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닥사스다
아닥사스다 : 뜻 : 대왕
1. 바사왕인데 아하수에로의 아들이다. 일반은 아닥셀구세스 1세로 알고(주전465-424년) 론기마누스라 불렀다. 저의 재위중 관원들이 예루살렘재건을 중지시키자는 고소가 있었으나(스 4:7-23)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였다. 즉위 20년(주전445년)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성벽의 수축을 필하고 저의 즉위 30년까지 유대총독으로 있었다.
2. 아닥셀구세스 2세이다(주전404-358년). 다리오 2세의 아들인 데므네몬이라 불렀다. 즉위 7년에(주전398년) 학사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율법책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귀환하였다(스 7:1-8:1).
1.바사 왕 아닥사스다 1세
1)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스7:1).
2)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왕 이십년부터 삼십이년까지 십 이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느5:14).
2.예루살렘에 대한 에스라의 사명을 인가함
1)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의 학사인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왕이 내린 조서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조서하노니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찌어다... 나 곧 아닥사스다왕이 강서편 모든 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의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신속히 시행하되 (스 7:6,11-13,21:7장
3.일시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정지시킴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그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이제 너희는 명을 전하여그 사람들로 역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리리라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 아닥사스다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역사를 그치게 하니(스4:7,21-23).
4.예루살렘 중건에 대한 느헤미야의 요청을 허가 함
왕에게 고하되 왕이 만일 즐겨하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하였는데... 또 왕의 삼림 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리사 저로 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나의 거할 집을 위하여 들보 재목을 주게 하옵소서 하매 내 하나님의 선한 손이 나를 도우심으로 왕이 허락하고 (느2:58).
5.느혜미야를 예루살렘에 가게 함
느 2:5,8 (4를 보라)
8.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허락함
그 때에는 내가 예루살렘에 있지 아니하였었느니라 바벨론 왕 아닥사스다 삼십 이년에 내가 왕에게 나아갔다가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느13:6).
아닥사스다(아르탁세륵세스) 1세 롱기마누스(Artaxerxes 1 Longimanus. 롱기마누스란 이름은 손이 길었다 해서 생긴 것이다)가 발표한 것이다. 이것은 질적인 면에서는 앞을 두 칙령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이 조서는 에스라에게 행정장관들(有司)과 재판관들의 임명권을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행정관들과 재판관들을 정치와 종교의 전권을 장악하여 유대법과 페르시아법에 따라 재판하고 중벌을 내릴 수 있었다. 아닥사스다왕은 명하기를:
에스라여 너는 네 손을 있는 네 하나님의…율법을 아는 자로 유사와 재판관을 삼아 강 서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유배시키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스 7:25, 26).
에스라는 그의 보고에서 말하기를 그가 지도 역량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는데 아닥사스다왕 제7년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하고 그 얼마 후에 “왕의 조서를 왕의 관원과 강 서편 총독들에게 부”쳤다고 하였다(스 8:36). 그는 또 말하기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좇아 성전 건축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하였다(스 6:14). 그가 세 문서를 언급하면서 조서라는 낱말을 단수로 쓴 것은 이 조서들의 통일성을 나타내려 한 것이며, 그가 특히 세 번째 조서에 주의를 환기시킨 것은 셋째 조서가 없으면 앞서 두 조서가 미진하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의 합법적인 제2의 탄생을 가능케 해 준 것은 아닥사스다왕 제7년에 반포된 세 번째 조서였다. 유사와 재판관의 임명권을 부여하고 특별히 지방 정부차원에서 옛 유대 율법의 재건을 허락함으로써 수도 예루살렘의 회복을 가능케 한 것은 이 세 번째 조서였다.
따라서, 가브리엘이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조서)을 말할 때 그 마음에 두었던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조서였다.
그렇다면 그 조서의 연대를 알 수 있는가? 물론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에스라는 아닥사스다왕 제7년 1월에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얼마 후에 왕의 조서를 이행하였다. 유대의 달력은 봄에서 봄까지를 계수하기 때문에, 고대 예루살렘에서의 5월은 우리가 사용하는 현대의 달력으로 7월 중순과 9월 중순 사이에 해당한다(특정한 해의 정월 초하루가 언제인가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난다). 아닥사스다 제7년 5월이면 기원전 457년 늦은 여름이나 초가을에 해당하며 얼마 후 왕의 조서가 이행되었다.
