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urt Pieters, 1872-1958)
하나님의 사람 알렉산더 피터스: 구약성경번역에 결정적 공헌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urt Pieters, 1872-1958)는 약 47년간이라는 적지 않은 세월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던 분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구약국역에 있어서 불후의 공적을 남겼다. 최초로 구약의 한국어 번역을 시작한 선구자로서, 또한 현재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 성경의 구약 개역 작업을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주역으로서 알렉산더 피터스는 우리에게는 잊지 못할 귀중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에 관해 알려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86년 전, 1895년 4월 7일 아침은 주일이었다. 나가사키의 일본교회 주일예배에 참석했던 한 깨끗한 용모의 외국 청년이 예배를 마친 후 독일어를 말할 수 있는 선교사를 찾고 있었다. 마침 그곳에 있던 피터스(A.A.Pieters)라는 선교사가 이 청년의 요구에 응하게 되었는데, 이 낯선 청년은 유대인으로서 개신교 신앙의 교리를 좀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이 청년은 남부 러시아에 있는 어느 유대인의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그 당시 나이는 23세였다. 그는 인문고등학교(Gymnasium)를 졸업했으며, 독일어, 라틴어, 희랍어, 히브리어, 러시아어에 대한 어학실력을 가졌다. 불어도 좀 알고 고향을 떠나 일본까지 오는 길에 영어도 배우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혹독한 생활환경과 미래에 대한 좌절감 속에서 이 청년은 아버지 집을 떠나 외국으로 나가서 자기의 인생을 개척하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먼저 호주로 가려고 수에즈운하가 있는 지중해안의 항구 포트사이드(Portsaid)까지 갔으나, 거기서 호주에서 되돌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여러 가지 그곳의 악조건 이야기를 듣고 호주행을 포기하였다. 이번에는 미국으로 가려고 마음먹고 홍콩까지 오게 되었는데, 홍콩에서도 이 청년은 미국에 가 봐도 별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시 동부 시베리아로 가서 철도건설 하는데 노동자로 취직하려고 생각하고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ck)로 가는 기선을 타기 위해 며칠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베리아의 철도 노동자로 취직하러 되돌아가기 위해 잠시 머무는 동안, 이 청년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주일 아침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통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유대교 신앙을 배웠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이 청년은 독일 철학을 연구하였다. 독일 철학도 그를 위안해 주지 못했다. 그래서 이제는 개혁교회 신앙을 통해 그의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겠는지 막연한 기대와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찾아온 유대인 청년에게 선교사 피터스 목사는 그가 원하는 기독교의 진리를 가르쳐 주었고, 이 청년은 진지하고 열심히 그 가르침을 받았다.
벌써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과, 기록된 성경의 거룩한 계시를 인정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이 세상의 죄를 지시고 대속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리에 심취한 이 청년은 블라디보스토크행 기선에 도착했지만 떠나기를 연기하고, 좀 더 깊은 신앙의 지식을 얻기 위해 그 곳에 머물렀다. 마침내 기독교 교리에 대한 중요한 골자를 다 배웠다고 했을 때, 이 청년은 복음서에서 말하는 세례를 받고 싶다고 간청하게끔 되었다. 그래서 4월 19일 저녁에 선교사 피터스 목사의 집례로 몇 사람의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 유대인 청년의 엄숙한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4월 7일에서 4월 19일까지 불과 12일 만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였다.
이제 기독교인이 된 이 청년은 4월 21일 아침 목적하는 시베리아로 향해 떠나려고 하였다. 그 동안 이 청년은 누구에게 조금도 구차한 도움을 청하지 않는 고상한 인격을 보여주었다. 이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인이 되었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그를 지켜보고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이 청년이 철도노동자가 되기 위해 시베리아로 떠나버리는 것을 모두 아쉽게 생각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청년을 부르시는 뜻이 계셔서 이곳까지 인도하시고, 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닐까? 시베리아 철도건설 노동자보다 주님을 위해 좀 더 보람된 일을 할수 있는 일터가 이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마침내 일본 주재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목사는 이 청년에게 미국 성서공회의 성경 매서인(Colporteur) 자격으로 한국에 가서 일할 생각이 있느냐고 제안하게 되었다. 루미스 목사는 “이 제안은 기쁨으로 수락되었다”고 기록을 남기로 있다.
