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 뜯는 날의 행복 / 반숙자
들꽃방석에 앉아 쑥을 뜯는다. 다보록한 쑥에 창칼을 대면 저항 없이 쓰러지는 헌신, 뒷산은 진달래로 몸 달구고 이웃 밭에서는 밭고랑 다는 워 워워 소리.
읍내 아파트에 살면서부터 차를 타면 10분도 안 걸리는 뽕나무 골 농장에 자주 오지 못했다. 환삼덩굴 엉키듯 엉켜 사는 세상살이 참견하다 보니 정작 나 좋은 일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저녁에 농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개나리와 목련이 피었더냐고 물어보면 궁금하거든 가보라는 통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다음 날 저녁이면 핀잔을 잊어먹고 또 묻는다. 감자는 싹이 나느냐, 마늘밭에 곤자리는 안 먹더냐, 밥상머리에 앉아 시시콜콜 물어봐도 어제 같은 답, 그러다가 아흐레 만에 나선 걸음이다.
현관문을 따기도 전에 올 봄에 새로 심은 과목들의 안부부터 살핀다. 내가 궁금해 하던 사이 목련은 피었다가 지고 모과?이 수줍게 피어난다. 화무십일홍이라더니 봄꽃 피고 지는 것은 꿈결처럼 느껴진다.
옆밭에 조카네가 황소를 부려 고추밭 고랑을 따고 있다. 일꾼을 구하지 못해 식구끼리 한다는 말을 듣고 일손 비지 않게 점심을 지어준다. 자청해 놓고 찬거리를 준비하려 나섰다.
정구지 나긋한 싹을 도리고 돌나물도 뜯었다. 초고추장에 살짝 무치면 산뜻한 그 맛이라니, 쑥은 바득바득 씻어 쑥물을 빼내고 들기름으로 조물조물 주물러 날콩가루를 묻힌 후 끓는 멸치다시 된장국에 뿌려넣고 가스불을 끈다. 한참있다가 한소큼 끓여 파, 마늘을 넣으면 국물이 순하고 향기도 좋다.
시골에서는 노상 먹는 된장국인데도 물리지가 않는 것이 된장 체질이라 그런 것 같다. 앞도랑에서 돌미나리를 뜯어다 살짝 데쳐 무치고 골파로 강회도 만들엇다. 일꾼들이 쑥국을 두 대접씩이나 먹었다. 쑥국을 비우고 나물을 털어넣고 밥을 비볐다. 그렇게 점심을 푸지게 먹고 나서 바구니 옆에 끼고 나선 길이다.
나물도 조급하게 뜯으면 재미가 없다.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뜯어야 나물 뜯는 삼매경에 젖어든다. 옛날의 여인들은 구황식품으로 쑥을 뜯었다지만, 한 세기도 못 가 나는 건강식품으로 쑥을 뜯고 뜯는 재미에 쑥을 뜯는다.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쉰다. 머릿수건도 벗는다. 산비탈에 군락을 이루어 피어난 진달래 조팝꽃이 곱다. 세상이 곱다. 고운 꽃을 아픔없이 본다는 게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낸 이는 저토록 고운 진달래도 슬픔인 것을, 사실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가 슬픈 그림자를 지닌 것은 아닌지. 허무를 알아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햇살이 등허리를 간질인다. 양지녘 고양이 졸음 오듯 오수에 젖는다.
졸음 오는 눈으로 발 아래 뜬 세상을 본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내다보는 느낌이 이럴까. 상행선 하행선 꼬리를 잇는 차량들의 행렬 가운데 사고가 났는지 경광등이 돌아가고 있다.
누가 또 다치고 생명을 잃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깨지고 죽어가면서 왜 줄창 앞서려고만 하는지. 뒤처지는 고통이 죽음만이야 하겠는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의 삶도 아름다운데...농사를 짓고 사는 아낙네가 생존 경쟁의 비정함을 짐작이나 하랴만, 빨리 달리다 보면 목표만 보이지 간이역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은 자잘한 기쁨들이 모여 삶의 원동력이 되고 보람을 안겨 주기도 한다. 최고야 하나면 되고 여럿의 차선들이 울고 웃으며 삶이라는 대하로 흘러가지 않는다.
장 바닥에서 순대국을 앞에 놓고 함박웃음을 웃는 촌로의 삶이거나 지친 어깨를 아기들의 환성 속에서 쉬는 민초들의 가슴에도 보석 같은 기쁨이 있다.
나는 지금 한 뼘의 땅, 한 뼘 어치의 햇볕으로도 해맑게 웃고 있는 솜양지꽃의 충만함에 젖는다. 패기도 능력도 없는 약한 자의 변명일지 몰라도, 내게 없는 것을 찾아 남과 비교하면서 고통스럽게 지내느니, 내게 있는 것에서 기쁨을 찾고 보람을 느끼며 사는 것이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지혜라고 귀띔해 주는 것 같다. 이러다가도 저 아래로 내려가면 꺼지지 않는 욕망으로 괴롭기도 하겠지만…
바람이 청정해서 호흡선을 해 본다. 그리고 어느 선승처럼 조용히 뇌어본다. 숨을 들이마시면서 내 몸을 안정하고, 숨을 내쉬면서 웃음을 띠웁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 순간이 경이로운 순간임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나를 쑥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생각나고 지금거리는 보릿겨 쑥개떡을 부끄러워하며 건네주던 어릴 적 친구도 생각나는 봄 들녘, 내 바구니에는 쑥말고도 최선의 꽃을 피워 올린 작은 솜양지꽃의 무심無心이 큰 무게로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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