상당수의 성경학자들이 70이레(週)의 시작을 기원 전 457년이 아니라 기원 전 444년으로 잡고 있는 데 대한 반박(Maxwell, C. Mervyn, God Cares, vol. 1(Ontario, Canada : Pacific Press Publishing Association, 1981), pp. 245-247). 기원 전 457년과 444년[성서 주석가들 중에는 예루살렘 중건령이 B. C. 458년과 445년에 반포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일 강의 엘레판틴(Elephantine) 섬에 있는 한 유대 수비대 촌에서 연대가 기록된 파피루스들, 그 중에서도 “크라일링 6”(Kraeling 6)이라고 알려진 연대가 이중으로 표시된 파피루스가 발견됨으로써 B.C. 457년과 444년 설의 정확성이 확인되었다(Horn과 Wood의 “The Chronology of Ezra 7”을 보라] 두 차례에 걸쳐 바사(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465-423 B.C.)는 예루살렘 중건을 위해 조서를 내렸다. 기원전 457년 조서는 왕의 재위 7년의 것으로서 권한 부여 범위가 대단히 광범위한 것이었다. 기원전 444년의 것은 왕의 재위 20년에 반포된 것으로서 예루살렘 재건에 따르는 권한 인정이 상대적으로 제한된 것이었다(에스라 7장, 느헤미야 2장 참조).
우선 아닥사스다왕이 다소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이 두 연대 중에 어느 것을 70이레의 시작으로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컨대, 그는 언젠가 사나운 사자의 공격으로부터 그를 구출해 준 재치있는 친구를 상 주는 대신 추방했다. 또 한번은 그의 대리인이며 매부이기도 한 메가비주스(Megabyzus)가 이집트의 반란군 지휘자 이나루스(Inarus)에게, 항복하기만 한다면 목숨은 보장한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아닥사스다는 이나루스를 처형해 버렸다.
바사(페르시아)의 조서는 다시 뒤집을 수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단 6:8; 에 8:8). 아닥사스다 1세의 줏대 없음과 변덕스러움은 메가비주스를 크게 실망시켰고, 결국 그와 그의 동료 페르시아인들이 아닥사스다에 대해 공개적인 반역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로서 바사 제국은 중대 파국에 직면했었다.
바사 법에서는 한 번의 조서로서도 충분한데 아닥사스다가 예루살렘 중건을 허가하는 두 번째 조서까지 발행하게 된 것은 왕의 변덕과 메가비주스의 반란의 결과였다. 이와 관련된 중요한 사실은 대규모의 반란을 지도할 당시 메가비주스 강(江) 서편 지역의 총독이었다는 것이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그의 관할 구역이었고, 예루살렘도 그 구역에 포함되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를 보면 유대인이 성전과 예루살렘을 중건하며 겪은 고생들이 잘 나타나 있다. 에스라 4장 4-6절에는 고레스(539-530 B.C.), 다리오(522-486), 아하수에로(486-465)의 재위 기간이 겪었던 어려움들이 소개되었다. 에스라 4장 7-23절에는 사마리아인들이 아닥사스다왕(465-423)의 예루살렘 중건 허가에 대해 불평했던 일들과 아닥사스다가 기원전 457년의 조서를 번복하여 성전 중건을 중지시켰던 사정을 보고하고 있다.
사마리아인들의 이 항의 상소는 지방 관리들이 아닥사스다왕에게 직접 올린 상소였고, 왕은 이 상소를 받고 그 지방 관리들에게 직접 칙답을 보냈다(스 4:7, 8, 17).
왕과 지방 관리들 모두 지방 총독을 통해 문서를 전달하는 관례적인 절차를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례적 현상은 당시 그 지역 총독이 국왕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항하고 있었다는 사정을 감안하면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당시의 사건 전말을 알기 쉽게 재구성해 보자.
538/537년에 고레스 왕이 성전 재건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귀환을 명하는 조서를 내렸다(스 1장).
520년 경, 강 서편 총독 닷드네(Tattenai : 이 이름이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되었다)가 당시 16년째 계속되어 온 성전 중건 공사 현황을 직접 답사한 후 다리오(다리우스)왕에게 유대인들에 대한 고레스왕의 성소 중건 조서의 사실 유무를 확인해 달라는 상소를 올린다(스 5:3-17).
519년 경, 다리오가 고레스의 조서를 확인하는 새 칙령을 반포했다(스 4:1-12). 예루살렘 성의 중건에 대한 고레스, 다리오, 닷드네의 언급은 없고 성전 중건에 대한 그들의 언급만이 있다.
457년에 아닥사스다 1세가 세 번째 조서를 내렸는데, 이것은 수도로서의 예루살렘의 지위를 회복시키는 칙령이었다. 그는 동시에 유대 법과 바사 법을 시행할 행정관과 재판관들에 대한 임명권까지 부여했다(스 7:12-26). 물론, 이 칙령은 행정부 관리들의 주택, 관청 및 재판소, 성벽, 군인들을 수용할 성채의 건설을 허가하였다. 이러한 건물들과 방비 시설이 없이는 행정관과 사법관의 임명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에스라는 팔레스틴으로 직행하여 예루살렘을 중건하는 긴 역사(役事)를 지휘한다(스 7:1-10).
