땅속까지도 들여다보겠다는 듯이 서 있었다. 만년과를 보려면 인부들 사이를 뚫고 본당을 거쳐 둔덕을 올라야만 했다.
거기에 주홍의 열매가 있지 않다는 것은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봄에 열매를 맺는 감나무는 없으니까. 그러므로 뒷동산에 올라야 할 이유는 만년과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기어이 거기에 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자 또렷하게 절을 떠받들고 있던 예전의 적요가 떠올랐다. 그랬다. 나는 아직 적요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교교한 고요 속에 온몸을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목 밑까지 흠뻑, 몸속의 모든 것을 다 증발시켜 버리고 남을 만큼 오래.
마당을 가로지르는 나를 가로막는 사람은 없었다. 절 옆 어느 집의 낮은 담장 너머로 웬 백발의 할머니만 나를 예의 주시하고 있을 뿐 인부들은 갖가지 연장을 뛰어넘고 비껴가며 통과하는 나를 여전히 본 척도 하직 않았다.
불사(佛師)인 탓인가, 인부들은 묵묵히 자기 할 일만 한다. 그 묵묵함조차 저기 벌거벗은 건물 안의 누런 광목의 힘이 그렇게 시키는 듯 하여 나는 광목으로 뒤덮여진 불상이며 죽은 자의 위패 따위를 보지 않으려고 애써 시선을 피했다. 그 다음에 내가 본 것은 가득 쌓여진 새 기왓장과 스티로폴들, 그리고 건물의 잔해로 짐작되는 뜯어낸 나뭇장들이었다. 뒷동상은 창고 역할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나는 고개를 우러러 그래도 청청한 잎을 가지마다 가득 피우고 있는 푸른 잡목들과 잡초 사이에 끼어서도 숱하게 얼굴 내밀고 있는 하얗고 노란 이름 모를 풀꽃들도 바라보았다. 다행히 더 이상의 훼손은 없었다. 건축 자재는 뉘어진 대로 누워 있을 것이다. 움직이는 존재는 나밖에 없으므로 나는 기꺼이 이 푸른 창고에서 적요를 맛볼 것을 작정하였다.
어쨌거나 이제 나는 좀 쉬고 싶었다. 앉고 보니 벌거벗은 귀신사의 지붕이 환히 내다보이는 자리였다.
바람은 훈훈했고 이름 모를 작은 날것들은 분주히 숲 덤불을 오가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풀밭에 드러누워 한숨 달게 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감은 눈 속에서 귀신사의 평화를 회상하기라도 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때 인부 하나가 언덕을 올라와 쌓아 놓은 헌 목재 더미를 뒤적거렸다.
나는 그가 필요한 것을 찾아 이내 내려갈 것이라고 믿었다. 흰 런닝 셔츠는 어쩐지 낯이 익었지만 미처 아까의 그 씩씩거리던 남자를 떠올리지는 못하였다.
길이와 너비가 제각각인 판자들을 뒤적이던 사내가 갑자기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던질 때까지도 나는 그 사내의 말을 받아야 할 사람이 왜 나인지 정녕 알 수가 없었다.
“틀림없네요. 어쩐지 낯이 익다 했더니, 맞지요?”
나는 별수 없이 뒤를 돌아다보았지만 거기 누가 있을 턱이 없었다. 남자는 분명 나한테 말하고 있었으니까.
“오산에서 국어선생 했던 분이 아니냐구요? 오산을 잊었다면 고흥 밑의 거금도, 거금도는 아시겠지요.”
거금도? 나는 중인환시(衆人環視)에 내 일기장을 발각당한 기분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거기 거금도 오산에서 나는 첫 교직의 일 년을 보냈었다. 물론 그가 말한 대로 국어를 가르쳤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누구인가. 나는 그제야 남자가 아까 산발한 머리의 여자를 쫓던 바로 그 사내인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 해도 이 남자는 누구인가.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에이, 그만둡시다. 애써 기억할 것도 없는 위인이니까. 뭐, 그냥 오산 사람이었다고나 합시다.”
그래도 사내는 굉장히 반갑다는 표정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내 옆에 풀썩 주저앉아 담배를 한 개비 꺼내 들었다. 담배를 들고 있는 오른손 엄지 한 마디가 뭉툭하다. 저 뭉툭한 손가락, 거기에 느닷없이 바다가 출렁거린다. 나는 의구심을 가질 새도 없이 그에게 숙자 오빠가 아니냐고 물었다.
“용케 기억을 하십니다, 그려. 하기야 오산 사람치고 이 김종구를 모른다면 거짓말이지요. 그래서 나도 오산을 떠났지만서두.”
사내는 볼이 미어지도록 힘껏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면서 히죽 웃었다.
김종구라, 나는 이 느닷없는 옛 기억과의 조우에 얼떨떨한 채로 남자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선이 뚜렷한 눈썹과 약간 각이 진 듯한 이마, 그리고 굵은 고랑의 긴 인중은 역시 낯이 익었다.
우리 사이에 가로놓인 십오 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그의 얼굴에서 출렁이는 바다를 보았다. 십오 년 전의 바다가 거센 파도의 으르렁거림으로 다소 불안한 것이었다면, 지금 그의 얼굴에 새겨진 바다는 거칠기는 해도 폭풍의 징후는 없는 그런 것으로 내게 비쳤다. 그래도, 다시 말하지만, 그를 알아봄과 동시에 나는 그가 여전히 바다의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이 말은 그가 바닷가에서나 살아야 할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도 할 수 있다. 한군데에 붙잡아 둘 수 없는, 물결에 휩싸여 세상 곳곳을 다 굽이쳐 흘러야 하는 그런 운명의 생이 있다면 아마도 그것이 바다의 사람일 것이었다.
“제가 어떻게 금방 선생님을 알아보았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실은 지난번에 선생님 사진을 몇 장 보았거든요. 숙자년이, 내 동생말입니다, 잡지에 난 선생님 사진을 오려서 간직하고 있답니다. 하여간 뭐든 잡동사니 모으기를 좋아하는 그 애 버릇은 여전합니다. 글쎄, 국민학교 시절의 공책까지 싸짊어지고 시집을 갔다면 더 말할 게 없지요”
김숙자. 뒷자리에 앉아서 가는 목을 빼고 나를 쳐다보려고 애쓰던 아이. 조카아이를 업고 삶은 멸치에서 새우며 꼴뚜기 새끼를 골라내다 나를 만나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고개를 푹 숙이던 숙자는 김종구의 누이동생이었다. 그러자 곧 이어서 그 시절의 김종구를 회상하게 해주는 몇 개의 삽화가 차근차근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지금 이 자리에서도 꺼내 볼 수 있는 삽화는 모두 네 가지쯤 되었다.
그것들 모두가 하나같이 선명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적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실마리만 풀어 주면 다시 되찾을 수 있는 기억이 얼마나 많은가.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헝클어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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