이제 영어를 말하는 선교사들을 돕기 위해 이 청년은 계속 영어를 배우면서 약 열흘 동안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5월 16일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불과 수개월 후에 그는 어학선생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경을 반포하기 위해 서울 근교 시골로 찾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누구든지 종교를 바꾸게 되면 그의 이름도 새로 바꾸어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청년은 세례를 받을 때 그의 전 이름을 버리고, 그에게 기독교 진리를 가르쳐 준 선생이요 친구가 된 일본 주재 선교사 피터스 목사의 이름을 따서 자기 이름도 피터스로 바꾸었다고 한다. 유대인으로서 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바로 이 청년이 최초의 구약국역 선구자인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 Pieters, 피득)였다.
1895년 12월 5일 알렉산더 피터스 청년은 일본에 있는 루미스(H. Loomis) 목사에게 서울에서 그의 권서활동 보고서를 발송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루미스 목사는 이렇게 예언하고 있었다. “만약 이 청년의 생명을 보존하신다며, 그는 저 밤의 어두움이 깃든 땅(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아주 유능한 일꾼이 될 것이다.” 이 예언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23세의 청년 알렉산더 피터스가 한국에 도착한 1895년까지 구약은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었다. 당시 예수를 믿게 된 많은 사람들은 로스(J.Ross)역을 통해서 기독교 진리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로스역이 당시 한국인들에게 끼친 영향은 마틴 루터(M. Luther)역의 독일인들에게 대한 영향관계와도 같다고 비교하였다. 그러나 성서위원회에서는 로스역과는 상관없는 완전히 새로운 신약번역에 착수하고 있었고, 구약번역의 전망은 아직 멀기만 하였다. 알렉산더 피터스는 자신이 구약번역에 손대기 시작한 최초의 동기를 이렇게 적고 있다:
한국에서 처음 복음서가 번역되어 나온 지 15년 만에 구약번역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 동기는 필자(알렉산더 피터스)가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자라났으며, 매일 히브리어로 된 기도집을 읽었기 때문에 시편의 아름다움과 그 영적인 영감이 강하게 인상으로 남게 되었고, 많은 시편을 암송하게 된 것이었다. 그 후 하나님의 섭리로 일본에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고, 미국성서공회의 권서로 한국에 보냄을 받았다. 그것이 1895년이었다. 당시 한국의 성서위원회가 신약을 새로 번역하고 있었으며, 구약이 앞으로 번역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을 알고서 필자는 한국 사람들에게 최소한 시편 중에서 얼마라도 번역해 주고 싶은 바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편 영어를 배우면서 한국어도 습득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도착한지 2년째 말에 가서 필자의 히브리어 성경 지식에 힘입어 시편 중에서 저주시편들(the Imprecatory Psalms)만 빼고 나머지를 골라서 감히 번역을 시도하였다. 시편의 절반 정도 분량으로 번역은 1년 내에 끝났다. 이러한 번역 본문이 사용 가능한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그 원고를 한국어를 잘하시는 네 분 선교사들에게 보내어 심사를 요청했다. 그 분들이 이 번역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그 중 세 분은 이 시편역을 인쇄하는 비용도 대겠다고 나섰다. 시편촬요라고 제목을 붙인 이 책은 1898년 출판되었고, 이후 8년 동안 유일한 한국어 구약역으로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어떤 소설의 주인공과 같은 극적인 기독교 개종 역사와 한국에 권서로 파송된 지 3년 후 26세의 청년 알렉산더 피터스는 이 땅에 최초로 구약의 시편을 국역하는 잊지 못할 귀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런데 알렉산더 피터스의 결정적인 공헌은 1926년 이후 구약개역위원회의 주역으로 1938년 마침내 국역 구약개역성서를 완간하게 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알렉산더 피터스는 구약국역의 최초의 선구자일 뿐 아니라 또한 주역으로서 한국교회의 선교와 그 신앙언어 역사와 신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로자이다. 이영헌 교수는 제1회 이수정 기념 공개강좌에서 이수정은 “한국의 마케도니아 사람”(행16:6-10 참조)이라고 지적하였는데, 알렉산더 피터스는 아마도 이 마케도니아 사람의 청을 듣고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로 응답하여 보내신, 그의 한문 이름 “彼得”이라는 문자 그대로 “한국의 베드로”(비교. 행11:1-18)라고 할 만한 하나님의 말씀의 일꾼이었다.
- 김중은 장신대학교 총장의 설교 "하나님의 사람 알렉산더 피터스" 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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