메가비주스가 10여 년 후인 기원 전 448년에 반역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정은 사마리아인들이 아닥사스다왕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이 성을 견고히 쌓아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고 오해하도록 유도하기에 좋은 배경을 제공했다. 아닥사스다왕은 이같은 상황에 영향을 받아 사마리아인들은 공사를 중단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동안 쌓아올린 성을 허물고 성문과 성전 문을 불살랐다.
한편, 바사 제국의 여러 수도들의 하나였던 수사 성(1세기 전 다니엘일 다니엘 8장의 묵시를 볼 때 살았던)에서는 느헤미야가 또 고국의 재건 사업을 걱정하고 있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잔을 받들어 올리는” 사람이었다(느 1:11). 그는 팔레스타인에 큰 반란이 일어나고 있던 사정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왕이 예루살렘 중건을 중지시킨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태의 추이를 대단히 걱정하였다.
느헤미야에게는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한 동생(에스라 7장 2절에 의하면 친동생)이 있었다. 만약, 하나니가 바사(페르시아)로 오기라도 한다면 그를 통해 그 곳 사정을 알아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느헤미야의 동생인 하나니가 수사에 찾아왔다. 느헤미야는 이것저것 예루살렘에 대해 궁금한 사정을 물어보게 되었고, 그를 통해 들은 소식은 하나같이 낙담스러운 것뿐이었다.
하나니에 의하면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는 것이다(느 1:3).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여러 날 동안 슬퍼하였다”(느 1:4). 느헤미야는 동생을 통해 들은 소식으로 너무나 마음에 충격을 받아 3, 4개월 동안 얼굴에 화색을 잃고 지냈다(느 1:1; 2:1을 비교). 왕 아닥사스다는 그때 업무 관계로 제국의 다른 지역을 순찰 중이었다. 왕이 얼마 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도 왕의 술잔을 받드는 사람인 느헤미야는 얼굴에 희색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요행히 그 때 심기가 나쁘지 않았던 아닥사스다가 그에게 무슨 걱정이 있느냐고 물었다. 느헤미야로부터 저간의 사정을 들은 왕은 즉각 일련의 효과적인 행정 지시를 문서화하고 느헤미야를 시켜 이 문서를 새로 부임한 강 서편 총독 산발랏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 중건 경비를 국고에서 지출케 하고 느헤미야로 직접 중건 공사를 지휘 감독케 하였다.
일부 주석가들은 느헤미야가 동생 하나니로부터 근래 재건된 성전 이외의 전체 도시가 142년 전 즉 기원 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의 손에 파괴된 그대로 남아 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곤란한 주장이다. 느헤미야는 이미 어릴 때 느부갓네살에 의한 예루살렘 파괴를 익히 알고 있었다. 만약, 느헤미야가 이전에 그 동안 예루살렘 성의 중건 공사가 상당히 진척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기원 전 444년에 그의 동생이 전한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었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렇게 놀랄 까닭이 없는 것이다.
444년 전까지는 예루살렘 성 중건 허가가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성서학 자들은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여러 자료들을 간과했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수도로서의 지위 회복과 그에 따른 방위 및 통솔 장치의 재건을 허락한 457년의 조서가 444년의 조서보다 490년 예언기간의 출발점으로서 더 적합한 것이다.
부록 28 오토만 제국의 멸망―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회교국인 터어키가 유럽에 끼친 영향은, 모하멧의 사후 1세기 반 동안 사라센인들의 파멸적인 침입이 동로마 제국에 끼쳤던 영향만큼이나 심각하였다. 종교 개혁시대를 통하여 터어키는 유럽의 그리스도교국들에게 계속적인 위협이 되었다. 개혁자들의 저술들은 오토만의 세력을 전적으로 정죄하였다. 그리스도인 저자들은 이후부터 미래의 사건들에 있어서 터어키의 세력과 그것이 쇠퇴할 것을 미리 내다보았다.
뒷 장(章)에서, 조시아 릿치는 여섯째 나팔의 일부인 “연월일시”에 대한 예언이란 항목에서 이 시간에 대한 예언을 1840년 8월에 터어키의 독립이 끝난 일에 적용시켰다. 릿치의 견해는 그의 책 The Probability of the Second Coming of Christ About A. D. 1843 (published in June, 1838)과 성직자들에게 한 연설(1840년 봄에 출판됨; 오토만 제국의 몰락에까지 이어지는 예언적 기간에 대한 이전의 계산이 정확함을 입증하는 역사적인 자료를 곁들여서 만든 2판은 1841년에 출판됨.)과 1840년 8월 1일, Signs of the Times and Expositor of Prophecy에 실린 기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Signs of the Times and Expositor of Prophecy, Feb. 1, 1841에 실린 기사와 J. N. Loughborough, The Great Advent Movementpp. 129-132 (1905 ed.)를 참조하라. 우리아 스미스가 쓴 책, The Prophecies of Daniel and the Revelation, rev. ed. of 1944는 pp. 506-517에서 이 예언에 대한 예언적 타이밍을 논하고 있다.
오토만 제국의 초기 역사와 터어키 세력의 몰락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William Miller, The Ottoman Empire and its successors, 1801-1927 (Cambridge, England: University Press, 1936); George G. S. L. Eversley, The Turkish Empire From 1288 to 1914 (London : T. Fisher Unwin, Ltd., 2d ed., 1923); Joseph von Hammer-Purgstall, Geschichte Des Osmannischen Reiches (Pesth: C. A. Hartleben, 2d ed., 1834-36), 4 vols.; Herbert A. Gibbons, Foundation of the Ottoman Empire, 1300-1403 (Oxford: University Press, 1916); Arnold J. Toynbee and Kenneth B. Kirkwood, Turkey (London, 1926)을 참조하라.
부록 29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지 못하게 함―평신도들에게 일반 대중의 말로된 성경이 배포되는 것에 대하여 로마 카톨릭교회가 취하는 태도에 관하여는 Catholic Encyclopedia, art. “Bible”: also G. P. Fisher, The Reformation, ch. 15,
■ 저자
느헤미야가 본서의 저자라는 데는 큰 이의가 없다. 특히 본문에 나타난 주어의 대부분이 1인칭인 것은 느헤미야 자신이 저자임을 가리킨다. 자신을 3인칭으로 언급하는 곳도 있으나 98:9; 10:1; 12:26, 47) 같은 시대의 다른 인물들과 함께 자신을 열거하면서 지난날 자신의 행적을 회고하는 것이다.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는 바사(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 1세의 수산 궁에서 술따르는 일을 맡은 관원으로서 영향력 있는 지위에 있었다(B.C. 465-424). 그의 이름 끝자인 '야'는 그 가족이 유다 전통 신앙에 충실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느 1:1). B.C. 444년에 친척 하나니로부터 예루살렘의 유대 인들이 겪고 있는 참상을 전해 듣고 슬퍼하며 수심에 가득차 있덛 중 왕의 허락을 받아 총독의 자격으로 예루살례ㅁ 성벽의 재건을 위하여 백성들과 동고 동락한다. 담력과 지혜, 겸손과 신념, 불타는 애국심과 경건한 신앙심을 갖춘 지도자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대사역을 마친 뒤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 이 책을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저작 연대
본서의 사건들은 대략 B.C. 445-425년경에 일어난 일들로서,느헤미야가 총독 자리에서 물러난 뒤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저작 연대는 대략 B.C. 420년경으로 추정된다.
역사적 배경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서 술 맡은 관원으로서 섬겼던 아닥사스다 Ⅰ세는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아하수에로 왕의 아들이었다. 부림절(에 9:20-32)은 아닥사스다 Ⅰ세의 즉위 8년 전, B.C. 473년 3월 8일 에 제정되었다. B.C. 458년 봄,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으로 유대 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이듬해 봄 이방 여인과의 결혼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예루살례ㅁ 성전 재건까지 여러 문제 해결에 착수했다. 그러나 르훔과 심새의 온갖 방해로 인하여 유대 인들은 참극(스 4:7-16, 21, 23 느 1:3)을 겪는다. 이러한 비보를 전해 들은 느헤미야는 바사 왕실의 안락한 자리를 버리고 예루살렘에 돌아온다. 그리하여 B.C. 445-420년에 이르기까지 유대 민족의 정통성 회복과 순수성 유지에 온 정성을 다 쏟는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동시대의 인물로서 활동했다(느 8:1-9;12:26).
주요 내용
본서에 나타난 주요 내용은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과 여호아의 율법에 대한 충성이다. 예루살렘 성벽은 유대 인들에게 있어서 성전과 더불어 민족의 상징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원수들의 갖가지 조롱과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일어나 건축하라는 나팔소리는 결국 승리의 환호로 이어져,죄악으로 인해 허물어졌던 성벽이 갖은 고초 가운데서 재건되었다. 이는 포로 후의 새출발에 있어서 새 삶의 터전이 되었고, 또한 신앙의 증거로서 후대에 큰 귀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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